'꼬꼬무' 셀럽 출신 불륜녀 나혜석, 어쩌다 상간남 '정조유린죄' 소송 걸었나[어제TV]

서유나 2021. 12. 31.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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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서유나 기자]

셀럽 출신에 불륜의 죄로 이혼녀 딱지를 달게 된 나혜석이 상간남에게 '정조유린죄' 소송을 걸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2월 30일 방송된 SBS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11회에서는 '세기의 이혼 스캔들,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모던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인생을 조명했다.

1920년 4월 20일 이른 아침 배달된 신문은 경성을 뒤집어놨다. 신문 안에는 지금 일어나도 눈을 의심하게 될 획기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바로 한 신랑 신부가 경성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는 '공개 청첩장'이었다.

이런 청첩장을 보낸 신랑과 신부는 양측이 전부 경성의 셀럽이었다. 남자 김우영은 35세의 엘리트 변호사, 그리고 신부 나혜석은 여성이 고등학교만 나와도 엘리트 소리를 듣던 101년 전 무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25살 최초의 서양화가였다.

두 사람의 결혼의 특별한 점은 또 있었다. 돌싱인 김우영은 약 5년을 쫓아다녀 나혜석과 재혼을 하게 됐는데. 이때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네가지의 파격적인 조건을 달았다. 첫째 일생동안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 둘째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셋째 시어머니와 따로 살게 해줄 것, 넷째 신혼여행 장소는 내가 정하는 것이었다.

나혜석은 해당 조건들로 시대적으로 당연시 되던 남성의 축첩(첩을 갖는 것), 시월드를 전부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신혼여행지로 첫사랑의 무덤을 택하는 충격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여자에게 과거가 있으면 소박맞는 사회 분위기에 과감히 맞섰다.

이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임신을 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나혜석은 임신, 출산, 육아로 하루하루 전쟁과 같은 나날을 보내며 '단 한시간만이라도 편히 자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나혜석은 이런 고통스러운 심정을 글로 써 잡지에 싣기로 했는데. 당시 나혜석은 자식을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표현하며 세상을 한차례 뒤집어놨다. 나혜석은 이를 통해 '트러블 메이커'라는 수식어를 달게 됐다.

나혜석은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하며 살았다. 남편 김우영이 1923년 만주 안동현 일본 영사관의 부영사로 근무하게 되자 따라서 중국으로 가게 된 나혜석은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도왔다. 또 나혜석은 남편과 1년 9개월간의 세계 여행을 즐기고 1929년에 경성에 귀국했다.

문제는 이 세계 여행이 나혜석의 인생을 180도 바꿔놨다는 것. 나혜석은 프랑스에 머무는 도중 남편이 법공부를 위해 잠시 독일로 떠나게 되자 자신은 프랑스에 남아 미술 공부를 했다. 이때 나혜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친일인사로 변절하는 최린을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눴다. 이 두사람이 외도를 했다는 소문은 유학생 사이 알음알음 퍼졌고 결국 남편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가게 됐다.

남편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황당한 건 이런 남편 김우영 역시 당시 기생을 첩으로 두고 있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당시 간통죄는 여자에게만 적용이 됐고 결국 나혜석은 결혼 11년만에 빈털터리로 양육권까지 전부 빼앗긴 채 이혼을 당했다. 나혜석은 먹고살 길을 찾아 곧장 미술학사(미술학원)을 열지만 남자들은 나혜석을 '화냥X'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학생들의 수업 등록을 취소시켰다. 당시엔 '이혼하면 화녕녀'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온갖 수모를 당하며 미술학사의 문까지 닫게된 나혜석은 참지 않았다. 나혜석은 정조를 못지킨 여자가 손가락질 받는다면 정조를 빼앗은 남자 역시 그만큼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최린은 장관급으로 승진하며 잘먹고 잘살고 있었고 이에 기가막힌 나혜석은 최린에게 '정조유린죄'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

'조선 남성의 생각은 이상합니다.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아내나 일반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남의 여성 정조를 빼앗으려하고. 종종 제멋대로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여성이 나타나면 쾌락을 맛보면서 뒤에서는 말살시키고 뒷담화를 합니다. 이게 무슨 어이없고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입니까'라는 기고글도 연이어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난은 여전히 나혜석만을 향했고, 항상 나혜석에게 힘이 되어주던 친오빠마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정조는 개인의 취향이라는 의미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오직 취미입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시대상에 저항했다.

하지만 나혜석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나혜석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기댄 그림은 어느날 발생한 화실 화재로 전부 불타 고작 10여점만이 남았고, 이어 화가에겐 치명적인 파킨슨 병이 그녀를 잠식했다. 여기에 큰아들의 비보까지 들은 나혜석은 아이들을 보고자 가지고 있던 그림들을 초라한 행색으로 급히 처분했으나 시댁의 반대로 만나지 못했다. 나혜석을 목격한 이들의 기억 속, 나혜석은 1946년경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고 1949년엔 행방불명됐다.

이런 기구한 삶을 산 나혜석의 인생관은 그녀가 젊은 시절 쓴 시 한편에서 엿볼 수 있었다. 나혜석은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착한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착한 아내인 인형으로. 그들의 노리개였네 (중략)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아버지의 딸이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라고 글을 적었다. 비록 불륜으로 양면성이 있는 삶을 산 그녀지만 여성들을 위해 앞장서 행동한 나혜석의 삶에 이날의 이야기 친구 이현이, 이미도, 정성호는 경의를 표했다.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뉴스엔 서유나 stranger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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