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영의 골프장 인문학] 디오픈과 로열세인트조지스
![올해로 15번째 디오픈을 개최하는 로열세인트조지스, 멀리 1번 홀 티하우스와 백색 목책이 보인다. [사진=RSG]](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107/16/ned/20210716071658002bcvw.jpg)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윌리엄 레이들로 푸브스(William Laidlaw Purves)는 영국 잉글랜드 남부 켄트의 샌드위치에 있는 세인트클레멘트 교회탑에 올라 해안선을 본 순간‘골프코스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푸브스 박사는 당시 32개나 되는 클럽의 회원이었을 만큼 열렬한 골프광이었고 실력도 뛰어났고 뼛속까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골프장 위치는 디오픈을 1번(1932년) 개최한 프린스와 2번 개최했던 로열싱크포츠(1909, 1920년) 사이 스투어강 하구와 영국 해협 사이 8km에 달하는 길쭉한 링크스 부지에 위치한다.
그는 1887년에 골프장을 설계한 뒤 세인트앤드루스사우스(south)라는 골프장 이름을 고민했으나 결국 잉글랜드의 수호 성자인 세인트 조지로 골프장 이름이 바뀌었다. 골프장 로고에 말을 타고 창을 든 기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또한 평소에 꽂아두는 홀 깃발은 잉글랜드 국기면서 동시에 세인트 조지의 십자가이다.
개장 7년 후인 1894년에 세인트조지스는 스코틀랜드 밖에서는 처음으로 디오픈을 개최했고, 8년 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이며 난봉꾼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의 수장을 지낸 에드워드 7세에게서 ‘왕립(Royal)’ 칭호를 받았다.

비회원도 주중 부킹 가능
로열세인트조지스는 이후 한 세기 이상 원형과 전통을 고수했다. 벽난로 위의 나무판에는 남성 전용 클럽 회장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장군, 백작, 후작, 기사, 경, 온갖 귀족이 수두룩하며 대영제국훈장, 시민훈장, 왕위에 오른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다. 1927~28년에 골프장 회장을 지냈던 웨일스공은 후에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르지만, 미국의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려고 왕위를 말더듬이 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주고 조국을 떠났다. 여하튼 이곳은 잉글랜드 귀족 전통을 유지하는 코스다.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가 2015년 여성 회원을 받아들인 이후로 R&A에서 ‘금녀 정책’을 취하는 디오픈 순회 개최지들을 보류했다. 이곳은 고민 끝에 2017년에 여성 회원을 받기로 하면서 대회 개최지 지위를 회복했다. 디오픈 순회코스 중에는 지난 2019년에 마지막까지 버티던 뮤어필드가 275년만에 금녀 정책을 포기했다.
회원제 코스지만, 해외에서 골프장을 찾는 비회원도 주중에는 부킹할 수 있다. 다만 시간과 방식의 제한이 있다. 우선 핸디캡 18이하라는 증명서를 지참해야 한다. 화요일을 제외하면 월~금요일에는 2볼 플레이를 해야 한다. 2명이 한 개의 볼을 번갈아 쳐야 한다는 얘기다.
그린피는 3월부터 10월까지는 250파운드(39만원),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160파운드(25만원)이며 핸드폰은 코스나 심지어 클럽하우스에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반바지를 입을 수 있지만, 그때는 무릎까지 오는 긴 양말을 신어야 한다. 클럽하우스나 골프장에 들어갈 때는 재킷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는 등의 엄격한 드레스 코드를 유지한다.

블라인드 샷을 많이 하는 코스
이 코스는 또한 첩보 영화 007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인 이언 플레밍이 1959년 <007 골드핑거>를 쓴 무대이기도 하다. 007시리즈 14권 중의 7권째 소설에 상당한 비중으로 소개되고 영감을 준 이 코스의 이름은 ‘로열세인트마크스’였다.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 역할은 숀 코너리가 맡았고 정작 촬영은 이곳이 아닌 런던 인근 파인우드 촬영 스튜디오와 가까운 스토케파크에서 했으니 아이러니다. 하지만 원저자 플레밍은 로열세인트조지스의 회원이었고, 이 코스의 회장으로 당선되고 난 뒤 점심식사를 이 클럽에서 하고 그날 저녁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인으로는 최초의 디오픈 챔피언이자 이 코스에서만 2승을 거둔 월터 하겐의 코스평이다. “전반 나인 홀, 엄청난 재미를 주지만 훌륭한 플레이는 할 수 없다. 후반 나인 홀은 훌륭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재미는 전혀 없다.”
수많은 블라인드 샷을 해서 이런 평가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코스는 변화를 거쳤다. 6번 홀의 그린 뒤와 왼쪽에는 스위스 알프스의 이름을 따 융프라우라고 부르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있다. 티와 그린 사이에 정확하게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서풍이 부는 180야드 부근에서는 힘겨운 블라인드 샷을 필요로 했는데 전장을 계속 늘린 끝에 이제 모래언덕은 디오픈 갤러리를 위한 멋진 자연 전망대가 됐다.

히말라야 벙커에 누가 빠질까
1949년까지 디오픈 9번을 개최했던 이 코스는 이웃한 코스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프랭크 페닉이 코스 리노베이션을 했고, 골프장으로 들어오는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32년만인 1981년에 디오픈을 개최하게 됐고,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디오픈 코스로 사랑받는다.
로열세인트조지스의 1번 홀 티잉구역은 디오픈을 15번 치렀다는 것을 보여주듯 흰색의 목책이 챔피언티부터 화이트티까지 걸쳐 U자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그 옛날 대회를 할 때 갤러리들이 선수들의 샷을 보려고 끊임없이 몰리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만든 것 같다.
이 코스를 연상시키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높이 12m로 영국에서 혹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4번 홀 중간의 히말라야 벙커다. 개리 플레이어가 1993년도 오픈에서 이 거대한 벙커에 티샷이 빠져서 탈출했을 때만 해도 470야드였다. 2011년에는 티잉 구역을 25미터 뒤로 늘려 495야드로 만들어서 이 벙커를 넘기거나 우회하도록 했다. 따라서 올해도 이 홀에서 브라이슨 디섐보같은 장타자가 바로 넘기는지를 보는 게 관전 포인트다.
수에즈운하 홀로 불리는 547야드의 파5 14번 홀은 오른쪽이 온통 아웃오브바운즈(OB)인 게 특징이다. 프린스 클럽과 맞붙어 있어서 백색 말뚝으로 줄지어 표시를 했다. 1993년 디오픈에서 베른하르트 랑거가 3일 내내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더니 마지막 날에는 선두로 나섰다. 하지만 야심차게 친 드라이버 샷이 슬라이스가 나서 공은 울타리를 넘어 프린스 코스까지 날아가버렸다. 랑거는 이 홀에서 더블보기를 적어내면서 그렉 노먼에게 우승을 넘겨줬다.
그래서 이 코스는 영국 왕실의 귀족에서부터 007 제임스 본드를 거쳐 수많은 선수와 명사들의 희로애락이 만화경처럼 얽혀 흐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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