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본 26년 연재소설, 목소리로 재탄생

오디오북 감독 이민주
녹음만 200시간 넘어, 최다 성우 출연 ‘토지’ 작업
“독자가 편히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 만들 것”

‘200자 원고지 4만여장에, 책은 20권, 연재 기간은 무려 26년.’

1969년 박경리 작가가 장기 연재한 대하소설 ‘토지’가 그랬다. 소설 토지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지주 계층 최씨 일가의 몰락을 통한 가족사를 그린 한국 문학계 수작이라고 손꼽히는 작품이다. 대하소설이니 한 장씩 넘겨보는 것이 부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때인가. 인공지능(AI)이 우리 삶을 지켜보고 가르치는 시대다. 이 따위 소설 쯤이야. 대한민국이 내로라하는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가 최근 ‘듣는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윌라 오디오북은 ‘토지’ 20권을 4권씩 1부로 엮어 총 다섯 부로 구성했다. 1권당 12시간으로 총 러닝타임은 240시간이다. 국내 오디오북 최장 러닝타임 66시간을 뛰어넘었다. 공개된 1부에 참여한 성우만 16명. 역대 최다 성우가 출연한 오디오북이다. 또 토지 오디오북 1부에는 총 3명의 감독이 참여했다. 그중 전체 녹음 약 70%를 담당한 이민주(28)감독에게 오디오북 감독 이야기와 토지 작업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토지 작업을 맡은 이민주 감독. /jobsN

-자기소개해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윌라 오디오북 감독 이민주입니다.”

-오디오북 감독이라는 직업은 조금 생소한데, 어떤 일을 하나요.

“오디오북 작업 파트는 크게 소싱, 에디터, 감독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소싱팀에서 녹음 작업할 작품을 고르고, 에디터팀에서 원고 대본화 작업을 거칩니다. 이후 감독이 성우와 녹음하고 추후 오디오 작업을 하는 등 연출과 녹음 전반의 작업을 맡아요. 성우 한 분 한 분이 악기고, 감독은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성우들이 멋있게 연주하면 그걸 감독이 정리하죠.”

-오디오북을 만드는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우선 에디터가 작품에 맞는 성우를 섭외하는데, 이때 감독들도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오디오북은 읽는 게 아닌 듣는 책이기 때문에 에디터가 표나 주석에 대한 대본화 작업을 거칩니다. 이렇게 대본화한 원고를 받아 검수 후 성우들과 녹음을 합니다. 녹음 후 2차 검수가 이뤄집니다. 1차 검수를 했더라도 성우가 실제로 녹음한 걸 들어보면 수정 및 보완할 것이 또 보이기 때문이죠. 저도 원고를 잘못 읽을 때도 있고, 줄을 띄어 읽거나 편집하다가 누락할 때도 있어요. 작가 의도와 다르게 읽힐 수도 있죠. 2차 검수 후 소리 가공 작업을 합니다. 효과음과 배경음악을 넣고 성우 목소리도 가공해요. 거센 발음, 울리는 소리 등을 기술적으로 만져서 더 듣기 좋게 작업하죠.”

-오디오북 감독이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 다닐 때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습니다. 오디오 관련 일을 하면서 작곡 및 작품 활동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공연, 연극 등에서 음향 감독 및 사운드 오퍼레이터로 일했고, 에버랜드 엔터테인먼트부에서 방송음향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020년 윌라 오디오북으로 이직했습니다. 공연 음향 담당으로 일하고 있을 때, 윌라 클래스 콘텐츠 외주 작업도 맡았어요. 그때 처음 오디오북을 접했고 오디오로도 책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작업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청각 콘텐츠이지만 음악과는 다른 매력을 느껴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처음 맡았던 작품은 무엇인가요.

“윤지현 작가의 ‘정신과 의사’입니다. 특별히 홍보를 많이 하지 않았는데 재생 수가 많이 나와 신기했죠. 이후 전대진 작가의 ‘실컷 울고 나니 배고파졌다’를 작업했습니다. 시집 같은 책입니다. 성우의 나긋한 목소리 위에 효과음을 넣으니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부터 오디오북 작업에 더 큰 재미를 느꼈습니다.”

-작업 전 작품을 다 읽는 편인가요.

“최대한 다 읽어보려고 합니다. 소설에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있는데, 책을 먼저 읽으면서 어떤 효과음이 들어가야 할지, 어디서 호흡을 줄지, 어떤 장치로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살릴 수 있을지를 고려하면서 읽습니다.”

과거 취미 활동으로 앨범 작업도 했었다. /본인 제공

이민주 감독이 가장 최근 작업한 작품은 토지다. 토지는 박경리 작가가 26년 동안 집필한 대하소설이다. 200자 원고지 4만여장은 20권의 소설이 됐고, 이 대하소설은 최근 오디오북으로 재탄생했다. 대하소설인 만큼 오디오북 제작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1년이 걸렸고, 전체 러닝타임만 240시간에 달한다. 2021년 10월 1부가 공개됐고, 2022년 2월까지 매달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토지 오디오북은 공개되자마자 인기를 얻고 있다. 플랫폼 공개 후 10일간 누적 재생 횟수는 27만회다. 이화진 윌라 콘텐츠팀 부장은 “긴 분량의 대하소설이 짧은 기간에 1위에 오른 건 이례적이다”라고 말했다. 유명한 소설인 만큼 평소 읽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길어 시도를 못했던 젊은 독자들이 많이 찾은 결과라고 보고 있다.

-토지를 맡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 집에 토지 책이 있었고 어머니께서 읽으라고 권하셨어요. 그러나 읽지 않았어요. 회사에서 토지 오디오북 작업을 시작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어머니께서 그 소설을 좋아하신다는 게 떠올라 제가 한다고 했죠. 작품을 맡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정작 어머니께서는 시큰둥하셨습니다.”

-대작이면서 작품 양도 엄청난데, 어떤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나요.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한편으로는 방대한 양에 걱정도 됐습니다. 독자가 최대한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작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작업량이 많다 보니 여러 감독이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제가 메인으로 있고 감독 두 명이 함께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등장하는 성우도 많습니다. 1부에 16명, 2부에는 20명의 성우가 출연했습니다.”

-작업 과정은 어땠고, 어려움은 없었나요?

“오디오북 특성상 캐릭터 대사보다 내레이션이 많아 동시 녹음이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내레이션 메인으로 정재헌 성우가 녹음을 했고, 다른 캐릭터 대사가 나오면 이를 건너 띄고 녹음했어요. 다른 캐릭터는 따로 녹음을 했고 나중에 파일을 합치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어려운 점은 시대물이기 때문에 연출 부분에서 조심스러웠어요. 특히 시대에 맞는 효과음을 찾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게 갑자기 기타나 그랜드 피아노 소리를 넣을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어 옷깃 스치는 소리도 한복끼리 스치는 효과음을 찾아 넣었고 땅 밟는 소리도 당시 배경에 맞는 흙바닥 밟는 소리를 찾아서 작업했습니다. 찾는 효과음이 없을 때에는 직접 녹음하기도 합니다.”

토지는 과거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SBS 홈페이지 캡처

-토지 1부를 작업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1부 1권에서 어린 봉순 역을 맡은 박하진 성우가 무당을 흉내 내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본에는 멜로디가 따로 표현된 게 아니라 글로만 써있어서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하기도 했고 기대도 됐어요. 녹음 당일에 너무 잘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악보를 드린 것도 아닌데, 너무 잘 표현하셔서 그 부분이 기억에 남네요.”

-2부는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써서 작업 중인가요?

“가장 신경 쓰는 건 독자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또 작가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걸 항상 마음에 지니고 있죠. 2부는 배경이 중국으로 넘어갑니다. 또 개화도 하고, 해외 문물이 들어올 때다 보니 음악 선곡이 조금 자유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1부에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주였다면, 2부에서는 북한 말과 일본어도 나옵니다. 잘 모르는 부분이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헷갈리는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녹음하다 보면 글로만 써 있다 보니 해석하는 데 고민이 생길 때가 있어요. 그러면 성우와 여러 버전으로 녹음하고, 나중에 맞는 걸로 고르죠. 에디터와 상의하기도 하는데, 작업이 길어지면 힘들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성우와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요.”

-토지 외에 또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마이 리틀 라이브러리 슈베르트의 연가곡’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클래식 전공이다 보니 연출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는 무엇인가요?

“우선은 토지를 듣는 독자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편하게 들을 수 있게 작업을 잘 마치는 것이 목표입니다. 또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제가 작업한 오디오북을 접할 수 있도록 활발히 활동하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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