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 서툰 가짜 연기 그냥 못 넘기는 까칠 대마왕

입력 2021. 10. 22. 22:12 수정 2021. 10. 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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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경의 '배우 열전'] (1) 연기 장인 박근형

이번 호부터 드라마 작가 최현경의 ‘배우 열전’ 칼럼을 새로 시작합니다. 최현경은 경상대 불문학과를 거쳐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연극영화학과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89년 ‘미로일기’로 드라마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금잔화’ ‘야망의 불꽃’ ‘우리가 남인가요’ ‘백만송이 장미’ ‘슬픔이여 안녕’ ‘하늘만큼 땅만큼’ ‘유리의 성’ ‘이웃집 웬수’ ‘못난이 송편’ ‘사랑해서 남주나’ 등 다수 드라마를 집필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시청률 기준 1위 드라마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는 '술래의잠'이 있으며 현재 한국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근형은 키 크고 잘생긴 외모로 젊은 시절 무수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도맡아 했다(위). 아래는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장수상회’의 한 장면.

드라마 작가로 숱한 배우들을 만났다. 그중 “아, 이 사람은 천생 배우구나,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배우가 세 사람 있는데 첫 번째로 꼽는 이가 박근형(편의상 존칭은 생략하지만 그는, 내게 진짜 선생님이시다)이다.

박근형과의 인연은 30여년 전 신인 작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잔화’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시청률은 그다지 재미를 못 봤지만 막 개국한 SBS의 존재감을 알린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근형과 황신혜 그리고 그 시절 가장 핫했던 신인 손지창이 주인공이었으니 충분히 시선은 끌 만했다. 시청률에서 재미를 못 본 것은 상대 프로가 당대의 톱스타 최수종, 최진실이 출연한 ‘질투’였기 때문이다.

박근형은 키 크고 잘생긴 외모로 젊은 시절 무수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거친 데다 연기력까지 장착한 관록의 배우였고 황신혜는 젊고, 예뻐도 너무 예뻤고 손지창은 순수하고 풋풋했다. 거기다 뒷날 로고스필름 대표가 된 이장수 감독의 미학적인 연출은 연일 연예 면을 장식했다.

신인 작가였던 나에게 박근형은 ‘어렵고 무서운 배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소문으로는 성깔 있고 수틀리면 촬영하다가도 가버린다고 했다. 까칠해서 친해지기 힘든 배우라는 말도 들렸다. 이상한 것은 함께 일하는 감독들이 해당 나이대 배역이 필요하면 대부분 일순위로 박근형을 꼽는다는 사실이었다. 연기에 관한 한 보증수표고 배우로서의 처신도 분명해 오히려 함께하기 편하다는 것이다. 나로서도 싫다 할 이유가 없었다.

‘금잔화’에서 나는 감독과 싸우느라 그와 얘기 한번 할 기회도 없이 작품을 마쳤다. 감독은 영상을 중요시한 반면, 작가인 나는 드라마 개연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의견 충돌이 많았다.

그다음 해 SBS 아침 드라마 ‘여자의 거울’에서 박근형과 또 만났다. 이번에도 감독이 그를 선택했다. 연속극이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요일에 출연자 모두가 모여 대본을 읽었다. 지금은 녹화 전날 콘티 대본을 읽는 정도지만, 그때는 배우들의 바쁜 스케줄 속에 대본 리딩은 항상 포함돼 있었다. 그만큼 대본 리딩이 매우 중요했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분위기가 긴장되고 살벌해지기까지 했다. 박근형이 신인 배우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연기나 어설프고 서툰 연기, 무엇보다 가짜 연기를 그는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배우 입장에서는, 그것도 신인이라면 매번 지적받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연습을 해 와도 그의 날카로운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보니 어떤 배우는 연습하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고 내 마음도 불편해졌다. 하지만 감독이나 나나 그가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을 만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의 대사 전달력과 발음은 모두 완벽해서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아침 드라마를 또 하게 되면 다시는 함께 일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수도 없이 했다.

이후 SBS 주말 드라마 ‘유리의 성’을 준비할 때였다. 이번에도 감독이 박근형을 선택했다. 감독은 ‘유리의 성’의 아버지 역할은 반드시 박근형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를 또 만나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박근형만큼 그 배역을 잘 소화할 사람이 없다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첫 대본 리딩을 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습이 끝난 뒤 감독과 함께 그에게 “왜 아무 말씀을 안 하시냐”고 물었다. 그는 “스타 중심으로 드라마가 돌아가는 판에 선배라고, 나이 먹었다고 지적질하면 누가 좋아하겠느냐, 앞으로는 내 연기만 할 거다”라고 시니컬한 어조로 말했다.

‘유리의 성’을 만들던 2000년대 중반, 당시 스타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소위 스타가 다른 캐스팅까지 좌지우지한다는 게 더 이상 이상할 것도 없는 시절이 됐다. 그는 스타가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 배역도 좌우한다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꼈던 것 같다. 편당 몇천만원(지금은 수억원을 받기도 하지만)을 받는 스타의 말 한마디에 선배들의 경력이나 실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심지어 잘릴 수도 있는 세태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은 “그럴수록 선생님 같은 분이 있어야 한다. 후배들을 위해 지적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부탁했다. 감독의 부탁 때문인지 그는 다시 엄격한 연기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연기를 못할 수는 있지만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

기특하게도 극 중 주인공이자 아들이었던 이진욱은 귀찮을 정도로 그를 따라다니며 연기 수업을 받았다. 박근형은 이진욱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욕심을 끌어냈고, 잘 따라와준 이진욱을 진심으로 이뻐했다. 칸의 여왕이라 불리는 전도연도 그와 일일 연속극을 한 후 연기가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면, 그의 연기 지도를 신뢰할 만하지 않은가.

박근형은 분명 까칠하다. 무엇보다 싫은데 좋은 척을 잘 못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마지못해 마음의 빗장을 조금 열어주는 타입이다. 하지만 자신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무장 해제돼버린다. 그럴 때는 그의 타고난 이야기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볼 수 있다.

까칠한 박근형은 회식 자리에서도 길게 질척대는 법이 없다. 시간을 두고 겪어보니 무엇보다 애정이 없으면 입을 닫아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까칠함을 기꺼이 접수하게 됐고, 접수하다 보니 좋아하게 됐고, 또 존경하게 됐다.

‘유리의 성’ 이후 그와 세 작품을 더 했다. 부담과 불편함이 사그라들면서, 그가 할 만한 배역이 있는 경우 내가 더 적극적으로 원했다. 그리고 매번 그가 후배들에게 연기론을 펼치기를 바랐다.

“신인이고 경험이 적으니 연기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배우로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대선배의 애정이 아니었을까.

피도 눈물도 없는 재벌이나,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 같은 악역을 실제인 듯 재현해내지만 현실의 그는 손주들을 데리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깎이는 평범한 손주 바보 할아버지다. 그가 소문난 애처가라는 것은 ‘꽃보다 할배’에서 이미 증명했다. 자상하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아버지 역할에 그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드물지만.

[최현경 한국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0호 (2021.10.20~2021.10.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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