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삼척 도경리역의 시간
삼척 도경리역(挑京里驛)에 가보았다. 5월 초순이었다. 1939년에 지어진, 영동선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이라는 말을 듣고 가보고 싶었다. 가는 내내 미심쩍었다. 큰길에 역이 있으려니 짐작했는데 내비게이션은 나를 산골짜기로 안내했다. 이 길이 맞나. 의심이 커질 무렵 역이 나타났다. 역은 산속에 숨어 있었다. 사위는 고요했고 새소리만 들려왔다.

역사(驛舍)는 1층 목조 건물이다. 일본식 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이 예뻤다. 자그마한 하얀 건물에 창틀은 연한 하늘색이다. 나는 도경리역의 창문에 반했다. 특히 역무실 쪽의 창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잘 보기 위해 돌출형으로, 창 면적을 최대화해서 만든 구조라 하는데, ‘쓰임’만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일본은 자원을 약탈하느라 이 역을 만들었지만, 도경리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의 시간과 냄새가 짙게 스며든 공간이 되었다.
며칠 전 가족과 함께 도경리역에 갔다. 시어머니는 가는 길에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이셨다. 역에 도착하고 눈을 뜨더니 깜짝 놀라신다. “서연(손녀딸)이가 지금 기차 타고 서울 가는 거야?” 어머니는 알츠하이머 초기를 힘겹게 지나고 계신 중인데, 손녀딸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줄 아셨던 거다.
이제는 이 역에서 아무도 떠나지 않고 누구도 이 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폐역 앞에서, 손녀딸이 기차를 타고 떠날까 걱정하는 할머니를, 도경리역은 보고 있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을까. 역에 깃든 시간이 80년이다. 공교롭게 시어머니가 살아온 시간도 80년이다.
사람은 시간을 걷고 누리지만, 시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을 살지만 지나온 시간을 아쉬워하고 오지 않은 시간을 불안해하는, 한계가 분명한 존재다. 어머니는 지금 어떤 시간을 걷고 있는 걸까. 병(病)은 한 사람의 몸에 응축된 시간을 어떻게 허물어뜨리는 걸까. 알 길이 없다. 알 수 없어서 우리는 오늘, 같이 밥을 먹고 바람 맞으며 걷는 일, 웃는 얼굴을 마주 보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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