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칼럼] 스탈린의 전략

- 입력 2021. 10. 17.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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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남침후 美 유엔 안보리 소집
蘇 불참.. '한국전' 참전 명분 줘
스탈린, 중국 고립엔 성공했지만
蘇 전방위 견제 불러.. 몰락 시작

“어쩌면 그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짜와 가짜 사이의 기묘한 춤은 그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른바 핵전쟁 위기 당시 평양에 있던 외국 여인이 현지인과 나눈 대화 후에 나온 소감이다. 진실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진짜’와 ‘가짜’가 있는가. 진실을 가리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현실의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것인가.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특히 사람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큰 권력자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문제다. 수많은 참담한 현실을 겪고 나서도 사람들은 쉽게 이런 ‘현실’에 취한다.

토인비는 일단 전쟁이 나면 수많은 전략가들이 아마추어로 전락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로미코란 이름은 냉전시대 소련 외교, 특히 대미 외교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소련의 외교문제,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 관해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중요한 사항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을 읽다 보면 어리둥절하게 되는 구절이 나온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1950년 6월 김일성의 남침 직후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한다. 소련 대표 말리크가 모스크바에 급전을 보낸다. 미국이 유엔을 활용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때까지 참석을 거부하고 있던 자신이 즉시 귀환해야 한다. 스탈린은 그로미코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묻는다. 그로미코는 당연히 말리크의 의견대로 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스탈린의 대답은 의외이다. ‘소련 대표는 안보리 회의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말리크는 재차 스탈린의 생각을 돌리려 한다. 미국은 유엔의 권위를 빌려 한국에 출병하려 할 것이다. 이것을 막아야 한다. 스탈린은 요지부동이다. 그로미코는 평소에 침착한 스탈린이 이때만큼은 ‘감정에 이끌려’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이라고 회상한다. 과연 그랬을까?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용하면서 스탈린이 묻는다. 미국이 참전할 것인가? 김일성은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스탈린이 미국의 동향에 관하여 김일성에게 자문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는 이어서 자세한 전략전술적인 지침을 준다. 남한에 평화회의를 제안하면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달아서 거부를 하면 개전 명분이 된다, 상대방의 국지적 공격을 유도해서 반격을 하는 형태로 개전을 하라 등. 그로미코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스탈린의 속셈을 깨닫지 못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1950년 2월, 중소 30년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을 위해 소련은 큰 축하연을 마련한다. 그런데 상석에 나란히 앉은 두 수뇌는 냉랭할 뿐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로미코는 나름 분위기 개선 노력을 하지만 소용이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는 깨닫는다. 문제는 그때부터 있었다.

중국인들의 한국전쟁에 관한 특별한 감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근세 이래 중국이 전장에서 열강에 맞서서 적어도 패퇴하지 않은 경험은 한국전쟁이 유일하다. 이것은 몇 가지 현실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한다. 우선, 미국에게 이 전쟁은 브래들리의 말대로 “나쁜 장소에서, 나쁜 시기에 일어난 나쁜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축구 경기가 아니다. 이제 우리도 서방의 이른바 ‘문명국’들이 초래한 큰 권력과 영웅적인 전쟁의 저주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 의용군의 ‘영웅적인 투쟁’ 이면은 일반 병사들의 엄청난 고난이다. 특히 초기 투입된 윈난(雲南)성 출신 중국군의 사상자 중에는 동상으로 수족을 절단해야 했던 병사들이 반 정도였다. 사상자는 대략 36만명에서 39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포로가 된 2만4000명 중 본국 귀환을 선택한 병사는 6000명에 불과했다. 귀환 포로를 기다리는 것은 ‘영웅’대접이 아니라 ‘비겁자’, ‘배신자’ 혹은 ‘간첩혐의’도 있었다. 대만을 선택한 포로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스탈린의 ‘천재적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나? 중국의 통일을 막고 고립시키는 것에는 성공, 그 외에는 대실패였다. 한국전쟁 후 서방 측은 일제히 재군비에 돌입한다. 패전국 일본과 서독은 부활해서 전통적인 소련 견제의 역할을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강화되고 소련은 전방위 견제에 직면한다. 어쩌면 소련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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