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 않고 펀한 이희문의 '민요'
7월 23일 오후, 스마트폰 메신저로 공연 링크 하나가 전송됐다. 이희문 소속사에서 보낸 이희문의 스핀오프 뮤직비디오 ‘미뇨’의 네이버 공연 라이브 링크와 접속 방법, 리딤코드가 담긴 메시지였다. 이희문은 그날 저녁, 공연과 뮤직비디오의 중간 형태를 띤 한 시간짜리 영상 ‘미뇨(Minyo)’ 안에서, 존재가 사라져가는 미지의 소녀 미뇨로 분한 후 사라진 미뇨를 따라 떠난 과정을 매우 파격적 비주얼과 구성으로 그려냈다. 노랑 . 빨강 . 파랑 등 원색이 지배하는 영상에서 이희문이 부르는 ‘창부타령’과 ‘오돌독’, ‘정선아리랑’ 등 여러 지역 민요는 구성지면서도 때론 처연했다. 영상이 플레이되는 동안 라이브 채팅 창에는 팬들의 관람평이 이어졌다. ‘파괴’, ‘파격’, ‘놀라움’, ‘역시’, ‘단연’ 같은 단어가 채팅 창을 채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천재’였다. 이번에 선보인 신작 공연 영상 ‘미뇨(Minyo)’는 2018년 이희문이 무형문화재 이수자로 선정된 경기민요의 근현대사에 대해 아카이빙한 <깊은 사랑> 3부작 중 마지막 작품 ‘민요 삼천리’에서 출발한 스핀오프 형식의 뮤직비디오다. 지금 이 시점에 ‘미뇨(민요)가 사라졌다’는 것을 모티브로 영상을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1년에 한 작품씩 신작 공연을 올리자는 건 제 스스로 정해놓은 룰이에요. 코로나19로 대면 공연이 어려워지면서 그 대안으로 영상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신작을 무대가 아닌 영상으로 바로 올리는 건 리스크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기존에 무대에 올린 작품 중 드라마적 스토리가 있는 ‘민요 삼천리’를 모티브로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경기 소리가 어떻게 여성 소리가 되었는지, 남자 소리꾼 이희문이 어머니 고주랑 여사로 분해 풀어낸 ‘민요 삼천리’의 스토리라인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번 작품은 ‘한때는 사랑받던 민요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민요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고주랑 여사가 아닌 ‘미뇨(Minyo)’라는 전혀 새로운 가상의 인물을 선보인다. “2018년에 선보인 공연을 하드웨어라고 볼 때, 그것이 튼튼하니 이번 영상화 작업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대를 그대로 베끼면 영화와 다를 게 없으니 그건 싫었어요. 그래서 ‘미뇨(민요)가 사라졌다’는 스토리를 더해 영상을 만든 거죠.” 비주얼 디렉터 우상희 감독과 함께 만든 이번 공연 영상은 총천연색 화면과 의상이 더해져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우상희 감독과는 김초희 감독의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페셜 뮤직비디오에서 협업한 뒤 ‘Not Alone Project’, ‘제주나돈데’, ‘아리아리’ 등의 뮤직비디오도 함께 작업했다. 대면 공연이 어려워지면서 둘이 함께하는 작업 횟수가 많아졌는데, 놀라운 것은 모든 영상이 각자의 색깔을 띤다는 것. “무대에서는 제가 기획자고 연출자고 퍼포머지만, 영상 작업에서는 퍼포머 역할에 더 충실하려고 해요. 연출은 우상희 감독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하고 사회에서 잠깐이나마 조감독을 해봤기에 ‘작품이 흥하든 망하든 결국 모든 책임은 연출자가 져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출자가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 전권을 쥐게 해야죠.”
이렇게 고주랑 명창과 이희문 대표를 함께 만나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2004년 일본에서 영상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스물일곱 살에 소리를 한다고 했을 때 고주랑 명창께서는 선뜻 권하지 못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희문 대표가 소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로서, 그리고 선배로서 걱정하지는 않았나요?
고주랑: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본인이 소리를 좋아했고, 내가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에 희문이가 좋아하는 길을 찾은 것이 그저 좋았죠. 희문이가 소리를 배우고 공연을 올리는 걸 보면서 선배 입장에서 솔직히 놀랐어요. 전통을 지키면서도 대중이 열광하는 무대를 기획하고, 연출하고, 공연하는 걸 보면서 희문이의 가능성을 봤죠. 국악이 맥을 못 추는 요즘, 희문이 같은 소리꾼이 많이 나오면 좋겠어요.
앞서 말했듯, 이희문은 어릴 때부터 민요를 배운 소리꾼이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 성적에 맞춰 진학한 대학을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방학원방송전문학교 프로모션영상과에서 영상을 전공한 그는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을 연출한 조수현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던 상황. 그러던 어느 날 고주랑 명창의 동문수학 친구인 이춘희 명창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희문이 민요를 흥얼거리자 그 노래를 듣고 이춘희 명창이 소리를 배워볼 것을 권하면서 소리꾼의 길을 걷게 됐다. 고주랑 명창은 2004년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차 안에서 희문이가 부르는 민요를 듣던 춘희가 ‘희문아, 네가 노래를 해야 되겠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흘려들었는데, 희문이는 그 말이 반가웠나 봐요. 나 몰래 춘희에게 노래를 배웠더군요. 민요는 목소리를 타고나야 하기에 10년을 가르쳐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데, 희문이는 목도 좋고 남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금방 습득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 후 춘희의 공연에 희문이가 섰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하더라고요. 재주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민요를 가르칠 걸 했죠.”
경기민요의 소리꾼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래서 고주랑 명창은 이희문을 일찌감치 민요의 길로 이끌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되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끼가 다분했다. “희문이가 어릴 때 우리 집에 많은 국악인이 드나들었어요. 대부분 여자 소리꾼이었죠. 기억해보면 희문이는 대여섯 살 즈음부터 여자 한복 속치마 같은 걸 입고 혼자 춤추고 그랬던 것 같아요. 어려서 그러고 노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되려고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초등학생 때도 이희문은 어머니가 TV 국악 프로그램에 나오는 날엔 화면을 녹화해 혼자 돌려 보며 노래와 춤을 따라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서 민혜경, 마돈나의 노래에 빠져 한때는 대중 가수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스물일곱 살에 서울예술대학 국악과에 진학해 소리를 배우면서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용인대학교 국악과에 편입해 2008년 졸업한 후 같은 해 남성 경기 명창으로 데뷔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004년, 소리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원치 않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자 소리꾼이 흔치 않기도 했지만, 그의 자유로운 스타일과 민요에 대한 도전 그리고 시도는 전통을 고수하는 선배와 선생들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민요를 시작하고 소리를 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부수적인 것이 스트레스였죠. 선생님들이 보시기에 제 모습이 너무 튀었나 봐요. 옷 입는 것까지 잔소리할 정도였어요. 남자 소리꾼이라는 이유로 주목과 눈총을 함께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조금씩 염증이 나려 할 때 안은미 선생님을 만났어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3년 만인 2007년, 아르코 예술극장 무대에서 안은미 안무가의 작품 <바리 공주>의 주인공 바리 공주 역을 맡았습니다. 매우 빠른 데뷔인데요, 국악계에서 원치 않는 눈총을 받을 때와 시기적으로 겹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은미 안무가와의 만남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이희문: 안은미 선생님이 약간 독특하시잖아요. 오디션을 보는데, 노래방으로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안 선생님은 노래방에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가 살아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하세요. 노래방에서 민혜경 노래만 계속 불렀는데, 제 모습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바로 주인공을 맡았죠. 제가 놀란 것은, 함께 작업하면서 끊임없이 저를 칭찬하시는 거예요. 그동안 저는 국악계에서 혼만 났는데, 칭찬을 들으니 신이 나더군요. 그 달콤함에 조금씩 젖어 제 소리의 바운더리를 확장할 수 있었어요. ‘아, 경기민요를 하는 국악인 집단이 아니어도 노래할 수 있는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선생님과의 만남은 제게 운명이고 인생의 돌파구였다고 생각해요.
<바리 공주>는 이희문에게 ‘이희문스러움’, ‘이희문다움’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09년 ‘이희문컴퍼니’를 설립하고 경기민요 이수자로서 경기민요를 어떻게 하면 이희문스럽게 전달할지 고심했다. 이희문은 시대의 주문과 관객의 주문이라는 의식으로 ‘오더메이드 레퍼토리(order made repertory)’라는 프로젝트 슬로건을 내걸었다. 마침내 그는 2013년,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서울 . 경기 지역에 소리꾼이 부르던 경기잡가에 담긴 이야기를 헤아린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시리즈 공연의 첫 번째 무대 <잡(雜)>을 선보였다.
“소리를 시작하고 새로운 걸 계속 시도했지만 변화가 보이지 않았어요. 결국 안은미 선생님께 SOS를 보냈죠. 그래서 <잡> 공연이 나온 겁니다. 무대라는 게 극과 극이에요. 아예 돈을 쓰지 않고 날것으로 올리든지, 아니면 남이 하는 것의 2~3배를 투자해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이든지. 안 선생님은 그렇게 무대에 돈 쓰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경기잡가는 조선 후기 서울에서 잡스럽게 만들어진 소리다. 대부분 12가사와 비슷하면서 서울에서 유행하던 판소리를 잘라 유행가처럼 부른 것이다. <잡> 공연은 ‘소춘향가’, ‘출인가’, ‘방물가’, ‘형장가’, ‘제비가’ 등 낯설고 실험적인 12잡가로 다채로운 12개의 무대를 구현하면서 관객과 민요의 신명을 공유한 작품이다. 12개의 무대를 현대적으로 구현하기까진 많은 제작비가 필요했다. 믿을 곳은 어머니뿐. 고주랑 명창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날, 공연을 하나 올린다고 돈을 부쳐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당시 저도 여의치 않았지만, 겨우 마련해 몇천만 원을 보냈죠. 그런데 몇 주가 지나 또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가 온 거예요. 이번엔 차를 팔아 돈을 마련했어요. 워낙 급하다고 하니 제값도 못 받고 팔았죠. 그런데 돈이 모자라다고 또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어쩜 그리 내 속을 몰라주나 싶어 눈물이 나오더군요. 지난달 한 방송사의 <비디오스타>라는 프로그램에 희문이와 안은미 씨가 나와 이야기하는 걸 보고 그때 알았어요. <잡> 공연에 들어간 돈이 총 1억이라는 걸.”
이희문은 그렇게 큰돈을 들인 공연의 힘을 무대에서 직접 느꼈다고 했다. “너무 신기했어요. 무대에 서니 제 노래가 달라지더라고요. 노래를 하는 마음이 달라지니 제 소리의 질감과 표현까지 변했어요. 잡가는 소리꾼이 목소리를 자랑하는, 어떻게 보면 민요보다 어려운 노래예요. 그 노래를 제가 섹시하게도 부르다, 신나게도 부르다, 슬프게도 부르는데 마치 연극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죠.”
이희문스러운 소리의 확장, 무대의 파괴는 2014년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두 번째 공연 <쾌(快)>에서도 계속됐습니다. 쾌는 어쩌면 더 파격적이었죠. 본격적으로 여장을 하셨고, 여장을 통한 젠더리스 개념의 스타일링은 민요 그룹으로 최고 인기를 얻은 씽씽밴드로 이어졌죠. 당시 많은 사람이 이희문의 스타일에 열광했어요.
이희문 <쾌> 공연은 굿과 재담 소리가 현대적 어법과 만난 공연입니다. 박수무당을 현대적 이미지로 해석했어요. 아시다시피 무당은 ‘성(性)’이 없습니다. 망사 스타킹, 하이힐, 가발 등을 착용했지만 단순한 여장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쾌> 공연은 정형화된 형식과 관습에 얽매인 진부한 전통 공연을 기성복에 비유하고 시대의 변화를 새로 입은 전통음악과 이희문의 음악 세계를 마음껏 펼친 작품이다. 이 공연에서 이희문은 박수무당으로 분했다. 몸은 남성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영혼을 모두 담아야 하는 무당에게는 하나 이상의 성 정체성이 필요했다. 펑키한 가발과 족히 10cm는 넘어 보이는 하이힐, 허벅지가 드러나는 쇼츠와 스타킹을 착용하고 무대에 섰다. 그의 요염한 몸짓과 가느다란 보이스가 더해지니 퍼포먼스는 더욱 파격적으로 흘러갔다.
사람들은 그에게 ‘한국판 데이비드 보위’, ‘국악계의 헤드윅’ 같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만큼 <쾌> 공연에서 드래그 퀸으로서 볼거리가 풍성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객석과 무대의 구분을 없앴다는 점. 기존 굿의 주체가 무당이었다면, 이희문은 이 공연에서 관객과 무대를 밀착해 구분을 없애고 관객 모두 굿판에 몰입하게 했다.
<잡>과 <쾌> 공연이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긴 의미는 또 있다. 베이시스트 장영규가 두 공연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2015년 국내 가요계를 뒤흔든 퓨전 국악 그룹 씽씽이 탄생했기 때문. 이희문이 리드 보컬을 맡고 소리꾼 추다혜와 신승태, 베이스 장영규, 기타 이태원, 드럼 이철희가 함께한 씽씽은 리더 장영규의 프로듀싱을 통해 한국의 민요와 무속음악 등 한국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현대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제가 음악을 시작하면서 영규 형과 태원이 형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음악적으로 좋아한 분들이에요. 둘 다 천재인데, 바탕이 좀 달라요. 영규 형이 감성이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태원이 형은 논리적으로 사고하죠. 태원이 형을 사석에서 알게 된 후 공연을 보러 갔는데 ‘아, 이 사람이랑 공연하면 기존 경기민요의 니나노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희문은 인디계의 조상으로 불리는 둘과 함께 본격적으로 경기민요를 가지고 놀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후 씽씽이 탄생했다.
씽씽이 등장하면서 홍대 앞 공연장에는 관객의 민요 떼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퓨전 민요에 열광했고, 씽씽은 해외 뮤직 페스티벌과 공연장에 정신없이 불려 다녔다. 씽씽에서도 이희문은 가발을 쓰고 하이힐을 신었다. “여장을 하고 싶었다기보다 합리적 선택에 가까웠어요. ‘노래를 하면서 흔들 머리카락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제 머리가 짧았기에 가발을 쓸 수밖에 없었죠. 이왕이면 멋진 얼굴로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제가 배우처럼 잘나질 않았으니 짙은 화장이 필요했고요. 제 몸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었던 게 다리라 하이힐을 신은 거예요.”
여장이라기보다는 젠더리스에 가까운 비주얼, 한국 전통 민요와 디스코, 글램록이 조화를 이룬 흥미로운 리듬과 소리는 해외 무대에서 반응이 더 뜨거웠다. 특히 2017년 미국 공영 라디오 NPR(National Public Radio)의 인기 프로그램인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서 ‘난봉가’를 부르며 세계적 이슈가 됐다.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는 라디오 방송국 사무실에서 열리는 미니 콘서트로 지금까지 아델, 잭 존슨 그리고 BTS까지 쟁쟁한 뮤지션이 출연했다. 조회 수 700만에 달하는 NPR의 씽씽 콘서트 유튜브에 달린 댓글은 당시 씽씽의 음악을 그대로 대변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미친 존재감’, ‘비교할 수 없는 독창성’, ‘경악할 정도의 천재적 재능’ 같은 감탄부터 ‘주류 미디어가 외면하는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이 노래를 BGM으로 사용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존재해줘서 감사하다’, ‘어떤 밴드도 이걸 흉내 낼 수 없다’, ‘이것이 진정한 K-팝이다’, ‘내 평생 본 최고의 콘서트다’ 같은 찬사까지. 그래서 2018년 씽씽의 해체는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멤버의 출신이 모두 달랐어요. 꾸준히 밴드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처럼 개인 작업 위주로 한 사람도 있었죠. 저는 2016년부터 3년간 개인 작업으로 <깊은 사랑> 공연 시리즈를 올렸어요. 경기민요의 역사를 경기민요, 잡가와 함께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보여준 공연이죠. 재즈 그룹 프렐류드와 함께 공연도 수차례 했고요. 어떤 멤버에겐 씽씽 활동이 전부일 수 있지만, 제겐 취미 활동 같은 거였어요. 대충 했다는 게 아니라 취미라 더 재미있고 열심히 했다는 의미예요. 하지만 맴버마다 생각이 조금씩 달랐죠.”
씽씽은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해체되었지만, 이희문은 2016년부터 3년간 선보인 <깊은 사랑> 시리즈 공연을 통해 음악을 거의 배제하고 오직 ‘소리’로만 관객과 만나는 등 자신을 끊임없이 실험대 위에 올리며 맷집을 키웠다. “미술가와의 협업, 새로운 진행 형식에 도전 그리고 공연을 준비하면서 전통음악과 현대음악 공부를 다시 하다 보니 역사 속 민요를 가지고 지금 이러는 게 맞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유로운 영혼일 텐데, 왜 안 되는 게 이렇게 많을까 늘 궁금했거든요. 공부를 하면서 해답을 찾았죠. ‘자연스럽게 생각하자!’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전달하자는 거죠. 그렇게 <깊은 사랑>에서 제가 실제로 겪고 느낀 민요 이야기를 공연에 담았습니다.”
이희문의 노래하는 민요는 사대부가 즐기던 판소리보다 훨씬 대중적 가락이라 듣기가 편한 것 같아요. 민요, 그중에서도 경기민요의 매력은 뭘까요?이희문 쉽게 설명하면 판소리는 소설이고 민요는 시예요. 각자 언어가 다르죠. 민요는 함축적 언어를, 판소리는 서사적 언어를 써요. 판소리는 구연동화, 민요는 시 낭송이라고 보면 됩니다. 모든 문화의 중심이 수도에서 일어나듯, 민요도 마찬가지예요. 경기민요가 곧 서울 민요죠. 기교도 화려하고 세련됐어요. 한마디로 예뻐요.
특히 <깊은 사랑> 시리즈의 세 번째 공연 ‘민요 삼천리’에서 이희문은 여성화된 소리의 질감과 기교를 남자 소리꾼으로서 소화한 자신의 여정을 그리는 동시에 직접 고주랑 명창 역할로 분장해 여성화된 경기민요의 뿌리와 역사를 짚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쏟아냈다. 고주랑 명창은 말한다. “희문이의 초대로 공연을 보러 갔는데, 내가 옛날에 공연할 때 입던 한복을 입고 내 역할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민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걸 보니 새롭더라고요. 희문이의 민요는 요즘 노래처럼 빠른 템포이지만, 국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진 않아요. 민요의 뿌리를 가져가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건 좋다고 봅니다. 맨날 전통 국악만 하면 싫증 나잖아요.”
최근 이희문은 방송에도 종종 얼굴을 비친다.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서는 국악계 이단아로서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신을 거듭하는 소리꾼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KBS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출연해 젊은 시절 고주랑 명창이 자주 먹던 상추쌈과 콩나물무침을 배워 만들었고, KBS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싸이’ 특집에서는 최근 함께 활동 중인 프로젝트 그룹 오방神과와 함께 ‘나팔바지’를 선곡, 이전에 보지 못한 파격적 퍼포먼스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경기 소리 프로젝트,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깊은 사랑> 시리즈 등 부지런히 무대 현장에서 관객을 만난 그는 최근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영상 매체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프로젝트 그룹 ‘오방神과’와 오방神과에서 나온 유닛 ‘이희문 OBSG4BS’, 프렐류드와의 프로젝트 그룹 ‘한국남자’ 등과 함께 작업한 ‘아리아리’, ‘노랫가락’, ‘제주나돈데’, ‘어랑브루지’, ‘출인가’, ‘방물가’, ‘허송세월말어라’ 모두 각자 성격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한 뮤직비디오다. 영상마다 제각각 개성을 지녔지만, 영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희문스러움’이다. “저를 대표하는 단어 같아요. 사실 재즈와 민요만 해도 예전부터 협업을 해왔어요. 하지만 제가 프렐류드와 프로젝트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 건, ‘내가 하면 다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이희문스러운 협업요.”
이희문이 소리를 시작하면서 지금껏 걸어온 과정은 ‘남자 소리꾼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을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나는 이렇게 생겼고, 이런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그런데 이렇게 목청 터지게 이야기해도 여전히 이희문의 노래와 소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공연과 영상 작업을 통해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경기민요를 하는 이희문입니다’라고요.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들을 때까지, 그리고 내가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는 거예요.”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
헤어 조영재
메이크업 박이화
스타일링 현국선
어시스턴트 고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