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2년 간 50개국 다니다 내린 뜻밖의 결론
은장어 식품기업 창업 도전기
장어를 먹을 때 불문율이 있다. 잘 익은 장어 꼬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오가다 못 이기는 척 형님의 접시에 놓인다. 장어 꼬리가 남성의 정력에 좋다는 속설 때문이다.
‘장어=정력’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장어 요리를 즐길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레시피로 장어김밥, 장어덮밥, 하얀어묵 등을 개발했다. 은장어 밀키트를 만드는 ‘유니앰퍼샌드’의 한재영 대표(37)다. 법인 설립한 지 만 2년을 갓 넘겼다. 2년간 공들인 유통 영업망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는 중이다. 한 대표를 만나 청년의 식품기업 창업 스토리를 들어봤다.
◇해산물과의 질긴 인연
유니앰퍼샌드는 유니버스(universe)와 앰퍼샌드 기호(&·ampersand)의 합성어다. 보편적이면서도 지속성을 가지는 회사가 되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유니앰퍼샌드는 ‘어느긴밤’이라는 은장어 식품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황진이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을 모티브로 긴 밤을 지내게 하는 스태미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한 대표는 2010년 가톨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수산유통업에 8년간 몸 담았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풍전수산이 제 첫 직장이었어요. 수산업도 유통업도 모르는 상태에서 바닥부터 배웠습니다. 산지에서 잡아 온 활어를 식당에 도매로 제공하는 일이었죠. 제철수산물팀장으로 일하면서 호텔 식자재도 납품했습니다.”
2017년 정든 회사를 나왔다. 오랜 꿈이었던 ‘여행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 50개국을 다니며 식도락 여행을 즐겼다. “2년간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더는 여행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여행하면서 쓴 메모를 찬찬히 읽어보다가 ‘식당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도시의 특색 있는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먹는 일이 정말 행복했거든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레스토랑을 만들어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곧장 제주도로 향했다. 가장 자신 있는 식재료인 해산물을 중심으로 메뉴판을 꾸릴 작정이었다. 시장 조사와 상권 분석을 마치고 터만 잡으면 되는 단계까지 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은길라 이사(39)였습니다. 은장어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줄줄 읊으면서 온라인을 중심으로 밀키트 사업을 하겠다더군요. 은장어는 잔가시가 거의 없어서 부드럽게 먹을 수 있고 불포화지방산이 78.5%로 다른 품종에 비해 높다는 점에서 훌륭한 식재료라고 생각했습니다.”
2019년 7월 유니앰퍼샌드를 공동 창업했다. 한 대표와 은 이사가 각 3000만원씩 모았고 대출금 5000만원까지 더했다. 은 이사가 은장어를 공수해 오고 영업채널을 관리하는 등 행정 업무를 맡았다. 한 대표는 메뉴 개발과 생산관리, 유통망 구축을 담당하기로 했다.
◇얼리기 싫었던 이유는 오로지 ‘맛’
은장어를 대량으로 손질해 제품화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 국내 주요 항구 도시를 오가며 장어를 취급하는 공장을 수소문했다. 기업화된 생산 시설을 갖춘 곳은 세 곳뿐이었다. “장어 시장에 주문 위탁 생산 시스템(OEM)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어요. 생물 손질이 끝나면 바로 장어구이집으로 유통되는 단순한 구조였죠.”
장어 시장에 갑자기 나타난 청년 창업가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장어 시장이라는 파이를 나눠 갖자는 것으로 오해하더군요. 온라인 마켓이라는 새로운 유통망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라고 설득했죠. 그렇게 생산 공장을 하나씩 늘려갔습니다.”
장어 하면 떠오르는 '정력'의 이미지는 장어 대중화에 걸림돌이라 판단했다. 새로운 소비 성향을 알아냈다. 신용카드 구매 내용을 기준으로 한 빅데이터에서 장어 구매자의 45%를 차지하는 사람은 30~40대 여성이라는 점을 알아낸 것이다. 실제 소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보니 남편 때문이 아닌 집에서 장어를 즐기고 싶은 여성 소비자가 늘어서였다.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는 피부염 완화, 중성지방 제거 등의 효능 때문에 여성에게 더욱 인기가 많습니다. 더는 ‘장어=정력’이라는 공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어요.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만한 메뉴를 찾기로 했습니다.”
대형마트나 간편식 프랜차이즈를 통해 은장어를 주재료로 하는 메뉴를 선보였다. 메뉴를 개발할 때 이충현 셰프, 임홍식 셰프 등 일식의 대가에게 자문했다.
“‘히츠마부시’는 일본 나고야식 장어덮밥 요리입니다. 은장어의 부드러운 식감을 최대한 살릴 방법을 고민하다가 떠올린 메뉴예요. 그 외에도 장어의 뼈로 육수를 낸 ‘우나기라멘’, 파김치를 곁들인 ‘장어 파김치 전골’ 등의 메뉴를 계속해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어느긴밤의 자사몰에서는 은장어구이, 은장어죽, 하얀어묵 등을 판매한다. 밀키트라 제품을 받아 익히기만 하면 바로 맛볼 수 있다.
“저희는 ‘냉장 상태’로만 유통하고 있습니다. ‘냉동’이면 유통과정이 수월하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렸다가 녹으면 은장어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을 온전히 느낄 수 없더군요. 생산 후 8일 이내에 먹어야하는 단점이 있지만 ‘맛’ 하나만으로 모든 단점이 상쇄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지자에게 친숙한 음식 매장 브랜드와 협업해 은장어 대중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 "로봇김밥과 함께 ‘장어김밥’을 만들어 출시했습니다. 김밥 위에 장어를 올린 거죠. ‘김밥은 고급화’하고 ‘장어는 대중화’한 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해보고 싶습니다.”
◇정체성, 보이지 않아서 더 소중하다
장어의 본고장 일본 수출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어 시장 규모는 1조원으로 추정돼요. 일본은 16조원이죠. 수요보다 공급이 항상 부족한 구조입니다. 창업 초기부터 일본의 주요 F&B 기업에서 러브콜을 받았으나 코로나와 한일 외교문제 등으로 좌절을 겪었는데요. 굴하지 않고 수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일본에 별도의 법인을 설립해 장어 전문 공장을 세울 계획입니다.”
은장어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공급 구조에도 변화를 줬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경기도 평택에 약 450평 규모의 공장을 건설 중이며 9월 완공 예정이다. 공장이 가동되면 하루 100㎏, 한 달에 4톤 규모의 은장어를 취급할 수 있게 된다.
유니앰퍼샌드는 단 1원의 투자도 받지 않았다. 창업 이후 했던 수많은 결정 모두 그에 대해 100% 책임을 져야 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에 투자자의 눈치를 보게 되는 일이 없었거든요. 앞으로도 우리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투자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