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이유] 최고의 '금수저'가 하층민을 그린 이유 | 툴루즈 로트렉

19세기 말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툴루즈 로트렉은
간결하면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특히나 강한 선과 색을 담은 그의 그림들은
팝아트, 일러스트를 포함해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죠.

때문에 그를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라 평가하기도 하는데요.

그의 작품들을 보다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춤추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서커스 단원,
춤을 추는 여성들
로트렉 그림 속의 대상들은 모두 활기찬 액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19세기 말 밤 문화의 상징이었던
물랑루즈의 그림들을 많이 남겼는데요.

하지만 로트렉의 출신을 생각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집니다.

그는 남부럽지 않은 귀족 집안의 장남이었는데요.

당시 물랑루즈는 가장 유명한 공연장이었지만,
반대로 하층민들이 모이는 파리의 가장 어두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가 그림 소재로 '물랑루즈'를 선택한 것은 좀 이상하기도 하죠.

무엇보다 그는 소년시절 다리에 장애가 생겨 성장이 멈췄고,
춤을 잘 출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툴루즈 로트렉은 왜 춤추는 사람들을 그렸을까요?

로트렉은 37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무려 5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로트렉의 그림은 섬세하거나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굵은 선으로 인물의 우아한 실루엣을 그려내어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 특징인데요.

단순화된 배경과 개성 있게 묘사된 인물,
심플하지만 포인트를 콕 짚어내는 그만의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죠.

하지만 처음부터 로트렉의 그림이 이렇게 역동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1864년, 로트렉은 프랑스의 아주 부유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죠.
그것은 바로 유전병이었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습니다.
로트렉의 부모님도 그 중 하나였죠.

로트렉의 부모님은 사촌지간이었습니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로트렉은 ‘농축이골증’이라는 희귀 유전병을 앓게 되는데요.

작은 사고에도 뼈가 쉽게 부서지며,
뼈가 부러질 경우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트렉이 14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주저앉아 왼쪽 허벅지 뼈가 부러지고 마는데요.

머지않아 오른쪽 허벅지뼈 마저 부러지며,
그 이후로 로트렉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은 로트렉은 몇 달간 침대에만 누워있었어야 했습니다.

사냥과 승마와 같은 역동적인 귀족 문화를 즐길 수 없었던 로트렉은
자연스레 귀족으로서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죠.
로트렉이 주로 그린 주제는 그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인, 어머니와 아버지 등
그의 주변 사람들이 대상이었죠. 이 시기의 로트렉의 그림들은 고요하면서 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강한 명암과 함께 거친 선을 보여주며, 그만의 색채를 담고 있죠.

하지만 승마와 사냥과 같은 귀족 문화를 매우 사랑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미술을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아버지는 로트렉의 그림을 보고, ‘뻔뻔한 낙서를 모아둔 것일 뿐’이라 말했죠.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반응에도
로트렉은 굴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부정적인 아버지와 달리, 로트렉의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했습니다.

덕분에 로트렉은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죠.
그는 아카데미 화가인 페르낭 코르몽 아래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코르몽은 사실주의에 심취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의 원근법과 기법들을 로트렉에게 가르쳤죠.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로트렉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는데요.

조르주 쇠라,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새로운 예술을 꿈꾸던 화가들이었습니다.

로트렉은 부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주 술을 사주었고,
그들을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기법을 익히고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로트렉은 점차 자신만의 색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파리, 벨기에등 유럽을 돌아다니며
고흐를 비롯한 친구들과 전시를 열기도 했습니다.

1890년 고흐가 죽던 해 열린 한 전시에선,
한 화가가 고흐의 작품을 비판하자
화가 난 로트렉은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죠.

그는 반 고흐의 명예를 위해서 죽더라도 싸우겠다 결심했지만,
상대 화가의 사과로 결투가 이뤄지진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전시를 열며
미술계에서 이름을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889년,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해인데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이자,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진행되며 에펠탑이 완공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산업기술이 발전하고 문화예술이 풍성했던 아름다운 시대로 꼽히는데요.
이때부터 1차세계대전까지의 평화롭고 번성했던 시기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로 ‘벨 에포크’라 말합니다.

하지만 빠른 사회적 변화와 자본에 의한 계급분화는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안감을 낳기도 했습니다.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고, 빈자들은 더 가난해졌죠.

같은 해 파리 북부의 몽마르트 언덕에는 카바레가 오픈합니다.
빨간 풍차를 의미하는 '물랑 루즈'였죠.

파리의 가장 눈에 띄는 언덕에 위치한 캬바레엔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는데요.

신분과 재산에 관계없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노동자와 예술가, 중간계층과 외국인 등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이곳에서 공연을 즐겼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열정과 욕망을 맘껏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활기가 넘치는 이곳으로
예술가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는데요.

로트렉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 당시 로트렉은 가족과 독립해, 자신만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는데요.
생계를 위해 물랑루즈의 포스터 제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예술가들은 상업적인 그림을 그리는 그를 비판했지만,
그는 그들을 무시했죠.

이 그림은 그의 첫번째 물랑루즈 포스터입니다.

이 그림 속에선 당시 로트렉이 심취해있던 문화와
연구하는 화풍이 모두 담겨 있는데요.

당시 로트렉은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실적인 화풍을 추구하는 서양의 그림과 다르게,
배경을 맘대로 생략하고
선명하고 굵은 색과 선은 그의 마음을 사로 잡았죠.

그 또한 이에 착안해 강한 색과 선과
과감한 생략을 담은 포스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포스터는 이후 3천여 장이 만들어졌고, 파리 곳곳의 길가에 붙여졌죠.
이전에도 광고를 목적으로 한 포스터는 많았지만,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지닌 최초의 포스터로 평가받습니다.

혹자는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포스터의 시초라고도 말하죠.

사실 물랑루즈는 당대의 퇴폐함과 음란함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고귀한 자식이었던 로트렉에겐 생소한 환경이었죠.

하지만 로트렉은 파리의 지저분한 밑바닥에 매료됐습니다.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지는 물랑 루즈.

가난한 자들부터 귀족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고,
그곳에선 로트렉의 신체적인 결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로트렉은 물랑루즈의 사람들이 자신을 편견없이 바라본 것처럼 그들을 바라봤습니다.

이 그림은 로트렉이 1892년에 그린<침대에서>입니다.

두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 둘은 물랑루즈의 매춘부들로, 연인 사이였습니다.

당대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하층민들이었죠.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 그러한 하층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성적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로트렉은 그들을 섬세하고 유려하게 그려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이 매춘부들의 삶을 철저하게 타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했던 것과 달리,
로트렉은 가까운 위치에서 가깝고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특히나 그는 물랑 루즈에서 너나할 것없이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을 그림 속에 담았습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 상황과 관계없이
음악소리에 맞춰 자유분방하게 뛰노는 사람들.

반짝이는 실내 조명 속에서 시시각각 새로운 빛을 내뿜는 사람들의 옷과 동작은
로트렉의 눈을 사로잡았죠.

로트렉은 파리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자유로움을 그림 속에 가감없이 그려나갔죠.

19세기 파리의 어두운 면을 과감하게 그린 로트렉을
당시 사람들은 외설적이라며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트렉은 꿋꿋이 주변의 사람들을 그려나갔죠.

1899년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로
로트렉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에게
“늙은 바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죠.

그는 짧은 생애동안 5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자유분방함과 역동적인 모습들이 새겨져 있죠.

유복한 부르주아의 삶이 아닌,
몽마르트의 자유로운 문화를 꿈꾸었던 예술가 툴루즈 로트렉.

그의 개성넘치는 작품들은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이 되며,
현대 포스터와 그래픽 아트의 아버지라 불리는데요.

몽마르트의 작은 거인 툴루즈 로트렉.
그의 활기 넘치는 작품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느껴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