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 땐 그랬지 추억의 NBA 해설가들이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 (1)

NBA 중계가 보편화 된 지금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TV에서 해주는 NBA 중계가 아주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생중계는 고사하고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밖에 없었던 시절 얘기다. 그 시절 NBA 마니아들은 어쩌다 좋아하는 팀 경기를 TV에서 중계해주는 날에는, 1시간 전부터 TV를 틀어놓고 경기 시작만 기다렸다. 스마트폰만 켜면 언제든 NBA 중계를 볼 수 있는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아날로그 시절의 경험이다. 그래서 준비해봤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창기 NBA 해설을 맡았던 1세대 해설위원들을 만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박영만 아나운서가 기억하는 故 한창도 해설위원
“국내 NBA 전문가의 시대를 연 선구자”
故 한창도 전 SBS 해설위원은 국내 NBA 1호 해설자 타이틀을 달고 있다. 지금의 조현일, 박세운(이상 스포티비 해설위원) 등 국내 최고 NBA 해설자로 평가받는 이들도 어린 시절 그의 중계를 들으면서 해설자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과거 성균관대, 이화여대 감독직을 역임했던 한창도 위원은 지도자로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농구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80년대 후반 MBC의 한 NBA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면서 해설위원으로 데뷔했다. 그 이후로 국내 NBA 인기가 최고조였던 90년대 초중반 SBS로 적을 옮겨 박영만 전 아나운서와 함께 NBA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그는 본토 언어에 가까운 선수 이름과 경기 중 재치 있는 입담으로 팬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마이클 조던을 ‘마이클 졸든’으로 발음한 건 지금까지 도 올드 NBA 팬들 사이에서 많은 회자가 되고 있다.
그와 함께 NBA 중계 호흡을 맞춘 박영만 전 SBS 아나운서는 “한창도 위원께서는 미국 농구에 대한 조예가 굉장히 깊으셨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보급이 안 됐던 시절이라 중계 자료를 구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때였는데, 한 위원님께서 미국에 있는 지인을 통해 농구 서적이라는 서적은 몽땅 구해오셨어요. 그 덕분에 저희 아나운서들도 수월하게 자료 수집을 할 수 있었고, 당시 생소했던 미국 농구에 대해서 많이 공부할 수 있었죠. 그때 한 위원님께서 나한테 선물해줬던 많은 책들 중에서 ‘바보들을 위한 농구’라는 책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농구에 농자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에요. 당시 농구를 잘 몰랐던 저도 그 책을 보면서 농구의 기본 원리와 규칙 등을 터득할 수 있었어요. 그 당시만 놓고 보면 한 위원님이 NBA에 관해서는 국내 최고 전문가였어요”라고 고인을 기억했다. 고인과 함께 했던 중계 중 가장 남는 순간으로는 1997년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당시는 ABC대회)를 꼽았다. 당시 한국은 중국을 꺾고 28년 만에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NBA 뿐만 아니라 한 위원님과 프로농구, 국제대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중계 파트너로 호흡을 맞췄어요. 비록 NBA 중계는 아니었지만, 1997년 사우디에서 열린 ABC대회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죠. 당시 사우디 현지에 가서 한 위원님과 전 경기를 중계했는데 일본과의 결승전 시청률이 무려 10%가 나왔어요. 그것도 밤 10시가 넘어서 말이죠. 결승전 중계를 마치고 한 위원님과 호텔방 안에서 마신 캔 맥주를 잊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창도 위원은 65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오랜 기간 앓아왔던 당뇨가 악화된 것이었다. 어느 덧 그가 세상을 떠난지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중계 짝꿍 박영만 아나운서는 한창도 위원이 너무나 빨리 팬들의 곁을 떠났다며 아쉬워했다.
“한 위원님은 해설위원으로서 저평가 받으신 분이셔요. 어떻게 보면 한 위원님께서 지금의 NBA 전문 해설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게끔 선구자로서 길을 터주셨다고 볼 수 있죠. 한 위원님께서 국내 NBA 1호 해설자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현직에 있는 많은 해설위원들이 한 위원님의 중계를 보면서 꿈을 키워왔잖아요. 저 역시 한 위원님과 함께 하면서 농구를 정말 많이 배웠고, 아직 더 배울게 많은 데 참 아쉽네요. 지난해 스승의 날 특집으로 임주완 캐스터와 유수호 캐스터가 야구 중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위원님과 다시 중계석에 앉아 농구 중계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어요. 조금이라도 더 살아계셨으면 참 좋았을텐데 말이죠.”
“어린 시절 저는 한창도 위원님의 중계를 보면서 자랐어요. 1시간짜리 편집본이었지만, SBS가 NBA 프로그램을 해주었던 매주 수요일 밤은 토요일과 함께 일주일에서 가장 기다려지던 날이었죠. 아마도 나와 같은 또래라면 대부분 비슷할 것 같아요. 기자가 되어 한 위원님을 알게 됐을 때도 정말 기뻤죠. 묘하게도 제가 해설위원으로 처음 활동하던 시기에 마침 한 위원님께서도 KBL 현장에 나오기 시작하셨어요. 그 때가 2005년 경으로 기억하는데 우상을 만난 기분이었죠. 농구 전반에 대해 묻기도 했고, 특히 여자대학부에 관련해 의견도 구하는 등 자주는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인사를 나눴던 것 같아요. 한 위원님께서는 인자하고 친절하셨지만 위축되는 우리 농구에 대해서는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어요. 얼마 전 84년 LA올림픽 여자농구 경기를 다시 봤는데 그 분의 목소리가 들려 울컥하기도 했네요.” - 손대범 KBS N 해설위원
故한창도 해설위원 프로필
1941년 3월 30일 생, 고려대 임학과 학사
성균관대, 이화여대 농구부 감독
MBC 농구 해설위원
한국스포츠티비 농구 해설위원
SBS스포츠 농구 해설위원

“법학보다 NBA 해설이 더 재밌어”
NBA 인기가 최절정기에 달했던 1990년대 중후반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법학도가 NBA 해설자로 변신해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한국 스포츠 TV에서 방영하는 NBA농구 해설을 맡아 선수와 팀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곁들여진 해설로 팬들을 매료시킨 이호인 해설위원이 화제의 주인공.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까지 수료한 이호인 위원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NBA 소식지인 원 온 원(One on One)이란 월간지를 번역한 것이 인연이 돼 스포츠 TV 뉴스의 NBA농구 하이라이트를 거쳐 본격 해설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사연은 조금 독특하다. 이호인 위원은 “당시 나는 농구광이었어요. 농구 잡지라는 잡지는 다 챙겨봤는데, 당시 원-온-원(One-On-One)이라는 NBA 잡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영어 번역이 엉터리 투성인거죠. 그래서 원 온 원 편집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 번역 오류가 너무 많다고 컴플레인을 걸었는데, 편집장이 ‘그러면 네가 한번 번역해보라’라고 하시는거에요. 그게 발단이 됐던거죠(웃음)”라고 말했다.
이호인 위원은 모 일간지 특파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 시절을 싱가포르와 태국에서 보냈다. 이 때 익힌 영어가 그에게는 큰 자산이 됐다. 그는 “저는 자신 있었어요. 초등학교를 싱가포르와 태국에서 보내면서 영어를 익힌 덕분에 번역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AFKN을 통해 NBA 중계를 많이 본 것도 큰 도움이
됐고요”라고 돌아봤다. 그렇게 원 온 원에서 1년간 번역 일을 했던 이호인 위원은 1995년 즈음 한국스포츠티비로부터 NBA 해설 제안을 받았다. 그동안 접해보지 않았던 방송 일이었기에 부담이 따르기도 했지만, 그는 20대 젊은 패기로 부딪히고자 했다. 제안을 승낙한 그는 방송 일에 나서면서 스스로에게 한 가지 다짐을 했다. 기존의 해설방식과는 차별성을 두겠다는 것이었다.

“해설자로서 2년간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신 이정천, 이형돈 PD님께 큰 감사함을 느껴요.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 두 분께서 해설 대본도 다 짜주셨고 이래저래 도움을 많이 주셨죠. 지금도 두 분과는 한번씩 따로 만나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옛 추억을 되새김하곤 해요. 또 지금 채널A 스포츠부 부장으로 있는 정지원 캐스터와도 재밌게 중계했던 기억이 나네요. 정지원 캐스터가 저랑 나이대도 비슷해서 서로 맞는 부분이 많았어요. 제가 정지원 캐스터 결혼식 사회를 봐주기도 했고요.”
이호인 위원은 더 큰 도전을 위해 1시즌 간의 짧은 해설 일을 마치고 미국으로 향했다. 지금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해설자로서 일했던 시간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작년에 마이클 조던의 일대기를 다룬 라스트 댄스를 보면서 속으로 ‘아 나도 저 시절을 함께 했었지, 내가 진짜 농구를 좋아하긴 했나보다’라며 추억을 되새김했어요. 라스트 댄스에 나온 경기들을 제가 모두 중계하기도 해 더 많이 기억나기도 했고요. 96년도에 제가 결혼을 했는데 당시 결혼식을 올린 뒤 신라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어요. 그때 당시 호텔 지배인 분께서 저를 보더니 ‘혹시 이호인 해설위원님 아니시냐’며 나를 알아보시는거에요. 신기했어요. 지금은 아마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이 거의 없을 거에요(웃음). 그래도 요즘 NBA 팬들께서 달라진 여건 속에서 농구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요. 마치 예전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말이죠. 다만 NBA와 달리 한국 농구가 예전과 같은 팬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워요. 저희 때는 김현준과 이충희 중 누가 더 뛰어난 슈터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낭만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워요.”
1968년 생, 서울대 법학과 학사
원-온-원(One-On-One) NBA 출판사 번역가
한국스포츠티비 NBA 해설위원

장원구 해설위원
“밥보다 스포츠를 더 좋아했던 소년, 난 진짜 성공한 덕후”
‘덕업일치.’ ‘덕질’과 ‘직업’이 일치했다는 신조어로, 마니아급 관심사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일컫는다. 보통 스포츠 분야에서 마니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발휘하면서 나름의 덕질을 한다. 그중에서도 장원구 해설위원은 성공한 덕후다. ‘덕질’의 과정에서 커리어를 발견하고 인생의 업으로 삼아 덕업일치를 이뤄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까.
장 위원은 어린 시절부터 오직 ‘스포츠가 너무 좋아서’ 축구 언론 매체에 직접 이력서를 내고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 야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을 엄청 좋아했어요. 차범근, 최동원, 김동광을 보면서 스포츠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됐죠. 어느 정도였냐면 중학교 1학년 때 제가 반장을 했었는데, 축구, 야구 보러 다닌다고 1년에 3~40일 정도는 수업을 빼먹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한달 간 반장 직무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어요. 아마 이 정도로 스포츠에 미친 사람은 없을 거에요.”
농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지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장 위원은 “원래 농구도 조금씩은 봤어요. 김동광 선수를 좋아했었죠. 본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후반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또 NBA가 한창 인기를 끌었던 때잖아요. 아르헨티나 유학을 다녀온 뒤 국내에서 스포츠 기자 일을 잠시 하다가 미국 스포츠를 한번 경험해보고 싶어 짐 가방 하나만 싸들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죠. 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한국 특파원이 없었어요. 운 좋게 특파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5년간 NBA 경기장에서 특파원 생활을 했어요. LA 레이커스와 LA 클리퍼스 홈 경기는 빼먹지 않고 취재를 갔던 것 같아요. 마이클 조던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경기가 끝난 뒤 기자 자격으로 라커룸에 들어가면 선수들이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조던한테서 정말 빛이 나더라고요. 그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에서 제왕의 포스가 느껴졌어요. 수많은 선수들을 취재했지만 조던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존재했어요.”
5년 간의 NBA 취재 경력을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NBA 스카우팅 리포트를 작성하고, 또 NBA 해설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점점 넓혀나갔다. 특히 전술적인 전문성을 살려 그만의 차별성을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장원구 위원은 “사실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기자가 되고 싶어 쓸데없는 행동들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저만의 스포츠 공부 노트를 만들어 저만 딱 알아 볼 수 있게끔 메모를 하기도 했고요. 제가 패턴이나 전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았는데, 미국 특파원으로 지낼 때 전술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전술에 대해 잘 아는 현지 기자한테 가서 '나 이것 좀 알려주시오'라며 그냥 들이댔죠. 그때 아마 현지 기자들 밥이랑 선물 사준다고 돈 좀 썼을 거에요. 또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예를 들어 레이커스가 어떤 패턴에 의해 득점을 하면 그 패턴을 머릿 속에 바로 그리곤 했어요. 마찬가지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와 NBA 해설을 할 때도 전술적인 강점을 잘 살려 시청자들에게 내용을 전달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중계 도중 가끔씩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기억한다. “1997-1998시즌 시카고 불스와 유타 재즈 파이널 시리즈였는데, 그 당시 시카고가 워낙 잘하니까 유타가 너무 불쌍해보여서 유타도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멘트를 했어요. 편파 의도로 한 멘트는 아닌데 팬 입장에서는 제가 편향적인 해설을 했다고 생각했나 봐요. 중계가 끝난 뒤 휴대 전화기가 불이 나 있는 거에요. ‘장원구 저 xx 당장 짤라라’부터 ‘장원구 너 유타한테 돈 먹었냐’는 등 팬들에게 대차게 욕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초창기 NBA 중계방송 환경은 열악했다. 지금이야 중계방송팀마다 전문 기록원이 있어 경기 전은 물론 경기 중에도 실시간으로 자세한 기록을 살펴보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중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때 그 시절만이 느낄 수 있는 향수가 있다고 말한다.
“중계 준비는 독학으로 했어요. 그 땐 그러던 시절이니까 당연한가보다 싶었죠. NBA 중계할 때만큼은 정말 즐기면서 했던 것 같아요. 응원하고 소리만 못 지를 뿐이지, 미국에서 5년간 NBA 취재를 할 때 그 느낌 그대로 즐기면서 일을 했어요. 중계 환경이 열악했지만 그로 인해 저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하게 됐고, 지금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죠.”
장원구 위원의 덕업일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02년을 끝으로 NBA 해설위원이라는 공식 직함은 그만뒀지만, 스포츠기자 일을 계속하면서 팬들에게 다양한 스포츠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다시 NBA 해설을 할 의향은 없냐는 질문에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할 생각은 있어요. 그런데 요즘 NBA 중계하는 조현일, 박세운 등 해설자들의 수준이 예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아져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농구 유튜브는 현재 기획 중에 있어요. 조금 독특한 컨셉으로 해보려고요. 새로운 유튜브도 많이 기대해주세요”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
장원구 해설위원 프로필
1965년 출생
월드사커 기자
루키 LA특파원
스포츠TV NBA 해설위원
iTV NBA 해설위원
스포츠조선 농구-축구 전문기자
이데일리 스포츠-연예 부장
일간스포츠 모바일 팀장
스페셜원 편집장
2편에서 계속...
#사진_손대범 KBS N 해설위원, 본인 제공
점프볼 / 서호민 기자 syb2233in@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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