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답답했을 거다. 비밀을 품은 인물을 연기하기란. 이수경은 그동안 차마 못 했던 <기적> 뒷이야기를, 갓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사랑 마냥 해맑고 생생하게 쏟아냈다. 글에는 생략했지만 그의 모든 말마디 끝에는 즐거운 느낌표와 ‘(웃음)’이 달려 있었다. 그 모습에 <차이나타운> 쏭의 어둠과 <침묵> 미라의 반항, <로스쿨> 솔B의 차가움은 더더욱 없었다. 곧 <기적> 보경을 떠올렸다. 사투리만 쓰지 않았다뿐이지 그 사랑스러움은 같거나 더했다. 시골 마을 봉화의 열일곱 소년, 준경(박정민)의 간이역 만들기 감동 프로젝트는 라희(임윤아)와 보경이라는 두 축이 없었다면 잘 굴러가지 않았을 테다. 라희가 추진력을 담당했고 보경은 준경 영혼의 버팀목이었다. 반전에 판타지까지 한 몸에 책임진 이수경이,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며 영화에 설득력을 실어줬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거다.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이수경을 만났다. 이날 현장에는 예상치 못한 배우가 함께했다. <기묘한 가족>에서 이수경과 남매로 활약한 김남길이다. 몇 달 전 이수경은 김남길이 대표로 있는 길스토리이엔티에 새 둥지를 틀었다. ‘대표’ 김남길은 <전지적 참견 시점> 일일 매니저가 되어 소속 배우의 신작 홍보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날 기자의 마중과 배웅 역시 대표의 몫이었고, 짧은 게릴라 답변으로 인터뷰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작은 질문에도 사연 보따리를 풀어 널던 이수경과의 대화를 독자에게 전한다.
- 감독
- 이장훈
- 출연
- 박정민, 이성민, 윤아, 이수경, 정문성
- 평점
- 8.8

보경은 반전 서사를 가진 인물이에요. 맡은 역에 대해 주변에 자세히 말할 수가 없어서 그동안 답답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지금도 너무 답답해요. 너무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요. 주변 분들을 시사회에 초대해서 영화가 어땠는지 재밌었는지 물어보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객관적인 질문도 던지면서 반응을 봐야 하니까 쭉 비밀로 간직했어요.
이제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네요. 개봉이 더 반갑겠어요.
너무요! 소화제 먹기를 30분 앞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이다 마시기 직전? 지금 딱 그 느낌이에요.
시나리오 첫인상이 궁금해요. 당연히 후반부의 반전을 다 알고 읽었죠?
네. 그래서 재미가 덜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알고 읽었는데도 ‘헉’ 했던 지점이 있었어요. 아시죠! 거기서 저도 모르게 또 ‘헉’ 했어요. 제 캐릭터뿐만 아니라 저와 소통하는 다른 캐릭터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준경, 아빠 태윤(이성민), 마을 사람들 모두 개성이 살아있고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있어서 좋았어요.
보경은 곧, 준경이 간이역에 집착하게 된 이유와도 같아요. 역할의 무게에서 오는 부담은 없었나요.
처음엔 뭘 따로 준비해야 하나 싶었는데, 진짜처럼 하자고만 생각하게 됐어요. 매 순간 매 장면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뿐이었어요.
오디션을 보고 <기적>에 함께하게 됐다고 들었어요.
지난 작품을 함께 했던 언니가 <기적> 연출부에 계셨어요. 언니가 시나리오를 보내주셔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는 거죠. <기적> 오디션을 보고 있다는 소식은 꽤 오래전부터 들어서 알고는 있었어요. 아는 분들이 오디션을 보기도 하셨고요. ‘이게 왜 아직도 캐스팅이 안 됐지?’ 싶었죠. “이미 늦은 거 아니에요, 언니?” 했는데 오디션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봤어요. <기적> 오디션은 다른 오디션이랑은 좀 달랐어요. 양원역에서 보경이와 준경이가 울며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 장면을 꽤 많이 시켜보셨어요. 못해도 10번은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눈물을 잘 쏟아내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눈물을 짜냈어요. 하도 울어서 나중엔 눈이 아프더라고요. 속으로 ‘이쯤 하면 되겠지’, ‘이쯤 하면 되겠지’ 했는데, 감독님은 계속 계속 시키셨어요. ‘내가 너무 못하나?’ 생각했죠. 다행히 캐스팅이 됐어요.
어떤 점을 좋게 봤던 걸까요. 이장훈 감독에게 캐스팅 이유에 대해 들은 것이 있나요.
현장에 가서도 그 장면이 가장 어려울 텐데, 그때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파악하려고 계속 시켰다고 하셨어요. 캐스팅 이유는 저도 인터뷰로 본 건데 제가 웃는 게 보경이 같았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기적>에서 보경은 희생을 감수하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기꺼이’라는 말이 들어갈 것 같아요. 아빠와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캐릭터. 그때 그 시절을 제가 잘은 모르지만, 저희 고모들만 해도 막내인 아빠를 대학에 보내려고 일찍부터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저희 영화 초반에도 보경이가 “저는 대학 안 가요”라고 하는 게 나와요. 보경이도 어려서부터 엄마 대신 준경, 태윤을 보필해왔을 거예요.

<기적>의 배경은 경상북도 봉화예요. 경상북도에 강원도가 섞인 듯한 사투리라 독특하다고 들었어요. 경기 출신인데, 어떻게 준비했나요.
박찬별이라는 영주 출신 언니가 있어요. 배우 준비하는 언닌데, 저희 영화에 나오는 모든 분의 사투리를 담당해주셨어요. 숨은 공신이에요. 경북은 진짜 특이한 것 같아요. 매체에서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투리라 어려웠어요. 정민 오빠가 저를 처음 만나기도 전에 사투리 챔피언분한테 녹음본을 받아서 주기도 하셨어요. 사투리 챔피언이요? 네. 1년에 한 번씩 사투리 경연대회 같은 걸 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사투리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고 다 캐치할 수가 없어서 사투리 선생님을 기준으로 연기했어요.
실제로 봉화 출신인 이성민 배우가 돕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도와주셨어요. 근데 그런 게 있었어요. 네이티브가 쓰는 말로만 하면 관객분들이 못 알아들으시겠더라고요. 선배님이 ‘아, 이건 이렇게 얘기 안 하지~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얘기하지!’ 하시는데 현장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영화적으로 말을 골랐습니다.
혹시 시범 보인 말 중 기억 나는 게 있나요.
너무 외국어 같아서. (웃음)
<기묘한 가족>, <용순>에서는 충청도 사투리를 해봤어요.
<용순> 때는 처음에 사투리 녹음본을 받긴 했는데, 감독님과 스태프분들이 충청도 출신이셔서 자연스럽게 터득했어요. <기묘한 가족>은 충청도에서도 좀 더 진한 사투리였어요. 여기 계시는 대표님(김남길)이랑 같이 찍은 영환데, 따로 배웠다기보다는 배우들끼리 쉬는 시간에도 계속 사투리로 얘기하니 입에 꽤 익었던 것 같아요.
<기적>을 위해 또 준비한 게, 데뷔 이후 처음 단발을 했어요. 시청자는 <로스쿨> 솔B로 단발 이수경을 먼저 만났지만 <기적> 촬영이 먼저였다죠. 자르는 게 아깝진 않았나요.
저 너~무 자르고 싶었어요. 한번 그 마음이 커졌을 때가 있는데, 주변에서 긴 머리가 나을 것 같다고 다 말리더라고요. 근데 보경이가 딱 온 거죠. 감사히 여기며 캐스팅되자마자 거의 바로 잘랐어요.

보경은 준경 눈에만 보이잖아요. 보경이 라희나 태윤과 같은 공간에 있는 장면을 찍을 때 임윤아, 이성민 배우는 당신을 의식해서는 안 됐을 텐데. 이런 디테일을 챙기는 게 모두에게 색달랐을 것 같아요.
영화 후반에서 라희가 준경이 생일 파티를 해주는 장면은 사실 초반 촬영분이었어요. 제 첫 대사도 하필 그 장면이었죠. 몸에 익고 찍었으면 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처음이라 저도 ‘누굴 쳐다봐야 하나, 준경이를 봐야 하나, 라희를 봐야 하나…’ 애를 먹었어요. 감독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주셔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 일부러 최대한 윤아 언니 박자에 맞춰서 하려고 노력했어요. (웃음)
NG도 꽤 났겠어요.
NG가 많이 났던 장면은 따로 있어요. 보경이가 준경이를 수건으로 때리면서 “니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아나. 맘 바뀌기 전에 퍼뜩 간다 해라” 하는 장면인데. 그게 아무 이유 없이 대사가 잘 안 돼서, (웃음) 오빠가 빨랫비누 같은 거로 세수를 계속해야 했어요. 얼굴이 엄청 뻑뻑했을 텐데. 오빠가 고생을 많이 해줬어요.
제작기 영상 보니까 키가 커서 준경 방 천장에 머리를 잘 부딪치던데.
거기 맨날 부딪쳤어요.
이외에 또 이런 의외의 고충이 있었나요.
‘6년 후’ 문구가 나오고 나서 보경이가 “정준경, 니 내복 안 입었지!” 하면서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테이크를 되게 많이 갔어요. 준경이 방에서 한 명, 제 방에서 한 명, 감독님까지 셋이 “지금”, “지금”, “지금!”, (웃음) 계속 “지금”, “지금”, “지금!” 하면서 타이밍을 딱딱딱 맞춰야 했는데 그게 잘 안되서 꽤 오래 걸렸어요.

박정민 배우로부터 아낌없는 배려와 위로를 받았다고 했어요. 호흡이 어땠나요.
정민 오빠랑 제일 많이 찍어서 정말 친해졌어요. 제가 오디션 때부터 어려워했다는 그 양원역 장면이 오빠한테도 어려운 장면이었어요. 대사가 길기도 길고. 감독님이 처음에는 카메라가 두 대니까 한쪽에 한 대씩 놓고 한꺼번에 찍자고 하셨는데, 여건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두 대를 한쪽에 몰아 놓고 똑같은 장면을 두 번 나눠 찍어야 했어요. 보통 같으면 선배님이 먼저 찍는 게 맞는데, 오빠가 저 몰래 저부터 찍으라고 말을 해두셨더라고요. 오빠는 감정을 아끼고 있어야 했는데 저 할 때도 터뜨려줘서 본인 테이크 갈 때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동네 개 짖는 소리, 차 소리 때문에 NG도 많이 났거든요. 근데도 오빠는 너무 잘했죠. 저도 오빠를 도와주고 싶어서, 제 테이크 끝나고도 눈물을 쥐어짜려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오빠를 잘 못 도와줬습니다.
촬영하면서 서로 통화도 많이 했다고요.
한번은 보경이랑 준경이가 기차에서 이별하는 장면을 찍기 전에 전화가 왔어요. 오빠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땐 제가 오빠의 걱정을 덜어줘야 했어요.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오빤 잘할 거예요. 대사가 가진 힘이 좋으니까 우린 거기에 맡기기만 하면 돼요,” 하고 끊었는데. 정작, (웃음) 현장에서는 제가 더 떨었어요. 그 장면에 원래 안는 건 없었어요. 오빠 애드리브였는데. 그렇게 해주니까 어린 준경이, 강훈이랑 안았던 게 생각나면서 더 울컥하더라고요.
아. 저 정정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죠. 정민 오빠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제가 영화에서 오빠한테 하이킥을 날린 걸 애드리브라고 했더라고요. (“실제로 수경이가 제게 하이킥을 날리기도 하는데, 그건 대본에 없던 장면이었는데 받아줬어요.”(박정민)) 근데 그거 애드리브 아니었어요. 저는 딱 감독님이 지시하신 대로 했던 거예요. (웃음) 오빠 때린 게 너무 미안했어요. 애드리브 아니었습니다.
박정민 배우가 <로스쿨> 촬영장엔 무려 회오리감자도 돌렸던데요.
아, 회오리감자차. (웃음x10) 맞아요. 그게 실은 장난이었어요. 오빠한테 장난삼아 “나 회오리감자 먹고 싶어”라고 했는데 “알았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진짜로 보내주신 거예요. 깜짝 놀랐죠. 저는 오빠 촬영 현장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작년에 ‘엘르’에서 프로젝트로 코드쿤스트 프로듀서 뮤비를 찍었는데, 오빠가 그 뮤비를 연출했어요. 저는 놀러 갔다가 출연까지 했죠.


<기적>은 1988년 이야기예요. 흥미로운 레트로 소품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형광등 줄에 똑딱이가 달려있어요. 똑딱, 이렇게 해야 불이 ‘쨩’ 하고 켜지는데…
김남길 이렇게 동그랗게 생겨서 줄 연결돼 있는 거. 초록색 버튼 있어가지고 누르고 빼고 하는…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내 남자의 남자’ 장면에 그걸 처음 써봤어요. 치마가 바닥에 끌려서 계속 넘어지고 정신없는 와중에 불을 켜려고 하는데, 원래 같으면 불 켜는 게 이쯤 있어야 할 게 없는 거예요. “뭐야?!” 하고 보니까 웬 똑딱거리는 게 있더라고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명랑 코미디와 감동 드라마를 재치있게 오가는 영화이기도 하죠. 보경도 종종 개그캐로 활약했는데. 현장에서 가장 많이 웃고 울었던 장면을 꼽는다면요?
준경이랑 라희가 라희 집에 가서 “뽀뽀해 봤냐”, “함 해보까!” 하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웃겨서 계속 생각나요. (웃음) 영화관에서도 제일 많이 웃었던 장면이에요.
그 장면에 보경이 등장하진 않는데, 현장에 함께했나요?
아니요. 촬영장에 있던 건 아닌데 그 장면이 스태프 사이에서는 유명했어요. 준경, 라희의 애정신을 찍는 날이면 스태프 언니들이 오늘 그거 찍는 날이라면서 카톡으로 알려줬거든요. (웃음) 그럼 저는 괜히 “오빠, 오늘 찍는다면서요?” 하면서 정민 오빠를 놀렸어요.
슬펐던 장면은?
기차 이별 장면이요. “누나, 내 갔다 오께.” 보경이가 기다리던 말이잖아요. 오빠가 그 말을 할 때 마음에서 뭔가 터지는 것 같았어요. 연기할 때도, 영화로 볼 때도.

지난 작품을 잠시 돌아볼게요. 당신에게 <차이나타운>은 배우를 해야겠다는 확실한 믿음을 준 작품이라고요. 시작점이자 터닝 포인트가 됐던 작품이 <차이나타운>이었다면, 이수경이란 배우를 무르익게 한 작품은 뭘까요.
무르익었다기보단, 앞으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건 <기적>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장르, 재밌는 시나리오, 하고 싶은 캐릭터. 이렇게 삼박자가 맞춰지기 쉽지 않잖아요. <기적>은 그런 작품이었어요. 제작진, 배우진도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흡이 좋았어요.
<기적> 다음으로는요?
<로스쿨>이요. 그렇게 대사 연습을 많이 한 적이 없어요. 대사도 많고 말도 빨라서.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걸 어려워해 본 적이 없는데 <로스쿨>은 좀 어려웠어요. 캐릭터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웠다기보단… 새로 대본이 들어오면 보통 한번 소리 내서 읽어보는데, <로스쿨> 끝나고는 뭘 해도 솔B 톤이 되는 거예요. (웃음) 딱딱하게 말하게 되고. 그 톤을 벗어나기가 힘들었어요.
안 그래도 <로스쿨> 메이킹 영상을 봤어요. 동료 배우들과 진짜 대학 동기처럼 발랄하게 지내다가도 바로 솔B로 빙의하더라고요. 슛 들어가기 전후 온도차가 커서 본인과 캐릭터를 잘 분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어려움이 있었군요.
<기적> 후반과 <로스쿨> 초반 촬영이 겹쳤어요. <기적>은 지방 촬영이 많았기 때문에 현장을 오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로스쿨> 가면 사투리 나올까 봐 걱정하고, <기적> 가면 다다다다 말할까 봐 걱정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죠.
혹시 나도 모르게 그러고는 흠칫 놀란 순간이 있었나요.
다행히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 아, 그랬던가. (웃음) 모르겠어요.
연기할 때 ‘이것만은 지킨다,’ 하는 게 있나요.
진짜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려고 노력해요. 대사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것처럼 들려야 하니까. 항상 여기서부터 시작해요. 저를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도 고민해보고요.
레퍼런스를 두기도 하나요.
모든 연기는 다 누군가를 따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꼭 어떤 작품을 레퍼런스로 두는 게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마주했던 사람, 그 사람에게서도 일정 부분을 가져오는 거죠. 그날 인상 깊었던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특징을 집에 가서 혼자 다시 되새겨보는 편이에요. 직접 말을 해본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걸 따라 하는 저를 상상해요. 하루를 살고 있다가도, 예를 들어 지금 인터뷰를 하다가도 내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질 때가 있어요. 이런 걸 생각해뒀다가 연기로 표현하려고 해요.
“영화관에서 스크린으로 내 얼굴을 크게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모니터링을 잘 하는 편인가 봐요. 간혹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 못해요… 그냥, ‘개봉한다!!!’ 라는 게 너무 기쁜 거지. 연기하는 제 모습을 보는 건 아직 부끄럽습니다.
아쉬운 점이 눈에 들어와서 그런 걸까요.
‘충분히 생각하고 연기했던가’, ‘전후 상황은 고려했던가’ 곱씹게 돼요. 그땐 당연히 잘하려 했을 테지만 다시 보면 표현이 잘 안 된 것 같고 그래요. <기적>에서도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어요. 후회는 언제나 남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나 좀 잘했네’ 싶은 부분도 분명 있었을 테죠.
음… 아, <기적>에서는 그 장면이 좀 맘에 들었어요. 준경이가 아빠 친구 기관사분께 용돈 받는 장면인데. 대본에는 ‘용돈을 받는다’가 다였어요. 제가 (턱을 까딱 들며) 이렇게 눈짓해서 준경이랑 같이 돈을 꺼내 보고 “오~” 하는 게 있어요. 그건 제 애드리브였어요. 애드리브를 잘 못 하는 편인데 오빠랑 편하게 하게 되더라고요.
<로스쿨>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나요.
마지막쯤 솔B가 “그 언닌 잘했어”라는 대사를 하는데 시청자분들이 그걸 되게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제 인스타그램 글에도 ‘그 언닌 잘했어’라는 댓글이 계속 달리는 걸 보면서, ‘아~ 이걸 좋아하시는구나~’ 하고 저도 그 대사를 좋아하게 됐어요.

솔A 류혜영 배우와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도 몇 번 같이 하고, 쭉 친하게 지내던데요.
<특별시민>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때도 붙는 장면은 딱히 없었는데 언니가 잘 챙겨줘서 가끔 연락하고 만나던 사이였어요. 언니가 <로스쿨>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전화해서 “언니! 해요?!” 하니까 언니도 “왜, 너 해?!” 하고 둘이 (박수) “잘됐다” 이랬죠. 말은 안 했지만 우리 둘 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요. 언니랑 연기해서 너무 좋았고, <로스쿨> 끝나면서도 “우리 몇 년 뒤에 또 만날까?” 약속했어요.
노을(최성원) 여자친구로 출연했던 <응답하라 1988>에, 박정민 배우도 보라(류혜영)의 전 남자친구로 잠깐 나왔잖아요.
저랑 같은 에피소드에 나왔더라고요. 정민 오빠가 <유 퀴즈 온 더 블럭> 나온 걸 우연히 혜영 언니랑 같이 봤어요. 그때 자료화면으로 ‘응팔’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웃음) 혜영 언니가 “정민 오빠 덕에 ‘유퀴즈’도 나와보네?” 했어요.


<로스쿨> 냉정 솔B도 그렇고, <차이나타운> ‘센캐’ 쏭, <용순> 당돌 용순, <여우각시별> 우직 영주… 어떤 식으로든 당찬 캐릭터를 주로 맡았어요.
<차이나타운>이 첫 단추였기 때문이죠. 그리고 <침묵>에서 한 건 한 것도 한 지분 한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기적> 보경은 맡았던 역 중에서도 특히 사랑스러운 캐릭터예요. 그동안 실제 성격과 닮은 캐릭터로 개중 가장 말랑말랑한 <기묘한 가족> 해걸을 꼽았는데요. 주변에서 본 이수경은 어떤지도 궁금해요. 친구, 동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면요?
자주 듣는 말… (남길) 오빠, 제가 자주 듣는 말이 뭐죠?
김남길 솔직하다?
맞아. 솔직하다는 얘기 많이 들어요.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김남길 얼굴에 드러난다기보다는 솔직한 게 맞는 것 같아. 연기할 때 감정을 못 숨기거나 그러진 않아.
동의해요?
동의… 합니… 다. (웃음)
김남길 털털하다는 얘기도 많이 듣잖아.
아, 예. 털털하다. 털털하다기보다는 덜렁댄다는 얘기 많이 들어요.
김남길 덜렁대지.
단편영화, 독립영화, 상업 영화, 드라마, 단막극 다 해봤어요. 제작 환경 어떻게 다르던가요.
그 경계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드라마 현장은 빠르다’, ‘영화 현장은 여유롭다’였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드라마는 종종 영화보다 호흡이 길어서 물 흐르듯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제가 드라마를 막 시작했을 때, 당시 회사 분들께서 드라마는 좀 다르다며 “너가 영화만 해봐서 처음엔 적응을 잘 못 할 수도 있어”라고 하시더라고요. 호흡이 길고 빨라서요. 영화는 휴차도 꽤 있고 쉴 때 집중이 흐려질 수도 있는데, 드라마는 쉬는 시간 없이 계속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캐릭터에 쭉 몰입하고 있게 되더라고요. 그 점은 좋았어요.
새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사극이요. (뒤편에 서 있는 김남길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데, (웃음) 안되네요.
전부터 사극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대표님이 이뤄주시길 바랄게요.
김남길 아, 저한테 하신 얘기구나. 예. 알겠습니다!

연기에 뜻이 없었는데, 부모님이 자신감 키우라고 연기학원에 보내셔서 우연히 시작했다고요.
본인이 하고 싶어서 이 길을 걷게 된 배우분들이 많으실 텐데, 저는 아빠가 시켜서 택한 일이었어요. 처음엔 저랑 안 맞는 직업인 것 같아서 어려웠죠. 재미가 들리고 나서부터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어요. 아빠의 선택이 옳았고 제가 그 선택에 혜택을 받죠.
당시 담임 선생님 친구가 <여름방학>을 연출해서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어요. 그게 인생 첫 오디션이었나요?
네. 맞아요.
어떤 장면을 연기했는지 기억나요?
벌써 9년 전이네요. 순영이(이수경) 대사였던 것 같아요. 음… 음… 아! 준희(박종찬)한테 “이걸 찢어”라고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때부터 몇 작품 내리 서툰 고등학생을 연기했어요. 그땐 실제로 고등학생이기도 했고요. <기적>으로 오랜만에 다시 학생 연기를 했는데, 이수경의 고교 시절은 어땠는지도 궁금해져요.
지금이랑 크게 다를 건 없었어요. 전 선생님들이랑 좀 각별했어요.
사소한 궁금증인데요. <기적>에서 준경이 보경에게, 라희를 광수라는 흔한 남자 이름으로 속여 소개하잖아요. <로스쿨>의 솔들은 이름이 같아 A, B로 불리고요. 당신의 이름도 흔하다면 흔한 편인데, 학창 시절에 번호 붙여져 불린다거나 하진 않았나요.
저 의외로 없어요. 되게 흔한 이름 같잖아요? 근데 한 번도 이름이 겹친 적이 없어요. 교회 다닐 때 교회 선생님 성함이 이숙(!)영이었던 것 정도.
혹시 <여름방학>을 소개해준 그 담임 선생님을 안 만났다면 지금 이수경은 배우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네. 고3 때 연기를 그만하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했을까요.
저는 디즈니에 취직하고 싶어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요.

영화 제목이 기적이니 물어봐야겠어요. 당신 인생에 일어난 가장 기적 같은 일은 무엇인가요.
이거 개봉하는 거요. (웃음) 왜냐면, 지금 밀려있는 영화가 너무 많잖아요. 근데 그중 우리 영화가 개봉한다는 게 제겐 기적이에요. 한 번 밀렸을 때 사실 ‘아… 그럼 내년에나 개봉하려나’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개봉을 한다는 거죠! 너무 놀랐어요.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 기차와 연관된 질문을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해졌어요. 혹시 내일로 여행해 본 적 있나요.
없습니다.
여행을 잘 안 하나요.
잠깐 시골 사는 친구 집에 가는 정도?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더 안 가고요. 잠깐잠깐 집 밖 마실 나가는 정도예요.
그럼 리프레시를 어떻게 하는 편인가요.
그냥 집에 있는 게…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리프레시예요.
영화도 많이 보는 것 같던데요.
그런 건 아닌데요.
어렸을 때 방학에 영화 100편씩 몰아보는 게 나름의 자부심 같은 거라고 했던 걸 들었어요.
어렸을 땐 많이 봤어요.
인생 영화가 있나요.
영화 말고 드라마 얘기해도 되죠?
그럼요. 아, <플리백> 보는 것 같던데요.
(손가락을 튕기며) 진짜, 그거 미쳤어요!! 하… 시즌 1도 재밌게 봤는데, 시즌 2가 너~무 재밌는 거예요. 너~무 재밌었어요. 시즌 2가 사랑 얘긴데, 제가 그런 걸 좋아하나봐요. 저는 제가 이렇게 사랑 얘기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근래 본 드라마 중 제일 재밌었어요.
인스타그램에 젠데이아 사진 올려둔 것도 봤어요.
너무 좋아요. 그래서 요즘 <유포리아>도 보고 있어요.

혹시 인터넷에 본인 이름을 자주 검색하나요.
옛날엔 진짜 많이 했어요. 여기저기 다 들어가서 해봤어요. 요즘엔 많이 줄였어요.
이름에 어떤 수식어가 붙었으면 하나요.
아까 대표님이랑도 차에서 ‘우리 둘 다 그런 사람 아닐까?’ 하고 얘기했던 건데. 도화지 같은 배우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왔던 것 같아요.
2021년이 석 달 좀 넘게 남았어요. 남은 2021년 계획이 있다면요?
일단 <기적> 대박 나고? (웃음) 그리고~ 차기작 결정하고~ 음… 그리고~ 없네요. 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기적> 찍으면서 전 저만 이 영화에 과몰입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터뷰 기사들 찾아보니까 윤아 언니도, 정민 오빠도, 성민 선배님도 다 과몰입하셨던 것 같더라고요. 그게 좋았어요. 다 함께 과몰입하고 있었다는 게.
글 ·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
사진 · 길스토리이엔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