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아는 게 재미]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
세계 청년들의 화합을 꿈꾼 스포츠의 선각자
[MHN스포츠 권수연 기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치고 올림픽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올림픽에 있어 현대인의 반응은 보통 셋으로 나뉜다. 올림픽 그 자체에 열광하며 모든 종목에 푹 빠져서 보는 사람들과, 자신이 응원하는 종목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냥 아예 안 보는 사람들. 물론 그 어떤 쪽도 나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집합에 속해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혹시 올림픽 창시자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본다면, 스포츠와 올림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몇 명을 뺀 대다수는 '누군데?' 하며 반문할 것이다.
바로 이 '누군데?' 로 일컬어지는 '피에르 드 프레디 쿠베르탱(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남작이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이다.

■ 올림픽은 원래 그리스 최고신에게 바치는 경기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그야말로 스포츠의 살롱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는 스포츠를 잘 즐기지 않던 사람도 열띤 분위기에 휩쓸려 범세계적 축제 분위기를 만끽한다. 올림픽 개최국으로 지정된 나라는 그야말로 스타국가가 되어 전 세계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본래 올림픽은 그리스의 올림피아 성소에서 열리던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제전경기의 하나였다. 그 당시 명칭은 '올림피아 제전' 이었다. 올림픽은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처음에는 신에게 바치는 거룩한 경기였던 탓에 종교성이 짙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온갖 예술인들이 제전을 위해 몰려들면서 고대 올림픽은 종교, 예술, 군사훈련을 집대성한 헬레니즘 문화의 정수가 되었다.
이 때의 올림픽은 달리기, 원반던지기, 레슬링의 육체적 대련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 관련된 대회도 병행했다. 유명한 로마제국의 5대 황제 네로도 음악을 하고 시를 써서 우승을 휩쓸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실수로라도(?) 네로를 이기면 일단 사형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흥분한 선수들이 황소처럼 날뛰며 반칙을 저지르면, 심판은 이들을 소 다루듯 채찍으로 후려갈기기까지 했다. 만일 제우스가 실존했다면 팝콘이라도 들고왔을 법 하다.
그러나, 이처럼 화려했던 고대 올림픽은 중세에 접어들어 국교인 기독교에 묻혀 역사의 저 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체육에 관심이 많은 근대 후손들은 고대 올림픽의 부활을 꿈꾸며 이를 꾸역꾸역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근대 후손 중 한 명인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은 프랑스 몰락의 원인을 '군인들의 체력이 약해빠졌기 때문' 이라는 아주 심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게다가 당시 발굴되었던 고대 올림피아 유적지의 연구는 그의 결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생애
162cm의 단신, 그러나 20세기의 거인으로 불리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1863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쿠베르탱 백작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 제법 적응도 잘했고 우수한 성적을 받은 모범생이었다. 쿠베르탱은 노르망디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프랑스의 국력 약화에 대해 깊은 고뇌를 품기 시작했다
당시 1793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목이 달아난 뒤 프랑스 국내 사정은 혼돈, 파괴, 마비 그 자체였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정권이 바뀌었다. 실각한 국왕에게 몰래 협력했던 사람의 시신이 관짝에서 뒤늦게 꺼내져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그 이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무너진 이후 천천히 국력이 주저앉았다.
이후 1871년 파리 코뮌에서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북독일 연방과 프랑스의 전쟁인 일명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게 된다. 이 일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국 자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젊은 쿠베르탱은 당연히 적국인 프로이센만 보면 이를 박박 갈았다. 상대국에 대한 적개심은 자연스럽게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승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쿠베르탱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들끓는 애국심에 비해 군인으로써의 자질은 약간 부족했다.
이후 그는 사관학교를 중퇴한 뒤 교육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프랑스 교육개혁의 선구자가 된다.

스포츠 행정가이자 교육가이기도 했던, 소위 요즘말로 '스포츠 오타쿠' 였던 쿠베르탱 남작은 스파르타의 교육방식에 개인적으로 큰 흥미를 느껴 연구를 지속했다. 게다가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한 국제주의의 영향도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쿠베르탱은 당시로써는 대단히 파격적인 꿈을 꿨다. 당대 팽배했던 민족주의 사상을 벗어나 스포츠를 통한 세계 청년들의 화합을 꿈꿨던 것이다.
그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틀이 바로 '올림픽' 이었다.
다만 너무나 파격적인 꿈이었던 만큼, 당시 먹고살기 바빴던 대중들의 빈곤한 지식수준과 놀라울 정도의 무관심은 그의 프로젝트를 지지해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1894년 6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올림픽 경기의 부활을 위한 의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올림픽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다.
이런 노력 끝에 마침내 지지자들의 성원에 힘입은 쿠베르탱 남작은 1894년 6월 23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896년 4월 6일에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 1회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물론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크고작은 온갖 종목의 스포츠 대회와 경기들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종목을 한 자리에 모아 세계인의 축제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업적이 아니다.
그러나, 쿠베르탱 남작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 업적을 당당하게 해냈고 근대 스포츠의 선각자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쿠베르탱 남작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하루 아침만에 조각조각 흩어진 스포츠 대회를 한 곳에 쓸어모은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스포츠 대회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려는 노력들은 꾸준히 있었다. 스웨덴, 프랑스, 영국 등 세계 각지에서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지역대회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럼에도 고대 문명에 대한 동경과 향수와 연구는 끊이지 않았다. 어느 곳이나 일단 시도는 훌륭했다. 결과가 그렇지 못했을 뿐.
다만 그렇게 모인 데이터들과, 쿠베르탱 남작의 시대를 초월한 자유주의적 사고, 세계화를 표방하는 큰 시야, 체계적으로 받은 스포츠 교육이 합산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즐기는 올림픽의 전신이 되었다.
'스포츠의 세계화' 이 이념은 이전에는 누구도 감히 상상하고 시도해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 거대한 생각이 근대 올림픽을 세계전으로 발전시킨 디딤돌이 되었다.

■ 위대한 올림픽 창시자는 성차별주의자였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All sports for All people" 라는 말을 남겼다. 모든 스포츠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가 이 말을 할 당시 '모든 사람' 에 여성은 들어있지 않았다.
쿠베르탱 남작은 여성을 위한 스포츠를 용납하지 않았다. 여성이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만큼 꼴보기 싫은 모습도 없다며 여성의 올림픽 출전을 강하게 반대했다.
여자의 역할은 시상대에 오르는 남성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것이라며 거침없는 발언을 속속들이 퍼부었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여성계는 여성 스포츠 국제대회를 개최했다.
이 때문에 올림픽이 피해를 입게되자 쿠베르탱 남작은 여성 스포츠 국제대회가 열리는 것을 어떻게든 저지하려 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사건으로 여성 스포츠대회의 인지도만 높여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쿠베르탱 남작은 백기를 들었다. 이에 대한 조치로 1900년에 파리에서 열린 제 2회 올림픽과 여성 스포츠 국제대회는 자연스럽게 합쳐졌다. (별개의 얘기지만 이 2회 올림픽은 비둘기 사격, 대포 발사, 관중 난입(?) 등 이색 종목을 선보이며 다채롭게 망하게 된다)
후일 뒤끝이 남은 쿠베르탱 남작이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다. 이런 조치는 내 일생 최대의 굴욕이다" 며 분기탱천하자, 옆에 있던 손녀딸이 "할아버지는 여자가 땀조차 흘리지 말라는건가요?" 라며 라스트어퍼컷을 먹였다. 남작은 이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이 발언에 있어서는 시대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여성이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것에 대해 지금처럼 반기던 시절이 아니었다. 사실 여성 운동선수가 대접받은 시기는 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이처럼 스포츠계에 위대한 영향을 미친 선각자일지라도 어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시대가 주입한 편견과 현실의 괴리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씁쓸한 이면을 시사한다.

■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64년,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 을 제정해 수여하고 있다. 이 메달은 성적 여부를 떠나 '진정한 스포츠맨십' 을 구현한 선수들이나 혹은 인재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처음 제정된 이래로 반세기가 넘도록 17명 정도밖에 수상하지 못한, 어떻게 보면 금메달보다 훨씬 가치가 뛰어난 메달이다.

위 사진은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마라톤 선수 반데를레이 데 리마가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한 뒤 찍은 사진이다. 해당 선수는 마라톤 경기 도중 어떤 관종, 아니, 관중에게 경기를 방해받았지만 꿋꿋이 레이스를 완주했다.
이후 그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인정받아 동메달과 함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목에 걸었다.
현실적으로는 금메달을 뛰어넘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 런던 올림픽 펜싱전에서 신아람 선수를 메달 수상자 후보로 추천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국내의 낮은 관심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이름을 내건 메달이면서도 단지 '1등을 위한 메달이 아니기' 때문에 이 메달의 국내 인지도가 낮다는 점과, 이 메달의 수상자인 반데를레이 데 리마가 당시 했던 인터뷰는 묘한 교차를 이루며 하나의 메시지를 이룬다.
"메달의 색깔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금메달이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내가 올림픽에 참가해서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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