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채아트뮤지엄 특별대담회서 정영목 교수 발제 에드워드 호크니의 MeC 패러디 작품 의미심장 미국은 1967년 '시카고 피카소'로 피카소와 이미 화해
MeC의 미스터리 형상을 클로즈업한 화면
“여기 보이는 이 모습은 모기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벌레를 표현한 것일까요?”
피카소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정영목 서울미대 명예교수가 ‘한국에서의 학살’ 한가운데 기묘한 형상을 클로즈업해 보여주자 대담장에는 일제히 낮은 탄성이 일어났다.
“피카소의 그림이 난해하긴 해도 큐비즘(입체주의 회화)의 관점에서 불필요한 터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형상은 제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선뜻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지난 6월25일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갤러리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한국에서의 학살(원제 Massacre en Corée, 이하 MeC으로 표기)’을 제대로 읽기 위한 담론의 장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 교수는 오랜 연구 주제인 MeC의 창작 동기와 메시지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정 교수는 이 그림을 주제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는 이 그림의 한 가운데 위치한 미스터리한 형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피카소가 MeC을 그릴 당시 머물던 남프랑스 발로리스(Vallauris)를 찾아갔다고 한다.
단순히 하나의 텍스트(text)로서의 그림에 대한 해석을 넘어 맥락(context)을 통해 행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피카소가 MeC 후속작으로 프랑스 발로리스 성당 궁륭(Vault)에 그린 전쟁과 평화의 실제 모습
“발로리스 성당의 궁륭(穹窿, Vault), 즉 아치형 천정에는 ‘전쟁과 평화’라는 피카소의 그림이 있습니다. 피카소는 1951년 MeC을 발표한 후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동지인 프랑스 공산당원들로부터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거리가 먼 모호한 그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받았지요. 왜 그림에서의 학살자를 미군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냐는 겁니다. 잘 알려진대로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자유진영으로부터는 6.25전쟁 당시 ‘신천군 사건’을 미군의 학살 만행이라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을 형상화한 그림이라고 비난받았습니다. 하지만 화가인 피카소에게 그보다 더 뼈아픈 것은 예술적으로 별 볼일 없는 작품이라는 비난이었을 겁니다. 피카소는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의 반전 평화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한 그림을 그립니다. 그 그림이 이듬해인 1952년 그린 천정화 전쟁과 평화입니다. 작품의 기초가 되는 드로잉만 수 백 장을 남겼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전쟁과평화' 중 '전쟁'. 오른쪽에 세균전을 의미하는 세균의 형상이 보인다.
`전쟁과평화` 중 `평화` 오른쪽 상단 연(Kite)을 연상케 하는 바탕에 큐비즘적 태극문양이 인상적이다.
전쟁과 평화 중 ‘전쟁’에는 당시 미소 냉전 체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확산시키던 세균전을 나타내는 형상이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평화’에는 태극문양이 피카소 특유의 터치로 표현돼 있어 MeC의 후속작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MeC의 미스터리 형상은 세균전의 암시적 묘사일까
6.25 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인 1950년 3월부터 세균전 발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해에 그려진 MeC에 세균전을 의미하는 형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어보았습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입체주의 표현형식을 오랫동안 탐구하고, 후속작과의 비교 대조 끝에 내린 결론은 이 형상은 단순한 협곡(峽谷, Gorge)이라는 것입니다. 세균전에 대한 암시나 고발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지엽적 해석을 넘는 맥락의 이해를 위해서는 전쟁과 평화에 대해 피카소가 남긴, ‘나의 가장 큰 희망은 내 작품이 장차 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데 기여하는 것이다’라는 언명에 깃든 평화 의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카소와 동시대 유럽 작가들 중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막스 벡크만, 오스카 코코슈카, 이태리 미래파의 마리네티 등이 1차 대전에 참전했고 그중 다수가 죽거나 정신병을 앓게 됩니다. 피카소 자신도 고국인 스페인의 내전을 목격하고 트라우마에 가까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폭력과 전쟁의 공포를 누구보다 실감 있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피카소가 MeC에서 단순히 특정 국가나 진영을 고발하고 공격하려 했을까요? 아니면 전쟁 자체에 대한 몸서리 쳐지는 혐오를 나타냈을까요?”
정 교수는 MeC을 읽는 코드 중 하나로 ‘뮤즈’를 꼽았다.
그림 속에는 창작 당시 연인이었던 프랑수아즈 질로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가 발로리스에 살면서 MeC을 그릴 당시의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는 61세 때 21세였던 질로를 만나 격렬한 사랑에 빠졌다. 프랑스 태생인 질로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과 법학을 공부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지성적 화가였다. 1921년 생으로 올해 만 100세이지만 여전히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피카소는 열렬히 사랑하던 질로와의 사이에서 2세를 얻는다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들 클로드를 임신한 질로의 배를 보면서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고조돼 있었을 겁니다. 피카소는 언제나 자신이 사랑한 여인들을 작품으로 표현해 왔고 MeC에도 역시 만삭의 질로를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런 그의 창작 습관을 감안할 때 군인들의 총구 앞에 선 임신한 여인들은 질로의 당시 이미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겠죠.”
어떻게 보면 피카소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소중한 뮤즈와 뱃속의 아이를 총구 앞에 세우는 극단적 구도를 통해 반전의지를 극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고발하려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MeC 주변의 테두리는 그전에 무언가를 그렸던 흔적 아닐까
대담 패널로 참석한 서용선 화백(전 서울미대 교수)이 MeC에서 간과돼 온 화법과 제작 기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사진 왼쪽의 임산부를 질로로 본다면 작품제작 당시인 발로리스 시대의 일상이 작품에 녹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아울러 사진 한가운데 미스터리한 형상은 어떤 사진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협곡 인근의 강과 산의 모습이 피카소의 회화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원근법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른쪽 병사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큐비즘적 형상이지요. MeC은 피카소의 작품에서는 드물게 일상과 사실, 상상이 오버랩된 그림이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MeC의 주변에는 작품에 사용된 것과는 확연히 다른 색조의 테두리가 보인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작품 제작 시기입니다. 작품의 위아래 6~7㎝, 좌우에 7~8㎝의 테두리가 보입니다. 1950년 9월에 시작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림을 한 번에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무엇인가를 그리다가 덧칠해서 마무리한 그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림의 테두리는 대부분 그런 경우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연구가 혹시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패널과 참관객들의 열띤 호응으로 시종 진지하게 이어지던 대담에서 정 교수는 한 장의 코믹한 그림을 소개했다. “호크니가 이런 장난스러운 그림을 그렸어요. 하하” 그가 보여준 그림은 현존 화가 중 작품가격이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ney)가 2003년에 발표한 ‘학살과 묘사의 문제(The Massacre and the Problems of Depiction)’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ney) 작품 학살과 묘사의 문제(The Massacre and the Problems of Depiction) 2003
그는 이라크전이 한창이던 2003년 마치 컴퓨터 게임화면을 연상케 하는 전쟁보도에 화가 났다고 한다. 번쩍거리는 화염은 얼핏 불꽃놀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화염 주변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었으리라. 호크니는 전쟁의 참상을 도외시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보도사진의 한계를 고발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화면 아래 사진을 찍는 사람은 호크니 자신을 묘사한 것이다. 호크니의 해석에 따르면 가장 치열한 반(反)나치 주의자 피카소가 그린 MeC은 사실 나치가 운영하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원래의 모티브라고 한다. 나치가 물러난 뒤에 현장을 찾은 사진기자와 사진작가들은 수용소를 생존자 중심으로만 묘사해 그동안의 참상을 충분히 고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크니는 사진, 특히 전쟁사진이 전쟁의 진실을 담지 못한 반면 피카소의 MeC은 전쟁을 직시하고 고발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결국 사진가는 MeC과 같은 직관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찍어서 보도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이 호크니의 메시지라고 한다. 사진에 대한 통렬한 조소다.
“피카소 그림같다”라고 말하면 검찰에서 조사받던 시대
정 교수는 MeC으로 인해 피카소가 반공주의자들의 공적이 됐던 1960년대 말 매카시즘 시대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당시 신문보도 지면을 보면 검찰이 어린이 학용품 크레파스에 피카소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던 삼중화학 대표를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하고 상품에서 피카소라는 명칭을 지우도록 했다고 한다. 이 기사는 또 검찰이 원로 코메디언 고 곽규석씨가 진행한 TV쇼 프로그램에서 피카소라는 예명을 사용한 개그맨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로 프로듀서들을 조사했다고 전했다. 또 “곽씨가 좋은 그림에 대해 피카소 그림 같이 훌륭하다라고 말한 이면을 캐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기사를 보면 당시 한국 정부는 피카소를 ‘뿔 달린 빨간 도깨비’ 쯤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피카소 크레파스를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했다는 내용의 1969년 신문보도 스크랩
신천군 사건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한국전쟁 발발직후인 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 민간인 3만5000여명이 숨진 비극을 말한다. 사건 진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인민군과 공산당원들에 의해 기독교인 다수가 처형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우익 청년들이 공산당원들을 공격하면서 동족간 대규모 살육전으로 비화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작가 황석영씨가 2001년 발표한 소설 ‘손님’도 신천군 사건을 좌우익간의 충돌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 손님이란 비극을 야기한 외래사상인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티즘과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말한다. 전후 남한에서는 ‘신천 반공의거’라고 부른 반면 북한은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었다며 ‘신천 학살’로 선전하고 있다. 나아가 북한은 1960년 ‘신천학살박물관’을 세워 주민들의 반미 선동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 교수는 MeC이 신천군 사건을 그린 것인가 라는 세간의 가장 뜨거운 논란에 대해 사건과 작품간 시간적 연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피카소가 MeC를 창작하기 시작한 시점은 6.25전쟁이 세계 언론에 연일 집중 보도되던 1950년 9월께로 추정됩니다. 신천군 사건은 사후 조사를 통해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두 달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51년 공산주의 계열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가 현장 조사한 결과를 발표한 다음에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1952년에야 미군의 양민학살로 선동하기 시작합니다. 피카소가 신천군 사건을 알고 그것을 MeC의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북한의 주장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북진 중이던 미군이 신천군에서 두 달간이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학살 주동자로 윌리엄 K 해리슨 중위라는 인물을 내세우고 있는데 당시 신천에 진주했던 미군 중에 해리슨이라는 이름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정 교수와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시간 순으로 재구성해 볼 때 피카소는 MeC 창작 당시 신천군 사건을 알 수 없었다. 역으로 그림에 붙은 학살(Massacre)이라는 명칭이 북한 측의 신천학살 스토리 날조에 영감을 주었을 여지는 있다. 그렇다 해도 피카소가 그것을 예측하거나 의도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피카소, 70년만의 MeC 국내 전시로 자신의 시간을 찾다
이번 특별전을 주관하는 전수미 비채아트뮤지엄 대표는 ‘피카소의 시간’에 주목했다. “신천군 사건은 아직까지 진상과 경위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전히 의문부호가 남아 있는 신천군 사건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해 신천학살로 부른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MeC이 미군에 의한 학살을 묘사했다고 믿는 것 또한 북한의 일방적 주장을 따르는 결과밖에 안 됩니다. 작품탄생 70년 만에 이뤄진 MeC의 국내 전시는 그런 관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신천군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 하고 피카소에게 씌워진 오해를 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피카소의 시계는 1960~1970년대 매카시즘 시대에서 멎어 있었습니다. 이제 피카소가 자기의 시간을 찾았다는데 이번 전시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내 MeC 특별전시실에서 지난 6월25일 열린 특별대담.
피카소와 MeC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오랜 적개심과 경계심은 피카소 생전에 미국이 그에게 찍은 낙인의 효과도 크게 작용했다. 피카소는 1944년 당시 나치즘과 파시즘에 치열하게 항거하던 동료 예술인들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미국 FBI는 그를 사찰대상에 포함시켜 그의 발언과 동정을 면밀히 추적했다. 피카소가 3번이나 미국 입국 비자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미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매카시즘이 한층 증폭돼 맹위를 떨치던 한국에서 피카소가 극렬 공산주의 괴뢰로 인식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피카소는 미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기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을까? 그리고 미국 시민들은 서양 회화를 뿌리부터 뒤집어 재탄생시킨 천재화가 피카소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시카고 피카소로 ‘영원한 미국의 시민’이 된 피카소
그 해답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달리플라자에 세워진 높이 15.2m, 162톤의 거대 조형물에서 찾을 수 있다. 시카고의 아이콘이자 시카고가 세계 추상미술의 허브가 되게 한 ‘시카고 피카소’다. 공식적인 이름이 붙여지지 않아 ‘더 피카소’라 부르기도 한다. 해리슨 포드의 ‘도망자’, ‘블루스 브라더스’ 등 많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1967년 8월15일 시카고 달리플라자에서 열린 더 피카소 제막식
제막당시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았던 더 피카소는 시카고의 아이콘이 됐다.
더 피카소는 피카소가 85세 되던 해인 1966년 시카고 시의 요청을 수락해 창작했다. 그의 반려견이었던 아프간 하운드종 개 카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케치와 함께 높이 1m 짜리 원작을 시카고시에 기증했고, 이를 토대로 US스틸에서 조형물을 제작했다. 당시 총 제작비용은 35만 달러(현재가치 환산 30억8000여만원)였고 시는 이중 10만 달러를 피카소에게 사례비로 보냈다. 그러나 피카소는 “이 작품은 시카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나의 선물”이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더 피카소는 1967년 8월15일 시민 5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으나 당시 시민들의 눈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반응이 싸늘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 그 진가를 인정받으면서 시카고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게 됐다. 1973년 피카소가 별세하자 당시 시카고 시장은 “피카소는 한 번도 미국을 와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시카고 시민에게 더 피카소를 기증함으로써 영원한 시민이 되었다.”라고 애도했다. 피카소에게 공산주의자의 낙인을 찍었던 미국은 이미 오래 전에 그와 화해하고 그의 예술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