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4년 스페인에서 아주 끔찍한 그림이 발견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서 있는 한 남자.
그는 무언가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요.

그가 먹어치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의 몸을 들고
아이의 머리와 팔을 먹어 치우고 있는 광경.
창백하게 질려버린 아이의 몸과
광기에 사로잡힌 남자의 표정에서는 공포스러움까지 느껴집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그림,
프란시스코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입니다.

이 작품은 신화 속 이야기를 모티브로 그려졌는데요.
그림 속 남자와 아이는 다름 아닌 부자지간입니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 속 시간과 농경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선 '크로노스'라 불립니다.

크로노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났죠.
우라노스에게는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형제들이 있었는데요.
우라노스는 그들의 모습을 흉측하다고 여기며,
자신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지하세계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렸습니다.

이에 어머니였던 가이아는 크게 분노했고,
크로노스가 그녀와 힘을 합쳐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했죠.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쫓아내고 권력을 얻은 크로노스에게도
‘너도 네 자식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라는 저주가 떨어진 것이죠.
저주가 실현될까 두려움에 떨던 그는
자식이 태어나는 즉시 아이를 통째로 삼켜버리기 시작합니다.
고야는 바로 이 이야기를 그림에 녹여냈는데요.

그가 표현한 크로노스
다시 말해, 사투르누스는 아주 잔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주제는 다양한 화가들에게 그려졌는데요.
그중에서도 고야의 이 그림이 단연 잔혹합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루벤스의 작품을 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죠.
루벤스 그림 속 사투르누스는 지팡이를 짚은
위엄있는 노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냉철한 모습을 보이고 있죠.
반면 고야는 그림 속 남성이 신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비인간적인 이미지로 그려냈습니다.

헝클어져 산발이 된 머리, 온몸을 덮고 있는 털은
그를 신도 인간도 아닌 괴물처럼 보이게 만드는데요.
그의 광기 어린 표정에서는 신의 위엄도
아버지로서의 죄책감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인육을 먹는 짐승처럼
이성을 잃고 아이를 잡아먹고 있죠.

얼룩덜룩하고 거칠게 채색된 화면은
그림에 혼란스러움을 더하는데요.
고야는 왜 이렇게 잔인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사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이 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기는데요.
그는 1775년부터 스페인 궁정에서 일하며
주로 부유층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습니다.

고야의 모델들은 그의 그림에 만족했고,
기꺼이 그의 후원자가 되었죠.
왕실에 가까운 귀족들과의 친분은 그의 출세를 도왔는데요.

그는 카를로스 3세의 전속화가를 거쳐
마침내 오랫동안 염원하던 궁정화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후원자들이 원하는 밝은 로코코풍의 그림을 그리며
부와 명예를 얻은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장했죠.

고야가 46세가 되던 1792년,
성공한 예술가로 자리 잡은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중병을 앓으며
시력과 청력에 문제가 생긴 것인데요.

병세가 좋아지며 시력은 점차 회복되었지만
한 번 잃어버린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죠.
그는 예술가로서 매우 중요한 감각 하나를 잃고 말았습니다.

청각장애는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켰고,
자신만의 환상에 빠지게 만들었죠.
그는 거지, 부랑자 등
사회적으로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의 화풍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회적인 문제마저 고야를 괴롭혔죠.
18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 사회는 굉장히 어지러웠습니다.
정치인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성직자들은 세속적인 것을 탐했죠.

교회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침략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죠.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를 몰아내고
자신의 형제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임명했는데요.
스페인 민중들은 갑작스럽게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 것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켰죠.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런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렸습니다.
무차별한 학살이 이어졌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요.
고야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죠.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평생 후회로 남을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왕정에 충성 서약을 하고
궁정화가로 남기로 한 것인데요.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짓밟은 적을 위한 그림을 그려야 했고,
출세와 명예를 택한 것 때문에 늘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고야는 누구보다도 부패한 사회에 환멸을 느꼈는데요.
그는 정의가 사라진 참혹한 현실을 여과없이 작품에 담기 시작했죠.

80점에 이르는 판화 연작 ‘로스 카프리초스’를 통해선
사회 지도층의 타락한 생활을 고발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814년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철수한 후엔
그들의 만행을 기록한 그림들을 공개했는데요.

그가 발표한 ‘전쟁의 참화’ 연작에는
스페인 민중을 무참히 학살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 속 처형당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기의 순교자처럼 묘사되었는데요.

반면에 그들을 향해 총을 든 군인들은
얼굴조차 없는 뒷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죠.

같은 인간에게 맥없이 죽임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극적인 전쟁의 참상을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그는 어두운 소재를 이용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과 잔인성을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에 올랐음에도
마냥 순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던 고야.
그는 권력이 지닌 폭력성과 인간의 사악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목격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전달하기 위해
잔인하고 직설적인 표현 방법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는데요.

그의 그림에는 민중을 홀리는 마술사,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짓밟는 거인 등
초현실적인 존재와 악마적인 요소들도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죠.

전쟁이 끝나고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으로 돌아와
고야를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였는데요.
다시금 궁정화가의 삶을 살게 되었음에도
그는 풍자화를 통한 사회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갈수록 괴기스럽고 잔혹하게 변해 갔죠.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습니다.

여러 번의 투병 생활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고야는
1819년 72세가 되던 해, 마드리드 외곽의 시골로 홀연히 떠나버렸습니다.
그는 그곳에 작업실 겸 숙식을 해결할 별장을 얻어
세상과 연을 끊은 채 은둔생활을 시작했죠.

고야는 그 별장을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렀는데요.
그가 별장을 구입하기 전의 세입자도 귀머거리였으며,
고야 자신도 청력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죠.

그는 별장에 틀어박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별장에는 총 14점의 벽화가 그려졌는데요.

이 그림들은 모두 검은색, 회색, 갈색의 색채로 구성되어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죠.

이 그림들에는 고통에 찬 표정의 민중들이나
해골처럼 괴상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생기 없는 낯빛과 광기 어린 눈빛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싹함을 느끼게 하죠.
고야는 그림들을 별장에 남겨둔 채 1823년 프랑스로 망명해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검은 그림 연작’은 그가 사망한 지 40여 년이 흘러서야 발견되었는데요.
당시 별장의 소유주였던 살바도르 남작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죠.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도
바로 이 ‘검은 그림 연작’의 일부인데요.

아쉽게도 이 그림들은 고야 사후에 발견되었고, 그가 생전에 언급한 적도 없어
작품에 담긴 정확한 의도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생애를 돌이켜보며 추측한
여러 가지 가설들이 존재할 뿐이죠.

다양한 추측 중 하나는 당시 스페인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인데요.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폭정은 갈수록 극에 달했습니다.
고야가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죠.

그는 이런 사회상을 반영해
부패한 권력을 휘두르는 왕과 귀족들은 사투르누스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스페인 민중은 그에게 잡아먹히는 아이로 그려낸 것입니다.

무책임한 지배자와 고통받는 민중.
사투르누스의 광기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잡아먹힌 아이의 모습은
그 비극을 더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침략 당시 용기 내 저항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선택을 반성하고
그림으로 용서받기 위해 노력한 것이죠.

검은 그림 연작은 집밖에 나오지 않았던 그림입니다.
다시 말해 고야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으려 했던 그림이죠.
그는 정권이 두 번이나 교체될 동안 궁정화가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늘 후원자에게 주문을 받아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고,
지배계층의 감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말년에 이르러, 모든 속세를 떠나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을 작품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회적 혼란과 개인에게 찾아온 비극 사이에서
남들의 시선을 떠나 오직 자신만의 생각만을 담은 작품.
사람들은 고야의 작품세계가 결국 이 작품을 통해 완성되었다 평가합니다.

아들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고통 속에서 신음했던 사투르누스.
신화에 따르면 그는 결국 숨겨졌던 아들 유피테르,
다시 말해 제우스에 의해 축출되고 지옥으로 유배됩니다.
그리고 신들의 세상이라 불리는 올림포스 시대가 열리게 되죠.
광기 어린 시대가 지나자, 새로운 신들의 세계가 열린 것이죠.

사회와 인간의 잔혹성, 비도덕성을 목격했던 고야.
그는 사투르누스의 광기어린 모습을 통해
세상을 비판하면서, 언젠가 새롭게 나타날 미래를 꿈꿨을지도 모릅니다.
평생에 걸쳐 자신에 대해 반성하며
세상의 문제를 목격했던 예술가.
잔혹하고도 고통스러운 그의 작품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감정이 느껴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