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우측보행 10년.. 60대가 가장 빨리 적응했다
우측보행 10년 5000명의 고백

수렵시대의 사냥꾼은 서울 지하철 승강장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화살촉 모양 표지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바닥에도 계단에도 천장에도 화살표가 찍혀 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을지로3가역. 잠실 방향으로 가는 2호선 내선 순환선이 도착하자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승객이 쏟아져 나왔다. 상당수는 3호선 환승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천장에 달린 방향 지시등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묵묵히 불을 밝힌다. 오른쪽 화살표에는 초록불이, 왼쪽 ×표엔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오른쪽으로 걸어라' '왼쪽으로 걷지 말라'고 아우성친다.
대한민국 국민은 2010년 7월 1일부터 '우측 보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수십 년 된 좌측 보행 습관에서 벗어났을까. 우측 보행에 얼마나 적응했으며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장단점은 무엇일까. '아무튼, 주말'은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설문조사를 의뢰했다. 5월 초 20~60대 남녀 5037명이 응답했다.
국민 32%는 '그때그때 달라'
먼저 현재 보행 습관을 물었다. 5037명 중 1796명(36%)이 '우측 보행을 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늘 우측 보행을 한다'(20%)까지 합치면 56%. 반면 '좌측 보행을 하는 편이다'는 7%, '늘 좌측 보행을 한다'는 5%로 나타났다. 한편 '그때그때 다르다'가 32%를 차지했다. 국민 3명 중 1명은 상황에 따라 걷는 방향을 융통성 있게 고르는 셈이다.
'늘 우측 보행을 한다'는 응답은 뜻밖에도 60대가 23%로 으뜸이었다. 이들은 좌측 보행이 몸에 밴 세대 아닌가. 반대로 20대에서는 '늘 우측 보행을 한다'는 비율이 17%에 그쳤다. 20대는 42%가 '그때그때 다르다'고 답했다. 교육학자인 김기석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인은 교육받은 기간이 길수록 어지간하면 국가 정책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며 "50~60대는 군사정권을 겪었고 정규 교육이 관리 통제 수단으로도 활용됐다"고 말했다. 틸리언 담당자도 "연령대가 높을수록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적 행사 때마다 '문화 시민은 마땅히 ○○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지난 10년은 말하자면 헌것(좌측 보행)을 버리고 새것(우측 보행)을 익혀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우측 보행에 익숙해졌을까. 응답 중 '매우 그렇다'(21%)와 '그런 편이다'(51%)를 합치면 72%였다. 국민 100명 중 72명은 우측 보행에 적응했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 편한지 묻자 '우측 보행'이 54%, '좌측 보행'이 12%였다. 국민 100명 가운데 12명은 우측 보행을 거북해한다. '큰 차이 없다'는 응답도 34%에 달했다.
지난 11일 을지로3가역과 종로3가역, 노원역 등 환승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걷는 방향을 관찰했다. 환승 통로가 붐비지 않을 때는 대체로 우측 보행이 지켜졌다. 하지만 우측 통로는 북적이는데 좌측 통로는 비어 있을 경우 그 보행 규칙은 어김없이 무너졌다. 직장인 김모(여·41)씨는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우측 보행을 하지는 않는다"며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이 많아 복잡할 때만 자연스럽게 우측 보행을 하는 편"이라고 했다.

우측 보행 효과? 검증도 안 해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1903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황제 전용 어차)를 들여왔다. 1906년 '보행자와 차마(車馬)의 우측 규정'이 우측 통행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1921년 차량과 사람의 통행 방식을 일본과 같은 좌측 통행으로 변경했다. 광복 후 미군정(美軍政) 때 다시 우측 통행을 도입했는데 차량에만 적용한 게 문제였다. 우리는 그 후로 오랫동안 '차량은 우측 통행, 사람은 좌측 통행'의 세계에서 살았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도로교통법을 개정했고 이듬해 7월부터 우측 보행이 전면 시행됐다. 세계적 표준을 따르면서 일제 잔재 청산도 고려했다. 하지만 불편하지도 않은데 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들여야 하는지 논란이 있었다. 당시 국토부는 "우측 보행 문화가 정착돼 차가 오는 것을 보며 걸을 경우 보행자 사고가 약 20% 감소할 것"이라고 홍보했다. 또 이미 우측 통행에 맞게 설치된 공항 지하철역 게이트, 건물 회전문, 횡단보도 등을 감안할 때 보행 속도도 좌측 통행보다 1.2~1.7배 빨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보행 혁신'을 시도한 지 10년이 되도록 정부 어느 조직도 그 효과를 파악해본 적이 없다. 경찰청 교통안전과는 "교통사고 통계에 보행자가 걷는 방향과 관련된 항목은 없다"며 "보행자 교통사고는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지만 우측 보행의 영향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교통안전복지과는 "지금 국토부에서는 우측 보행에 대한 홍보나 검증을 하지 않는다. 경찰청도 아니라면 어느 부처에서 관리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우측 보행의 장단점(복수 응답)도 물었다. '차량을 마주 보고 걸어 안전하다'(37%) '오른손에 든 짐끼리 충돌하지 않는다'(31%) '횡단보도에서 더 안전하다'(24%) '일제 잔재 청산'(15%) 등이 장점으로 꼽혔다. 응답자 중 76%는 오른손잡이였다. 우측 보행의 가장 큰 단점은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으면 더 위험하다'(37%)였다. '한쪽으로 통행을 규제하면 더 막힌다'(30%) '국가가 왜 걷는 방향까지 간섭하나'(20%) '습관을 바꿔야 해 불편하다'(20%) 순이었다.
황덕수 교통안전클럽 대표는 우측 보행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문을 1995년에 발표했다. 정부에 우측 보행을 제안했고 국민운동추진본부장까지 지냈다. 그는 통화에서 "우측 보행은 이제 정착되는 단계지만 그동안 효과 검증이 전무했고 차도·인도 구분이 없는 길이나 횡단보도에선 개선할 점이 있다"며 "일방통행로에서 보행자는 우측보다 좌측이 더 안전할 수 있다. 차를 등지지 않고 마주 보고 걷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담당 부처가 없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응답자 39%만 '잘한 결정이다'
미국과 유럽 대륙, 러시아와 중국 등 세계적으로 우측 통행을 하는 나라가 훨씬 더 많다. 호주처럼 과거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곳이나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좌측 통행을 한다. 영국 유학 시절 타던 차(운전석이 오른쪽)를 가지고 귀국했는데 관성적으로 왼쪽에 앉은 사람만 음주 측정을 해 단속을 피했다는 고백도 있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우측 보행으로 바뀐 것을 어떻게 바라볼까.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 최정화 이사장은 "영국, 일본, 홍콩, 호주 등을 빼면 모두 우측 통행에 익숙해 외국인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터키 출신으로 2004년부터 한국에서 살아온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32)는 "운전대는 좌측에 있는데 보행은 왜 좌측으로 하는지 처음엔 신기했다. 우측 보행이라는 국가 정책 변화에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적응할지 궁금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국민 의식과 관련된 문제예요. 독일에서도 한국처럼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만 터키에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 차이는 국민 스스로 국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국가가 나를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생겨요."
우리나라는 마차가 달리던 길에 자연스럽게 자동차가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가마가 나타나면 행인이 길을 비켜줘야 했다. 교통 안전 전문가 장택영 박사는 "그래서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는 길에서는 사람이 차를 피해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있다"며 "그런 곳은 가장자리에 유색 페인트를 칠하거나 선을 긋는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보행로를 만들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왜 주·정차를 막느냐며 지역 상권에서 반대하고 내 집 앞에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번 설문조사 마지막 문항은 '우측 보행으로 바꾸길 잘했나?'였다. 응답은 '잘한 결정이다'가 39%, '큰 차이 없다'가 33%, '잘못한 결정이다'가 12%로 나타났다. 도로교통공단 오주석 책임연구원은 "우측 통행은 보행자의 불편을 좀 줄여줄 뿐, 일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꾼 것은 아니고 그 효과를 산출하기도 어렵다"며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교육과 홍보로 행동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정부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은 사회적 약속 하나를 바꿨다면 AS(사후 관리)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 노원역 환승 통로에는 '좌측보행'이 살아 있다
특수한 구조 탓에 우측보행 不可
서울 노원역에서는 1985년 개통한 지하철 4호선(지상)과 1996년 연결된 7호선(지하)이 만난다. 하루 6만여 명이 이용한다. 그런데 노원역 환승 통로에서 우측 보행을 하다 반대편에서 좌측 보행으로 다가온 사람과 충돌했다면 누구 잘못일까. 우측 보행자가 사과해야 한다.
세상에는 예외라는 게 있다. 우측 보행이 시행된 지 10년이 흘렀지만 노원역 환승 통로를 지배하는 규칙은 여전히 좌측 보행이다. 지난 11일 오후 4호선 노원역에 도착해 7호선으로 갈아타 보기로 했다. 내려가는 계단까지는 우측 보행을 유도했다. 그런데 환승 통로에 이르자 풍경이 180도 달라졌다. 방향 지시등도 사람들도 '좌측 보행'. 안내문은 '환승 편의를 위해 부득이 좌측통행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서울 지하철 1~9호선 중 좌측 보행을 하는 곳은 노원역뿐이다. 서울시와 국토부 등은 10년 전 이곳의 특수한 토목 구조와 에스컬레이터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우측통행보다 좌측 통행이 더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서울교통공사 홍보팀은 "지하는 우측 통행이고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방향이 꼬여서 좌측통행을 하게 된다"며 "4호선 오이도 방향으로 환승하는 승객이 대부분이라 좌측통행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 환승 통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불편하고 혼란스럽다”는 민원을 종종 제기한다. 서울교통공사는 구조적으로 특수한 경우이고 예산 문제도 있어 기존 통행 방식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노원구에 거주하는 이모(47)씨는 “노원역 환승 통로를 가끔 이용하지만 그곳에서 좌측 보행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며 “무심코 남들을 따라 걸어서 그런 건지 둔감해서 그런 건지…”라고 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 이유 없이 ‘우측으로 걸어야지’ 의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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