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L 타임머신 ⑤ 1959-1960] 지금까지도 유일한 REAL '유럽 5연패'
(베스트 일레븐)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UEFA 챔피언스리그의 가치를 월드컵보다 높이 평가했다. 전 세계의 우수한 축구 선수들이 모이는 ‘축구의 본향’ 유럽에서, 최고의 조직력과 기량으로 똘똘 뭉친 최고의 팀이 격돌하는 이 대회의 수준이 4년에 한번 치르는 월드컵을 상회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대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의 몫은 저마다 다르겠으나, 유로피언컵이라 불렸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UEFA 챔피언스리그의 히스토리와 권위가 월드컵에 결코 모자람이 없다는 건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 빛나는 역사를 추적해본다. 유로피언컵이 첫 선을 보이게 된 1955-1956시즌부터 2018-2019시즌까지 빅 이어를 두고 다퉜던 세계 최강의 팀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BACKGROUND
1959-1960 유로피언컵(現 UEFA 챔피언스리그)은 창설 이래 어느덧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인기 클럽들의 줄지은 참가로 대회를 향한 주목도는 더 높아졌고, 1959-1960시즌 역시 유럽 26개 리그의 챔피언들과 지난 유로피언컵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가 참여하며 더욱 풍성한 토너먼트를 구성했다.
시즌에 앞서 주목해볼 점이 있다면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유럽대항전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클럽들이 생겼다는 점이다. 일단 그리스의 올림피아코스. 올림피아코스는 그리스 클럽 최초로 유럽대항전에 발을 들이며 신고식을 치렀다. 그리고 바르셀로나가 등장했다. 유로피언컵이 시작된 후 줄곧 리그에서 2·3위에만 머물렀던 바르셀로나는 1958-1959시즌 마침내 1위에 오르며 유럽대항전 참가 티켓을 얻었다. 영혼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는 걸 보며 배가 좀 아팠을 텐데, 마침내 바르셀로나 역시 그들의 실력을 나라 밖에 뽐낼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변화는 예선 그룹을 보다 단조롭게 편성했다는 부분이다. 16강 토너먼트를 맞추기 위해 이전에 예선전이 필요했던 유로피언컵은 직전 시즌까지 세 그룹으로 나눠 본선 진출팀을 가려냈다. 그러나 1959-1960시즌엔 간단하게 북유럽과 남유럽으로만 나눠 비슷한 지역에 묶인 팀끼리 예선전을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북유럽 포트엔 OGC 니스(프랑스), 샘록 로버스(아일랜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서독), 쿠오피온 팔로세우라(핀란드), 린필드(북아일랜드), 예테보리(스웨덴), 죄네스 에슈(룩셈부르크), 우치(폴란드), 레인저스(스코틀랜드), 안데를레흐트(벨기에), 포어베르츠 베를린(동독),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잉글랜드)가 들어갔으며, 남유럽 포트엔 CSKA 소피아(불가리아), 바르셀로나(스페인), 비엔나 스포르트클럽(오스트리아), 페트롤룰 플로이에슈티(루마니아), 인테르 브라티슬라바(체코슬로바키아), 포르투(포르투갈), 올림피아코스(그리스), AC 밀란(이탈리아), 페네르바흐체(터키), 체펠(헝가리)이 묶였다.
한편 16강에 자동으로 진출하는 시드 배정을 받은 팀도 있었다. 디펜딩 챔프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해 북유럽군의 스파르타 로테르담(네덜란드)과 볼드클러벤 1909(덴마크), 남유럽군의 영보이스(스위스)와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세르비아)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렇다 쳐도, 추첨으로 행운을 누린 네 개 클럽들은 치열하고 빠듯한 예선전을 건너뛰는 메리트를 누렸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서독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도 본의 아니게 시드를 배정받은 격이 됐다. 예선 상대였던 핀란드 챔피언 쿠오피온 팔로세우라가 돌연 참가를 포기하며 자동적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됐다.
예선전은 9·10월에 걸쳐 진행됐고, 그 결과 시드를 받은 팀을 포함 총 16개 클럽이 유로피언컵에 남겨졌다. 홈 & 어웨이로 진행된 16강 대진은 레알 마드리드-죄네스 에슈, 볼드클러벤 1909-비엔나 스포르트클럽, 스파르타 로테르담-예테보리, AC 밀란-바르셀로나, 영 보이스-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인저스-인테르 브라티슬라바, 레오 스타 베오그라드-울버햄프턴 원더러스, 페네르바흐체-OGC 니스로 형성됐다.


ROAD TO FINAL
16강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팀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룩셈부르크의 왕 죄네스 에슈를 1·2차전 합산 12-2로 격파하는 괴물 같은 화력을 자랑했으며, 바르셀로나 또한 이탈리아의 명가 AC 밀란을 총 스코어 7-1로 누르는 용맹함을 선보였다. 지금도 스페인은 물론 유럽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두 클럽은 이때부터도 남다른 기질이 엿보였다.
이중 바르셀로나는 8강에 들어서 더욱 화끈해졌다. 바르셀로나는 페네르바흐체와 세 번의 경기를 치룬 끝에 어렵사리 올라온 OGC 니스를 무려 9-2로 제압하며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과시했다. 헝가리 출신의 코치시 샨도르와 쿠벌러 라슬로의 파괴력은 특히 눈에 띄었다. 이밖에 레알 마드리드·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레인저스는 각각 상대를 제압하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은 두 경기가 모두 흥미진진했다. 일단 첫 번째 경기였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레인저스의 대결은 서독의 자존심을 한껏 세운 일전으로 기록됐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는 1·2차전을 합쳐 12골을 폭격하며 네 골을 넣는 데 그친 레인저스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그리고 반대편 대진. 그곳에서는 운명의 맞수가 마주쳤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외나무다리 승부를 벌이게 됐다. 결과는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였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춤을 춘 레알 마드리드는 역시나 막강했던 바르셀로나를 6-2로 사뿐히 누르며 결승행에 성공했다. 바르셀로나의 홈 캄 노우에서 벌어졌던 2차전에선 레알 마드리드가 적진 한복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골이나 넣으며 포효했다.
이렇게 1959-1960 유로피언컵은 레알 마드리드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대결로 압축됐다. 이미 대회 4연패를 기록 중이던 레알 마드리드와 서독 축구의 자존심을 앞세운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승부는 보는 이들을 기대케 만들었다. 그러나 결승전은, 생각보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진행됐다.


FINAL MATCH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알 마드리드는 유로피언컵 5연패에 성공했다.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양웅’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가 정리했다. 디 스테파노는 세 골, 푸스카스는 페널티킥을 포함해 네 골을 터뜨려, 세 골을 만회하는 데 그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깔끔하게 제압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리차드 크레스에게 선제골을 내줘 잠시 흔들리는 듯도 했으나, 이미 숱한 결승전을 치러온 터라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를 잘 극복했고 내리 일곱 골을 퍼부어 상대의 기를 질리게 만들었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클럽 최초로 유럽 무대 결승전에 도달했지만, ‘역대 최다 득점이 나왔던 결승전’의 패배자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며 물러나야했다. 더 슬픈 건 이들이 이 시즌 이후로 현재 체제인 UCL까지 다시는 결승전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팬들에겐 1959-1960시즌의 유로피언컵 이야기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씁쓸한 이야기로 남아있을 법하다.


HOW TO WIN THE COMPETITION
지금까지도 유일한 유로피언컵 5연패의 전설은 푸스카스의 건재함이 만들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 적응기였던 1958-1959시즌 보다 컨디션이 훌쩍 올라왔던 푸스카스는 유로피언컵에서만 홀로 12골을 몰아치며 득점왕에 올랐다. 특히 결승전의 네 골은 누구도 다시 재현하기 힘들 만큼 압도적 퍼포먼스였다.
1959-1960시즌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은 푸스카스의 ‘커리어 하이’이기도 했다. 리그에서 25골, 코파 델 레이에서 10골, 유로피언컵에서 12골을 뽑아낸 푸스카스는 한 시즌 동안 47골을 몰아치며 최전성기의 기량을 뽐냈다. 현대의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해낼 법한 득점 기록을, 푸스카스는 이미 반세기 전에 성공시킨 것이다. 그만큼 당대 독보적 기량을 자랑했던 선수가 푸스카스였다. 안타깝게도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푸스카스는 1960년 발롱도르에서도 2위 득표를 받았다. 1위는 바르셀로나의 리그 2연패를 이끈 루이스 수아레스의 차지였다.
이밖에도 레알 마드리드의 변치 않는 탄탄한 스쿼드도 5연패의 원동력이었다. 디 스테파노는 푸스카스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 시즌도 유로피언컵에서 득점 2위(8골)를 차지했으며, 프란시스코 헨토·호세 사라가·호세 산타마리아·마르퀴토스 등 주축 멤버들도 기량을 이전과 똑같이 유지했다. 핵심 선수 레이몽드 코파의 이탈로 다소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스쿼드의 경험과 실력과 조직력이 황금 균형을 이뤘던 레알 마드리드는 대적 불가의 유럽 최고 클럽이었다. 최근에 지네딘 지단 감독이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가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기록하는 동안 스쿼드 변화가 거의 없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UNFORGETTABLE PLAYERS
1959-1960시즌 유로피언컵엔 헝가리안들이 득세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푸스카스를 제외하고도 앞서 언급한 코치시와 쿠벌러 역시 이목을 끄는 선수들이었다. 쿠벌러는 일곱 골, 코치시는 다섯 골을 터뜨렸는데, 이들이 있었기에 바르셀로나는 첫 참가임에도 불구하고 대회 4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대 헝가리의 공격진이 정말 막강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쿠벌러는 후에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 뛰긴 했으나, 푸스카스·쿠벌러·코치시·히데그구티 난도르 등 걸출한 선수들이 즐비했던 헝가리는 1950년대를 전후로 유럽 최고의 국가대표팀 중 하나로 손꼽힐 수 있었다.
글=조남기 기자(jonamu@soccerbest11.co.kr)
사진=ⓒgettyImages/게티이미지코리아(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바르셀로나 홈페이지 캡처
그래픽=박꽃송이·김주희(www.bestelev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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