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6부작 시리즈 '이어즈 & 이어즈' [이로사의 신콜렉터]
[경향신문] ㆍ디스토피아를 향한 광기의 질주…무엇이 그것을 멈출 수 있을까
세계의 멸망은 어떻게 도래할까? 오늘은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다음날 소행성이 떨어져서 한순간 모두가 멸망하게 될까? 아니다. 그것은 결코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이 아닐 것이다. 작은 균열들은 점차 벌어지고 멸망의 과정은 길고 길게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멸망은 어쩌면 지금, 이미 도래해 있다.


<이어즈 & 이어즈>는 이야기의 형태로 긴급히 타전된, 종말이 이미 도착해 있다는 경고다. <이어즈 & 이어즈>의 숨 가쁜 첫 에피소드에서 이들의 세계는 한 차례 멸망하려다 만다.
라이온스 가족이 할머니의 생일 파티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시간. 세계 곳곳을 다니는 사회운동가인 자매 이디스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온다. 중국 근처에 있는 그녀는 방금 중국이 만든 인공섬 홍샤다오에 미국이 핵미사일을 쏘았다고 말한다. 재선에 성공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곧 이곳 영국 맨체스터에도 사이렌이 울리고, TV에선 영국 총리실이 전시체제 돌입을 선언한다. 가족들은 패닉에 빠진다.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인공섬 홍샤다오를
핵미사일로 공격했다는 소식이
영국의 라이온스 가족에 전해진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더 어두운 미래로 치닫는 세계…
지구촌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경제 붕괴, 디지털 기술의 급변
“세상은 점점 미쳐가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종말 직전 당신은 무얼 하겠는가? 가족들은 각자 불안에 떨며 서로에게 막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지금의 파트너를 남겨둔 채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간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사이렌이 멈추고 세계는 고요해진다. 잘못된 경보였던 걸까? 첫째인 스티븐은 말한다.
“아니, 끝났다고 멈춘 게 아니야. 전쟁영화 봤잖아. 공습하는 내내 사이렌이 울리진 않아. 경고만 해주고 멈췄다가, 폭탄이 떨어지지.”
이윽고 이디스의 영상통화 화면은 지직거리다가 멈추고 어두운 밤하늘에 폭격의 빛이 퍼진다.
■ 이미 도착한 디스토피아
놀라운 것은 바로 다음 화가 시작되었을 때, 1년 후의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멸망은 오려다가 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종말이 온 게 아니었던 걸까? 그것은 한 차례의 가시적인 경고의 사이렌일 뿐이었고, 곧 더 거대한 폭탄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사이 이미 종말은 시작되어 지금도 착착 진행 중인 것이 아닐까?
왓챠플레이에서 공개 중인 영국 BBC의 6부작 시리즈 <이어즈 & 이어즈>는 2019년 현재부터 2034년까지 영국과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15년간의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이어즈 & 이어즈>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새로운 상상의 세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다 드라마는 지금 세계의 추세를 그대로 이어갔을 때 우리의 일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한 하나의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분쟁지역인 홍샤다오를 두고 중국과의 긴장이 높아진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영국으로 몰려온다. 그런 가운데 영국에선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 포퓰리스트이자 기업가인 비비언 룩(에마 톰슨)이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후 빠르게 캘린더가 넘어가면서 세계는 좀 더 어두운 미래를 향해 질주한다. 트럼프 재선에 이어 펜스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국제연합을 거부하고, 푸틴과 시진핑은 종신 대통령이 되고, 경제가 붕괴해 은행들은 도산하고, 유럽도 속속 우익화해 아테네에선 폭동이 일어나 그렉시트가 일어나고, 이탈리아에는 계엄령이 내려지고, 프랑스는 극우파가 정권을 잡고…. 물론 기후변화도 착착 진행되어 곤충은 멸종하고 장기간 비가 멈추지 않는 이상기후가 발생한다. 트랜스휴먼, 섹스 로봇, 인공지능 서비스 등 <블랙미러>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디지털 기술도 일상을 파고든다.
전 세계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경제 붕괴, 디지털 기술의 급변 등이 숨 가쁘게 진행되지만, 드라마는 보다 현실 쪽에 붙어 서 있다. 모든 일들은 라이온스 일가의 현실감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지극히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라이온스 가족의 구성은 사회·정치적, 인구학적으로 각기 다른 다양한 유형을 모아놓은 듯하다. <모던 패밀리>의 좀 더 모던한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 같은 세팅은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같은 가족일지라도 서로 다른 반응과 영향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한다.
첫째 스티븐은 부유한 자산관리사로, 성공한 회계사인 부인 셀레스트, 그리고 디지털과 거의 한 몸인 베서니를 포함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게이인 남동생 대니얼은 시청 주택관리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이디스는 세계 곳곳을 떠도는 급진적 정치사회운동가이고, 막내 로지는 휠체어 장애인으로 아버지가 서로 다른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에 블루칼라 노동자다. 마지막으로 오래된 성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이 가족의 어른인 지난 시대를 대표하는 할머니 뮤리엘이 있다(누가 봐도 영국 여왕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포퓰리스트 정치인인 비비언 룩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흥미로운데, 스티븐과 대니얼은 그녀를 ‘괴물’이라 부르고, 로지는 저 미친 자가 차라리 사회를 다 뒤집어엎어 버리기를 원한다.
처음에는 세계의 변화로부터 멀리 있는 것만 같았던 그들은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그 영향권에 들어선다. 대니얼은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인 연인을 만나 강제 추방된 그를 귀국시키려 백방으로 뛰다 비극적 상황을 맞는다. 스티븐은 은행 도산으로 재산을 잃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하루에 7개의 일을 하는 긱 노동자로 전락하며, 그의 딸 베서니는 육체 없는 디지털 트랜스휴먼이 되려다 수난을 당한다. 셀레스트 역시 인공지능과 기술의 대체로 일자리를 잃고, 로지는 주거구역이 범죄지역으로 지정돼 수시로 출입에 지장을 받으며, 이디스는 미국의 핵공격으로 방사능 피폭을 당한다. 하물며 죽은 가족의 재를 뿌리는 데도 이상기후로 계속되는 비가 방해 공작을 펼친다.
드라마는 전 세계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그들(우리)의 일이 될 수 있는지를 촘촘히 현실감 있게 그려 보인다.
■ 질주를 멈추자
<이어즈 & 이어즈>의 첫 에피소드는 정치인 비비언 룩의 얼굴로 시작한다. 아직 국회의원조차 아닌 그녀는 한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방청객으로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상황에 대한 질문을 받은 룩은 이렇게 말해 충격을 준다.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신경 x도 안 씁니다(I don’t give a fxxx). 전 세계에서 이슈가 쏟아지지만, 저는 우리 집 앞 쓰레기만 매주 수거되면 바랄 게 없어요.”
룩은 점차 대중의 인기를 얻고 TV에 광대처럼 등장하며 홀로 나아가는 ‘위대한 영국’을 만들어 가겠다고 소리 높인다. 그러나 집 앞 쓰레기와 주차 문제만 해결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지속될 수 없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들은(우리는) 세계 어디에 있든, 어떤 계층에 있든 이러한 혼돈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어즈 & 이어즈>가 이 같은 이야기를 굳이 동원해가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인물들은 자주 카메라를 보면서,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분명한 듯한 대사들을 읊는다.
“세상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빨라지며 미쳐가는데, 우린 멈추지도, 생각하지도, 배우지도 않고, 그저 다가올 재앙으로 질주하기만 해요. 이 다음은 뭘까? 어디로 향하는 걸까? 멈추는 날이 오긴 할까?”

“세계가 이렇게 될 동안 우리는 무얼 했나? 이건 정확히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축하한다, 모두들.”
이것은 라이온스 일가만의 특별한 일이 아니며 모두가 겪게 될 일인지 모른다. 20세기 동안 서구 사회가 이룩했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 관용과 다양성, 세계질서 등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라이온스 가족은 그 안에서 그 같은 잘못을 이해하고 그에 맞서려 애쓰지만, 드라마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결코 희망이 아니다. 과연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디스가 마지막 새로운 버전의 세상으로 들어가며 궁금해했던 것처럼, 앞으로 10년, 100년 후에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과연 깨닫고 이것을 멈출 수 있을까? 드라마는 가능한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다름 아닌 우리가 이 광기의 질주를 멈추자고, 인간의 사랑으로 그것을 멈추자고 긴급한 표정의 얼굴로 말하고 있다.
<시리즈 끝>
이로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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