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데미안이 2020년에.. 초판본 감성, 서점을 뒤덮다

박동미 기자 2020. 4. 29. 10:3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해외원서처럼 보이는 이 책들은 더스토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초판본 표지 버전들이다. 왼쪽부터 한중록, 데미안, 하멜 표류기, 작은 아씨들(1896년), 동물농장, 작은 아씨들(1868년).

- 해외 고전 초판 표지로 역주행

페스트·호밀밭의 파수꾼

작은 아씨들 등 상위권 포진

2040여성 소장 욕구에 인기

“고전 정체성 더 잘 느끼는듯”

일각선 “예쁜 포장에 열광

출판 문화에 악영향” 지적도

‘페스트’ vs ‘페스트’ ‘데미안’ vs ‘데미안’. 요즘 서점가의 소설 베스트셀러 차트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고전 소설이 상위권에 대거 포진해 있고, ‘같은 책’끼리 경쟁 중이다. 4월 셋째 주 교보문고 소설 부문을 보면 ‘페스트’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작은 아씨들’ 등 20위 내에 해외 고전이 무려 7권 들어가 있다. ‘페스트’의 경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관심이 높아졌고, ‘작은 아씨들’은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덕분이다. 이 ‘역주행’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이들 중 절반이 초판본 표지라는 사실. 때로는 ‘데미안’과 ‘페스트’처럼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같은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오른 경우도 있다. 초판본 표지 인기가 ‘고전 역주행’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초판본 표지로 인기를 얻은 대표적인 책으로는 ‘데미안’과 ‘페스트’(더스토리, 교보문고 6·7위), ‘호밀밭의 파수꾼’(왼쪽 사진, 민음사·인터파크 11위), ‘작은 아씨들’(오른쪽, RHK·인터파크 13위) 등이 있다. 더스토리의 ‘데미안’은 헤세 탄생 140주년을 기념해 1919년 독일 피셔 출판사가 내놓은 초판본 표지다. ‘페스트’(더스토리)의 표지도 1947년 초판본을 따랐다. 민음사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J D 샐린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51년 초판본을 바탕으로 새롭게 디자인됐다.

초판본 표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2015∼2016년 무렵. 소와다리 출판사에서 소월, 백석, 윤동주 등의 초판본 시집 표지를 복각해 출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다. ‘복고 유행’과 함께 읽는 책에서 보는 책, 소장하는 책으로의 전환이 뚜렷하게 드러난 시기다. 초판본 열풍은 산문집으로 이어졌다. 김승옥, 전영택, 이상의 책이 ‘옛 느낌 그대로’ 출간됐고, 최근 해외 문학에까지 확장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경쟁이 심화되며 다른 출판사에서 같은 표지 디자인을 선보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지난 2월 영화 개봉과 함께 RHK와 더스토리는 ‘작은 아씨들’을 동시에 출간했는데, 둘 다 빨간색의 1868년 초판본 표지를 입혔다. 디자인은 같지만 결과는 달랐다. 영화에 초점을 맞춘 RHK의 ‘작은 아씨들’은 지금도 주요 서점가 20위 내에 들어가 있지만, 벨벳 소재를 강조했던 더스토리 버전은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마케팅에도 출판사별 차이가 있다. 유행을 주도하며 국내외 60여 종의 초판본을 출간해 온 더스토리는 표지 디자인의 ‘오리지널리티’에 집중한다. 강동균 더스토리 팀장은 “초판본 표지를 통해 독자들이 고전의 정체성을 느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세계문학전집 명가인 민음사는 초판본을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 표지로 내놓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꾸준히 반응이 좋다. 허주미 민음사 세계문학팀장은 “독자층이 탄탄한 스테디셀러의 표지가 화제에 오르고, 방송 등을 통해 회자되면서 고전 독서 욕구가 있던 잠재 독자들을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초판본 고전 소설의 주요 독자층은 20∼40대 여성들. 4월 셋째 주 기준으로 교보문고에서 초판본 ‘작은 아씨들’을 구매한 소비자의 79%는 여성이고, 이 중 약 70%가 20∼40대에 고르게 분포돼 있다. 인터파크에서도 4월 한 달간 초판본 ‘데미안’ 구매자의 75%가 여성이며, 이 중 87%가 20∼40대였다. 강 팀장은 “주요 타깃으로 삼은 독자층은 기존 고전을 읽는 30∼40대였는데 소장 욕구, SNS 과시 욕구 등과 맞아떨어지면서 20대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강 팀장은 “독자들이 인스타그램에 표지를 찍어 올리는 등 적극적으로 독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인기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초판본 열풍은 고전 읽기의 재발견, 수집, 소장 욕구의 발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아날로그적 취미 등으로 분석되면서 침체된 출판 시장에 새로운 활력으로도 평가받고 있지만 출판문화를 저해한다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이현우 서평가는 “고전이 작품이 아닌 상품이 됐다”며 “양질의 번역서 대신 예쁘게 포장된 책이 더 잘 팔린다는 측면에서 출판문화에 악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더스토리에서 최근 출간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세트’ 1577년 초판본을 예로 들었다. 이 책은 언뜻 1577년 오리지널 표지를 입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4대 비극에 모티프가 된 홀린셰드의 ‘연대기’ 표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서평가는 여기에는 “초판본 표지 마케팅에 집중하는 출판사만큼이나 서적 정보를 세심하게 걸러내지 못하는 서점 MD들의 책임도 크다”고 지적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문화닷컴 바로가기|문화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모바일 웹]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