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산차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던 대우자동차. 그 시작점엔 한 청년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를 이끈 선구자, 김창원이다.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돕던 그는 해방 직전 귀국해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꿈꿨다. 첫걸음은 농기구 공장. 그러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로 자동차 산업 활성화였다.

광복 후 기회가 찾아왔다. 조그마한 농기구 회사가 일본인이 놓고 간 조선리연합항공기 기재 회사를 손에 넣는다. 일본 군용차와 전투기 부속품을 만들던 회사다. 바로 간판을 한국리연공업사로 갈아치우고, 자동차 엔진 부품을 미군과 국방경비대(국군 창설 이전 군대)에 납품한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을 뗀 셈. 사업은 제법 성공 가도를 달렸다.
다행히 6·25 전쟁 포화도 비껴갔다. 휴전 후엔 본격적인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다. 부산에서 미군 정비 시설을 불하 받아 1955년 2월 신진공업사를 세운다. 공식적인 대우차 역사의 시작점이다. 여기에서 미군 군용 트럭을 되살린 재생 버스를 만들었다. 거의 모든 차가 부서진 전쟁 폐허 위에서 재생 버스는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다.

1962년엔 우리나라 대중교통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온갖 정비 공장에서 미군 폐차로 만든 재생 버스를 쏟아내던 그 시절, 신진공업은 현대식 정비 공장에서 만든 25인승 마이크로버스를 출시했다. 마이크로버스는 조잡한 재생차 사이에서 뛰어난 실용성으로 그야말로 붐을 일으켰다. 1966년까지 2,000대 넘는 판매고를 올렸을 정도. 이로써 신진공업사는 탄탄한 기반을 닦았고, 정부로부터 실력도 인정받는다.

한편, 1960년대 소형 버스의 주류를 이뤘던 마이크로버스는 국민들 사이에서 ‘노랑차’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던 까닭이다. 당시 남녀가 따로 앉던 8~16인승 재생차를 빠르게 대체하면서, 남녀가 섞어 앉는 문화를 정착시킨다. 마이크로버스 뒷자리에선 젊은 연인끼리 정담을 나누는 유행이 돌기도 했다.
승용차 산업 불씨를 당기다
마이크로버스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신진공업사. 1966년 새로운 기회를 포착한다. 비어있던 승용차 시장이다. 당시 1955년 등장한 재생차 시발은 1962년 닛산 블루버드 P310을 조립 판매한 새나라에 밀려 사라졌고, 새나라는 정권의 특혜와 군정의 정치자금 수단으로 쓰이는 등 의혹이 일면서 1963년 7월 문을 닫았다. 국산 승용차 시장은 사실상 골키퍼 없는 골대나 다름없었다.

신진공업사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부산 공장에서 금형도 없이 새나라를 본뜬 차체를 만들고, 중고 군용 엔진과 부품을 모아 1963년 11월 우리나라 두 번째 재생차, 신성호를 생산한다. 모조 재생 세단의 탄생이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각계 고위 인사들이 시승했고, 국민의 관심도 모았다. 그러나 손으로 직접 만든 신성호는 낮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새나라보다 2배나 비쌌다. 찾는 이는 드물었고, 1964년까지 겨우 318대를 만든 뒤 생산을 멈춘다.

신성호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신성호로 경험을 쌓은 신진공업사는 1965년 새나라자동차 부평공장을 인수한다. 이때부터 간판도 신진자동차공업으로 바꾼다. 우수한 현대식 공장을 손에 놓은 신진자동차는 이번엔 제대로 준비했다. 미쓰비시 콜트 100대를 조립생산해본 후 1966년 5월 토요타와 기술 협정을 맺고 신진 코로나를 선보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단 차가 좋았다. 현대적인 각진 스타일과 시속 145㎞까지 달릴 수 있는 성능은 재생차 접했던 소비자 눈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새나라처럼 단순한 조립생산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코로나의 21%를 국산 부품으로 채웠고, 나중엔 차체와 변속기 등 주요 부품마저 국산품으로 바꿨다.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 발전에 이바지했다.

시장도 본격적으로 키운다. 1966년 출시 첫해 3,600대로 시작해, 1968년 1만대 판매를 돌파하고, 1969년엔 1만3,000대로 정점을 찍었다. 코로나의 선전으로 자신감을 얻은 신진차는 크라운을 도입해 국내 고급차 시장을 열었다. 경제형 승용차 퍼블리카도 가져왔다. 게다가 가능성을 엿본 현대차와 아시아가 각각 포드 20M과 피아트 124를 들여오며 승용차 판을 본격적으로 키웠다. 이 중에서도 1972년까지 4만6,000여대 팔려나간 코로나는 우리나라 차 시장 성장을 주도한 견인차였다.(2부에서 계속)
글/윤지수(로드테스트 기자) 사진/쉐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