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위스키 발렌타인 17년·21년, 무엇을 마실 것인가

취화선 2020. 3. 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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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렌디드 위스키 발렌타인 17년./사진=홈페이지 캡처
[술이 술술 인생이 술술-153] 주류 매장 진열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술병들을 볼 때 나는 희열과 고통에 몸부림친다. 손에 닿을 듯 찰랑거리는 액체의 황홀함에 찬탄하다가 내 냉정한 주머니 사정을 깨닫고 가슴을 쥐어뜯는 일을 반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의 진귀한 술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헛된 망상이다. 현실은 지엄하다. 술꾼 대부분은 한정된 재화 안에서 기쁨을 극대화할 길을 찾아야만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은 블렌디드 위스키 발렌타인 17년을 손에 쥐었다. 100만원에 육박하는 발렌타인 30년은 언감생심이다. 발렌타인 21년은 조금 무리하면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내려놓고 말기가 대부분이다.

나는 발렌타인 21년을 먹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발렌타인 17년을 맛본다. 발렌타인 17년 또한 맛있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러면 왠지 서글플 것 같다.

잔에 따른 발렌타인 17년은 밝은 금빛이다. 발렌타인 21년은 짙은 캐러멜 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년간 오크통 안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냄새를 맡는다. 발렌타인 17년과 발렌타인 21년의 빛깔이 확연히 달랐던 것과 달리 냄새는 대동소이한 것 같다.

술을 머금는다. 첫 맛은 벌꿀처럼 달콤하고 질감은 우유처럼 크리미하다. 삼킨다. 목 넘김 직후 알코올의 기운이 날카롭게 올라온다. 이윽고 꿀, 향긋한 바닐라의 향기가 기분 좋게 비강을 감싼다. 코로 뜨거운 기운이 빠져나간다.

다음에는 매콤한 후추가 나타난다. 정신이 번쩍 난다. 화한 민트가 대미를 장식한다. 다양한 맛이 나지만, 조화를 무너뜨리는 맛이 없다. 과연 참으로 잘 만든 술이다.

온더록스로 맛본다. 발렌타인 17년이 얼음과 닿자 찌르는 듯한 향이 누그러진다. 마시기 편하다. 단맛이 은은하다. 스파이시함은 상당히 줄어든다. 쌉싸름한 피니시가 은근하면서도 끈질기게 지속된다. 발렌타인 17년은 스트레이트에서는 물론 온더록스에서도 뛰어나다.

그래서 발렌타인 17년이 발렌타인 21년보다 맛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21년은 진중하고 깊었다. 특히 그 부드러움은 발렌타인 17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슬프게도, 발렌타인 21년이 더 좋은 술인 것은 분명했다. 다만 그 차이가 아주 크지 않았다는 게 조금 위안이 될까.

그래도 발렌타인 17년에는 발렌타인 21년에는 없는 쨍하고 매콤한 매력이 있다. 집에 두고 혼자 마시기에는 발렌타인 17년으로도 차고 넘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발렌타인 12년도 매우 좋은 술이다.

발렌타인 17년의 재구매 의사기 있다. 대형마트에서 700㎖ 한 병에 약 10만원이다. 알코올 도수는 40도. 참고로 발렌타인 21년은 약 25만원이다.

사족이다. 애호가로서 위스키를 맥주에 타 먹는 문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술이 너무 아까웠다. 최근 지인은 발렌타인 21년을 들고 와서는 "말아 먹자"고 해서 나를 기함하게 했다. "이 좋은 술을…." 나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거푸 잔을 꺾으면서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술이다. 코로 먹든 입으로 먹든 저마다 좋아하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날 기분 좋게 발렌타인 21년 폭탄주를 마셨다. 다음날 숙취는 조금도 기분 좋지 않았지만.

[술 칼럼니스트 취화선/drunkenhwas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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