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가마솥에 누룽지

기자 2020. 5. 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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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은 '하늘(天)'과 '땅(地)'부터 시작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는 '가마솥에 누룽지'가 잇는다.

본래 '검을 현(玄)'과 '누를 황(黃)'이 이어지지만, 과거에는 '가믈 현' '누루 황'이라 하다 보니 짓궂은 학동이 훈장님 몰래 '가마솥에 누룽지'로 슬쩍 바꾼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누룽지'가 아닌 '눋힌밥'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가마솥의 누룽지를 모르는 후손들은 '누룽지'란 말마저 잊고 이리 부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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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은 ‘하늘(天)’과 ‘땅(地)’부터 시작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뒤는 ‘가마솥에 누룽지’가 잇는다. 본래 ‘검을 현(玄)’과 ‘누를 황(黃)’이 이어지지만, 과거에는 ‘가믈 현’ ‘누루 황’이라 하다 보니 짓궂은 학동이 훈장님 몰래 ‘가마솥에 누룽지’로 슬쩍 바꾼 것이다. 전기밥솥이 등장하면서 누룽지가 사라졌지만 ‘누룽지’란 말은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누룽지는 ‘끓인 밥’이나 ‘찐 밥’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중국이나 서양에서는 쌀에 물을 넉넉하게 잡아 한 차례 끓인 뒤 물을 따라내어 밥을 한다. 군대나 큰 식당에서는 불린 쌀에 증기를 올려 밥을 찐다. 그러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을 짓기 위해서는 물을 알맞게 잡고 한소끔 끓인 뒤 불을 줄여 다시 뜸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지은 밥을 다 푸고 불을 한번 살짝 더 때면 바삭하고 고소한 누룽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누룽지’와 ‘눌은밥’의 관계가 의심스럽다. 앞의 것은 과자처럼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뒤의 것은 물을 더 부어 끓여낸 것이다. 결국 기원이 같으니 말도 같아야 할 텐데 소리도 표기도 다르다. 당연히 ‘눋다’와 관련이 있는 말일 테니 ‘눌은밥’이 어법에 맞고 ‘누룽지’는 뭔가 이상하다. ‘눌은 지’에서 온 말이라고 해도 설명이 안 된다. 방언에서 ‘누룽갱이’라고도 하니 본디 ‘눌은 기’였을 것으로 추정하면 ‘ㄴ’이 왜 ‘ㅇ’으로 바뀌었는지가 설명된다.

이후 ‘기’가 ‘지’로 바뀌었다는 추론은 가능하나 ‘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추적이 안 되니 어원을 밝혀 적기보다는 소리대로 ‘누룽지’라 적는 것이다. 옛날의 누룽지는 밥을 짓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일부러 밥을 철판에 눋게 해서 만든다. 상황이 이러니 ‘누룽지’가 아닌 ‘눋힌밥’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가마솥의 누룽지를 모르는 후손들은 ‘누룽지’란 말마저 잊고 이리 부를지도 모른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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