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그 해는 유독 그랬다. 유망주가 풍년이었다. 투수도, 타자도 재목이 많았다. 특히나 포수 한 명이 발군이었다. 고교생이 4연타석 홈런을 쳤다. 바로 성남고의 박병호였다. LG가 일찌감치 점찍었다. 1차 지명(6월초)을 한 달 앞두고 발표가 났다. 3억3000만원에 계약했다는 내용이다.
휘문고 에이스 김명제도 화제였다. 두산이 모처럼 거액을 썼다. 알고보니 박병호보다 일찍 도장찍었다. 이른 봄에 얘기가 마무리된 것이다. 무려 6억원의 대우였다. 당시까지 최고액(7억원ㆍ김진우)에 버금가는 액수다.
4~5월 내내 시끌시끌했다. 이런 뉴스에 시장은 후끈 달았다. 1차 지명은 대강 윤곽이 잡혔다. 문제는 몇 주 뒤 2차 지명(6월30일)이다. 각 구단 스카우트 파트는 비상이다. 마지막 정보 수집에 안테나를 세웠다.
그런 와중이다. 관심주가 등장했다. 4월에 열린 춘계대학리그 때다. 단국대 투수 한 명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그 때도 임무는 마무리였다. 특이하게 5, 6회부터 등판한다. 그래서 압도적인 파워로 경기를 끝내버린다. 최고 150㎞를 달리는 스피드다. 3승을 올리며 팀을 우승시켰다. 우수투수상 수상자가 됐다. 바로 오승환이다.

선동열 "에이, 쟤는 아닌데"
스카우트들에 비상이 걸렸다. 여기저기 탐문이 시작됐다. 그 무렵이다. 묘한 소문이 돌았다. 요즘 같으면 '가짜 뉴스'로 불릴 얘기들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단국대 그 친구, 사실은 팔꿈치가 맛이 갔대. 수술 받아서 팔을 잘 구부리지도 못한다는데. 허리 때문에 고등학교 때도 고생했고. 조금만 던지면 아프다고 드러눕는대. 얼마 못 갈 거라는데….'
당시 강문길 단국대 감독의 회고다. "많이들 물어보더라. 승환이가 1학년 마치고 인대를 수술했다. 3학년이 돼서야 다시 공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힘이 붙은 건 4학년 봄(춘계리그) 때부터였다. 프로 팀에서 물어볼 때마다 내 대답은 똑같았다. '절대 괜찮다'였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를 못 봤기 때문이다. 내가 쫓아다니며 말려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도 (스카우트들이) 반신반의 하더라."
갑툭튀는 4월 활약 덕에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6월 세계대학선수권 멤버였다. 그 때 투수코치가 권영호 씨였다. 그 역시 비슷했다. "신인 지명 앞두고 LG 스카우트가 슬쩍 묻더라. 승환이 어떠냐고. 무조건 잡으라고 했다. 대표팀 나가서는 승환이 하고, (손)승락이 둘이서 다 던졌다. 그 때 공이 정말 좋았다."
구매 의사를 가진 팀 중에 삼성도 포함됐다. 실무자들이 적극적이었다. 팀 보강 계획도 불펜 강화였다. 하지만 역시 내부 반대가 만만치않았다. 현장(선수단)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다. 결국 선동열 투수코치가 나섰다. "직접 한번 보고 판단합시다." 며칠 뒤 동대문구장으로 출동했다. 공 몇 개 보더니 바로 답이 나왔다. "에이, 쟤는 아닌데." 한마디로 불합격이었다.

"팔꿈치 함 구부려봐라"
선동열 당시 코치의 기억이다. "팔꿈치 수술한 전력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 보자마자 '저런 폼으로 어떻게 공을 던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특이한 폼이었다. 키킹 동작도 이상하고, 몸도 딱딱해 보였다. 키도 작았다. 하여튼 좋은 점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스카우트 팀은 굽히지 않았다. 프런트 최고위층을 설득했다. 하지만 끝내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역시 팔꿈치였다. 급기야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실무자 이성근 과장이 당사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팔꿈치 함(한번) 구부려봐라. 어깨에 손이 닿나?" 사실상 메디컬 테스트였다. 팀 지정병원 외과의로부터 얻은 귀띔이다. '지금 공을 던지고 있으면 큰 문제는 없는 거다. 게다가 팔을 구부려 손이 어깨에 닿을 수 있다면 수술이 잘 된 것으로 봐야한다.'
돌부처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 보세요. 잘 닿는데요?" 해맑은 표정이었다.

2차 4순위까지 외면당한 파이널 보스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2차) 지명 순서다. 삼성은 5번째다. 앞에 4팀이 있다. 그들이 모두 다른 선수를 찍어야한다. 그래야 차례가 온다. 1번은 롯데다. 용마고 투수 조정훈을 지명했다. 그리고 다음 두산은 서동환이었다.
문제는 3번째다. LG는 오랜 기간 오승환을 관찰했다. 연고지(경기고-단국대) 투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얘기한대로다. 대표팀 권영호 코치의 자문도 구했다. 꽤 구체적으로 고려한 정황이다. 게다가 1차 지명도 타자(박병호)였다. 2차 1번은 투수로 가는 게 보편적이다. 그런데도 선택은 또다시 타자였다. '서울에 박병호가 있으면, 부산에는 정의윤이 있다.' 그렇게 소문난 슬러거다. 상대가 만루에서도 고의4구를 준 일화로 유명했다. 순간, 삼성은 쾌재를 불렀다.

조건은 고졸 유망주보다 아래였다(1억8000만원). 입단은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투구폼 문제를 지적했던 투수 코치(선동열)가 감독으로 승격됐다. "이상한 키킹이 계속 논란이었다. 이중 동작(반칙 투구)의 우려도 있었다. 1년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수정하기로 했다." (이성근 스카우트)
처음엔 엔트리 한 자리도 빠듯했다. "스프링캠프 때는 아무 생각없었다. 아무리 눈 씻고 봐도 내가 (1군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불펜에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았다. 그 때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한다는 마음 뿐이었다." (오승환)
첫 인상은 오래 가는 법이다. 동대문구장에서 볼 때는 '별로'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인사권자의 선입견은 사라졌다. "데리고 있으니까 왜 좋은 지 알겠더라. 그 폼에 그 정도 볼을 던지는 건 그만큼 본인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정말 착실하다. 시키지 않아도 본인이 스스로 찾아서 훈련한다. 자기관리가 굉장히 철저하다." 선동열 감독은 개막 엔트리에 합격점을 줬다.
초반은 마당쇠였다. 심지어 노예라고 부른 팬들도 있다. 부르면 나갔다. 추격조, 필승조에서 어느 틈에 마무리로 승진했다. 덕분에 희한한 기록도 남겼다. 승-세이브-홀드를 모두 두자리 숫자로 채운 것이다. 10승 16세이브 11홀드로 마쳤다. 아직까지도 KBO리그의 유일한 기록이다.
신인왕은 당연했다. 삼성 출신으로는 10년 만이다(1995년 이동수). 한국시리즈에서는 MVP까지 선정됐다. 이성근 과장을 비롯한 스카우트팀 4명에게는 특별 상여금 1000만원씩이 지급됐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대구 구장에는 다시 Lazenca Save Us(라젠카 세이브 어스)가 울려퍼지게 된다.

에필로그
이듬해 2차 드래프트를 앞둔 때다. 롯데의 한 관계자는 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지난해 오승환과 같은 로또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명에 임하겠다." 그러면서 첫번째 픽으로 광주일고 투수 나승현을 찍었다. 그리고 다음 순서인 한화가 인천 동산고 투수 류현진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