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타임머신 ⑱] 붉은 제국의 '킹', 케니 달글리시
(베스트 일레븐)
코로나19바이러스로 세계의 축구 시계가 멈춰 섰다. <베스트 일레븐(b11)>이 축구가 고픈 이들을 위해 새로운 연재물을 준비했다. 해외 클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레전드들을 소개하는 기획, 이름 하여 <레전드 타임머신>이다. 매주 화·목요일에 연재되는 <레전드 타임머신>을 통해 클럽을 이끌고 지탱해 온 여러 전설들의 이야기를 만끽하시라. 18번째 선수는 1980년대 리버풀의 황금같던 시기를 이끈 케니 달글리시다./ 편집자 주


히스토리(‘He’Story)
달글리시는 스코틀랜드 최대의 도시이자 스코틀랜드 축구의 중심지,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집은 레인저스의 홈구장, 아이브록스 스타디움 근처였기에 어린 달글리시는 자연스레 레인저스를 응원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운명이 참 얄궂다. 축구를 하던 달글리시의 재능을 레인저스의 가장 큰 라이벌, 셀틱이 알아본 것이다. 1967-1968시즌 셀틱에 입단한 달글리시는 바로 컴버너드 유나이티드로 임대를 떠나 37골을 기록했고, 이후 세 시즌 동안은 많은 출장을 기록하지 못한다. 그러나 20세였던 1971-1972시즌부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고, 셀틱 통산 322경기 167득점을 기록하며 대성한다.
리버풀의 페이즐리 감독은 함부르크로 떠난 케빈 키건의 대체자를 물색하고 있었고, 달글리시가 레이더망에 걸린다. 1977-1978시즌을 앞두고 당시 잉글랜드 역대 최고 이적료(44만 파운드·약 6억 7,300만 원)를 지불하며 달글리시를 데려오기에 이른다. 달글리시는 첫 시즌 모든 대회에서 31득점을 기록하며 산뜻하게 시작했다. 이후 골폭풍을 몰아치며 모든 대회에서 169골을 넣기에 이른다. 리버풀에서 뛴 13시즌 동안 풋볼 리그 6회 우승, 유러피언컵(現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 FA(영국축구협회)컵 1회 우승 등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1985년은 리버풀 역사에서 가장 아픈 해였다. 1984-1985시즌 벨기에 헤이젤 스타드 루아 보두앵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 얘기다. 리버풀과 유벤투스가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훌리건’으로 악명을 떨치던 리버풀 서포터들이 유벤투스 서포터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유벤투스 서포터와 일반 팬들은 출구쪽으로 도망가기 이르렀는데, 무게를 견디지 못한 벽이 무너지며 이 인파를 덮쳤다. 39명이 사망한 ‘헤이젤 참사’다. 리버풀은 이 사태에 대해 유럽 대항전 7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으며, 당시 감독이던 조 파간도 충격에 사임했다. 달글리시는 파간의 뒤를 이어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다 1991년 2월 사임했다.



왜 최고인가
달글리시는 이안 러시 밑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며 전성기를 누렸다. 중앙과 측면에서 폭넓게 뛰었고, 현재의 에당 아자르처럼 측면에서 드리블하며 중앙으로 이동해 감아 차는 슛을 자주 시도했다. 스피드와 드리블을 갖춘 전형적 ‘크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양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플레이를 펼쳤다. 포지션이 포지션인지라, 팀의 주 골잡이로 활약할 만큼 많은 골을 넣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리버풀에서 502경기에 출장해 169골을 기록하며 필요한 순간 득점을 해냈다.
리버풀의 핵심 멤버로 뛰며 유러피언컵 3회 우승을 차지한 점도 대단하다. 리버풀은 역사상 다섯 번의 유러피언컵(UCL 포함) 우승을 차지했는데, 달글리시는 그 중 3회 우승에 기여한 셈이다. 리버풀 팬이 그를 ‘킹’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다. 특히, 1983년에는 발롱도르 2위에 올랐고, 1982-1983시즌 PFA(프로축구선수노조)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하는 명예도 안았다.



영광의 순간
달글리시가 리버풀에서 집어넣은 수많은 골 중 가장 중요한 골이 이적 직후 시즌인 1977-1978시즌 터졌다. 바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넣은 결승골이다. 리버풀은 이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디나모 드레스덴·벤피카·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으며 결승전에 올랐다. 상대는 벨기에의 강호 클루브 브뤼헤였다. 달글리시는 후반 21분 라인을 깨고 들어가 칩샷을 날리며 결승골을 기록했다. 자신을 선택한 팀의 믿음에 곧바로 화답한 셈이었다. 달글리시는 첫 시즌 61경기에 출장해 31골을 넣으며 득점 기계로 군림했다.
1983-1984시즌은 달글리시의 기량이 완전히 무르익은 해였다. 모든 대회에서 12골을 넣어 득점은 그다지 많이 기록하지 못했지만, 유러피언컵을 다시 한 번 들어올렸다. 특히, 이 시즌에는 리그 우승까지 거둬 더블을 기록했다. 전반적으로 팀에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며 발롱도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발롱도르 수상자가 유벤투스에서 시쳇말로 ‘미친’ 활약을 펼치던 미셸 플라티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다.


영혼의 파트너
달글리시만큼 리버풀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남은 인물이 있다. 이안 러시다. 러시는 달글리시보다 위에서 직접 골문을 타격했던 전통적 스트라이커였다. 빼어난 패스나 상대를 쉽게 제칠 수 있는 테크닉은 없었지만, 이른바 골 냄새를 맡는 득점감각이 타고나 무수한 골을 기록했다. 그의 별명은 ‘유령’으로, 어느새 나타나 유유히 상대 골문을 가르곤 했다. 러시의 이런 스타일 덕에 달글리시와 공존도 가능했다. 플레이 메이커였던 달글리시와 득점에 특화된 러시, 마치 스티븐 제라드와 페르난도 토레스의 콤비가 생각나는 원조 콤비였다.
두 선수는 아홉 시즌을 함께 뛰며 도합 335골을 기록했다. 당시 리버풀은 리그와 유럽대항전에서 보인 위용 덕에 ‘붉은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리그 5회 우승·유러피언컵 2회 우승·FA(잉글랜드축구협회)컵 2회 우승 등 빼어난 업적을 거둔 것은 전방을 폭격하던 두 선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달글리시가 러시보다 10세 많았다는 점은 아쉽다. 함께 전성기를 보냈더라면 더블을 넘어 트레블도 가능했을 ‘붉은 제국’이었다.

글=조영훈 기자(younghcho@soccerbest1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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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꽃송이·김주희(www.bestelev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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