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의 도시산책>높은 神路 앞에서, 낮은 흙길을 걷는 이들을 생각하다




(13) 종묘
종묘제례 의식 위한 길 ‘신로’
돌로 만들어 되레 걷기 힘들어
바로옆 왕의 길 ‘어로’도 비슷
흙길로 내려서자 비로소 편안
세상 권위는 얼마나 부질없나
최고 승자는 세상떠난 왕 아닌
지금 이순간 살아있는 사람들
지구촌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공포에 빠져 있는 한낮. 입장객이 눈에 띄지 않는 종묘의 외대문으로 들어서자 신로(神路)가 앞에 놓인다. 지존들만의 길, 신로를 보자 내가 수직적 인간관계에 체질적 거부감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수직적 인간관계에서의 자명한 패배를 예감하고 일찌감치 떨어져나와 버린 나는, 과거를 반추하며 신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가만히 서 있는다.
맞은편에서 마스크를 쓴 일본인 여자 관광객들이 흙길을 밟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다가온다. 마스크를 쓴 그들과 마스크를 쓴 우리나라 사람들의 차이점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스크 때문에 지나치게 강해 보이는 눈빛으로 평소처럼 사람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그걸 의식하는지 눈빛을 조심한다.
신로는 종묘제례 등 의식을 위해 만든 길이다. 신로라고 하는 길은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옆으로 붙은 길은 약간 낮다. 신주와 향, 축이 들어가는 가운데가 신로이고, 나란히 붙은 동쪽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거칠고 넓적한 박석(두께가 얇고 넓적한 돌)과 전석(진흙, 모래, 석회 따위를 이겨 높은 온도에서 구운 건축재)으로 만들어졌다. 신로 양옆은 일본 관광객들이 걸어 나온 잘 다져놓은 평지의 흙길이다. 돌이 놓인 형태로 인해 보폭이 균일하게 조정되지 않아 신로에서는 걷기가 조금 불편하다. 그럼에도 나는 선택한 길을 고수한다.
정전과 영녕전에서는 ‘왕비열전’의 기억과 야사까지 더해지며 조선의 역사가 좀 꼬이기 시작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욕망으로 인한 모함과 질투와 의심과 협작.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웠던 권좌가 있었던가.
언젠가 나는 왕비를 둘 배출한 집안의 고택에 간 적이 있다. 그 집안에서 그런 이유로 딸들을 특히 귀하게 여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딸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들어가 봤을 때, 원경왕후와 소헌왕후가 떠올랐다. 외척 도륙으로 왕권에 힘을 실어주던 잔혹한 권력의 지도에 따른 신주와 신실을 찾는 걸음이 느려진다.
한 외국인 건축가가 ‘납작납작하고 길며, 몹시도 독특한 건축물’로 요약했다는 종묘. 이처럼 건물과 공간이 개성적이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하다. 영녕전 뒤 아스팔트가 깔린 길을 걸어 다시 출입문인 외대문을 향할 때 남미에서 왔다고 짐작되는 한 무리의 관광객과 마주친다. 그들 중 한 명의 손엔 아직 종묘 입장권이 들려 있다. 그걸 보자 입장할 때 머리를 스쳤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국내인에게 종묘 입장료는 천 원이다. 외국인에겐 그 반값인 오백 원이다. 외국에 거의 가보지 못했지만, 어쩌다 가봤던 나라에서 내가 외국인이라 더 비싸게 지불해야만 했던 관광지의 입장료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데, 푼돈인 천 원을 깎아 절반만 받아야 할 이유가 뭘까 하던 생각. 나는 우리 민족의 지나친 친절이 좀 거슬린다. 왠지 그것은 지나친 오만과 통할 것도 같다.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그 시기에 우리나라 인구가 좀 줄었다”고 말하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머물렀던 파리에서의 풍경이 생각난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우리나라의 경제를 생각해 마른 빵만 뜯어 먹다시피 지내던 내가 상가 앞에서 여러 번 들었던 “하나만 사주세요!”라던 말들. 나는 멀쩡해 보이는 이국의 젊은 남자들이 우리나라 말로 “하나만 사주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충격을 받곤 했다. 어떻게 그들은 그런 천박한 말을 알게 됐고, 버젓이 쓰게 됐던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먹혔기에 그토록 스스럼없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일까?
다시 신로 앞에 선 나는 이번엔 임금이 다니던 어로 위로 올라서 몇 걸음 걸어본다. 역시 바닥재로 쓴 돌들 때문에 도무지 걸음이 편하지 않다. 어로 위에 서서, 내가 온갖 권위를 부정하는 문학에 느꼈던 매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게 된다. 어느덧 나는 세상의 값진 권위를 인정하려 애쓰는 사람이 됐고, 쓸데없는 권위 앞에서는 젊었을 때보다 더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내곤 한다.
굳이 보행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있는 가운뎃길, 다시 말해 신로 위로 올라서진 않지만, 임금의 길에서 흙길로 내려서자 걸음이 편해진다. 내친김에 나는 가장 낮은 길을 살다 짧은 생을 마감한 전태일 동상이 있는 청계천으로 향한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가로질러가는 광장시장 일대는 개미 한 마리 눈에 띄지 않는다는 소문과는 달리 사람들이 꽤 있다.
청계천이 지금 상태로 막 개방됐을 때 나는 이따금 친구들과 멀게는 한강까지 걷곤 했다. 청계천에 누구보다 열광하며 이명박을 너무도 높게 평가했던 화가 친구는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가끔 승부욕이 누구보다 강했으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최고의 승자는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왕도 왕비도, 왕의 총애를 받았던 수많은 가인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 하나하나는, 아직은 삶이라는 단판 승부에서 이기고 있는 자들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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