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타임머신 ⑯] 피오렌티나 역대 '최고의 전설', 잔카를로 안토뇨니
(베스트 일레븐)
코로나19바이러스로 세계의 축구 시계가 멈춰 섰다. <베스트 일레븐(b11)>이 축구가 고픈 이들을 위해 새로운 연재물을 준비했다. 해외 클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레전드들을 소개하는 기획, 이름 하여 <레전드 타임머신>이다. 매주 화·목요일에 연재되는 <레전드 타임머신>을 통해 클럽을 이끌고 지탱해 온 여러 전설들의 이야기를 만끽하시라. 열여섯 번째 선수는 약체 피오렌티나를 꿋꿋이 지키며 클럽의 자존심으로 남은 잔카를로 안토뇨니다. / 편집자 주


히스토리(‘He’Story)
안토뇨니의 어릴 적 우상은 AC 밀란의 레전드, 잔니 리베라였다. 안토뇨니는 우아하게 필드 위를 질주하고 탁월한 기술을 뽐내던 리베라를 점점 닮아갔다. 으레 천재들이 그렇듯, 안토뇨니 역시 15세에 이탈리아 세리에 D(4부 리그) 아스티마코비에 입단해 단 두 시즌만을 보낸 후 피오렌티나의 눈에 들어왔다. 18세였던 안토뇨니는 피오렌티나 이적 후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차며 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 언론 코리엘레 델로 스포트는 당시 투스카나 상대로 데뷔전을 치른 안토뇨니를 “어린 리베라 같다”라고 극찬했다. 어린 시절 우상을 닮았다는 평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이런 안토뇨니가 클럽의 주장직을 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74-1975시즌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우승을 거둔 후, 안토뇨니는 완장을 차게 됐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이후 피오렌티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분명 우승에 근접했던 순간도 있었다. 바로 1981-1982시즌 유벤투스와 세리에 A 우승을 놓고 경쟁을 펼치던 순간이었다. 피오렌티나는 당시 단 2패만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시즌 막판 안토뇨니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문제가 발생했다. 심지어 우승 행방을 결정지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오심의 여지가 있는 판정으로 골 취소를 당하며 무승부를 거뒀다.
안토뇨니는 커리어를 보내던 중 유독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부상을 입었던 선수기도 하다. 1981년에는 상대 선수와 충돌해 두개골이 골절되며 부정맥이 발생했다. 당시 팀 닥터가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해 살 수 있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1984년에는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골절되며 1984-1985시즌을 통째로 날려야만 했다. 그러나, 안토뇨니는 늘 돌아와 비올라 군단을 이끌었다. 안토뇨니는 피오렌티나에서만 15시즌을 보냈다. 소화한 경기는 429경기, 득점은 72골이었다. 팬 4만 명이 보라색 깃발을 흔들며 스위스로 떠나는 안토뇨니를 배웅한 장면은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선수였는지 알려주는 대표적 장면이었다.


왜 최고인가
안토뇨니는 10번 자리에서도, 6번 자리에서도 모두 빼어난 활약을 펼쳤던 월드 클래스 미드필더였다. 광활한 시야와 패스 능력을 보유해 팀을 진두지휘했고, 박스 밖에서는 위협적 중거리슛과 스루패스를 날릴 줄 아는 예리한 칼날이었다. 잔니 리베라와 산드로 마촐라 등 위대한 선수들처럼 공만 잡으면 절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판타지스타’였다. 후방 플레이메이커로서 존재감도 대단했는데, 경기를 진두지휘하며 지배하는 그의 모습은 괴물 같았다.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안드레아 피를로 등으로 대표되는 레지스타 역할의 시초 격이었다.
피오렌티나 역사 전체를 논할 때도 안토뇨니의 이름은 빠질 수 없다. 피오렌티나 역대 출장 수 1위를 기록하며, 2위 마누엘 파스칼(356경기)를 멀리 따돌렸다. 현역 선수 중 10위권 안에 포진한 선수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뛰었으며, 말년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장했는데도 72골을 기록한 점도 놀랍다. 이는 피오렌티나 역대 4위에 해당한다. 1위가 피오렌티나의 또 다른 레전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203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안토뇨니의 득점력이 더 부각된다.


영광의 순간
피오렌티나가 유벤투스·AC 밀란·인터 밀란 같은 세리에 A의 거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4-1975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은 분명 안토뇨니에게도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피오렌티나는 결승전에서 에기디오 칼로니 등이 이끄는 AC 밀란을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기록했다. 피오렌티나는 이 대회 우승 이후 21년 동안 메이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약체 피오렌티나에게 중요한 우승이었다.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끈 1982 FIFA 스페인 월드컵도 안토뇨니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다. 이탈리아는 조별리그 세 경기에서 3무를 기록하며 빈공에 시달렸다. 더군다나 2차 조별리그에서 만난 팀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였다.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를 2-1로 꺾고, 브라질과 맞붙어야 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토니뇨 세레조·팔카오·지쿠·소크라테스 등의 ‘황금의 4중주’로 위세를 떨치던 팀이었기에 훨씬 어려운 상대였다. 이탈리아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브라질을 격침시켰으며 이 경기에서 안토뇨니도 맹활약을 펼쳤다. 이후 안토뇨니는 폴란드와 4강전에서 부상으로 결승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는 서독을 격침하며 우승을 거머줬다. 안토뇨니는 이 대회에서 중원을 지배하며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영혼의 파트너
축구는 균형의 스포츠다. 안토뇨니가 전방에서 상대를 휘젓는 동안 단단하게 수비를 지켰던 선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백 다니엘 파사레야다. 파사레야는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에서 우승 네 번을 거둔 후,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며 당대에 손꼽히는 남미 수비수로 떠올랐다. 신장은 작은 편이었지만, 파워풀한 수비로 상대를 휘어잡았다. 세트피스 능력도 뛰어났다. 피오렌티나 시절 무시무시했던 세리에 A 수비수들을 상대로 26골을 기록하며 골 넣는 수비수로서 활약했다.
파사레야는 1970~1980년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주장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마리오 켐페스·디에고 마라도나 등 슈퍼스타가 많았지만, 팀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겸비한 파사레야가 완장을 차고는 했다. 그러나 피오렌티나에서만큼은 안토뇨니를 보좌하며 후방의 사령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85-1986시즌에는 무려 15골을 넣으며 공격의 첨병 역할까지 한 건 덤이었다.

글=조영훈 기자(younghcho@soccerbest1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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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꽃송이·김주희(www.bestelev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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