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타임머신 ⓵ 1983년] 수퍼리그의 첫 번째 영웅 박윤기
(베스트 일레븐)
한창 뜨거워야 할 피치가 아직 차갑게 식어 있다. 코로나19가 이 땅의 모든 축구를 식힌 탓이다. 덩달아 우리들의 가슴도 달궈지지 않아 서늘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언제고 다시 뜨거워질 K리그를 기다리며, 과거 <베스트 일레븐(월간 축구)>이 전한 기사와 함께 지난 37번의 시즌을 돌아봤다. 큰 이슈부터 작은 기록까지 가능하면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당시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잡지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사진으로 옮겼다. 아직 숨죽이고 있는 K리그를 기다리는 데 ‘K리그 타임머신’이 작은 보탬이 됐으면 싶다. / 편집자 주

K리그의 시작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땅에 프로축구가 탄생한 배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늘어가는 민중의 불만을 완화·환기하기 위해 3S 정책을 폈는데, 그 3S 중 하나가 스포츠(Sports)였다. 하여 아마추어만 존재하던 야구와 축구를 차례로 프로화했고, 그 일환으로 탄생한 게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축구 리그인 ‘수퍼리그’다.
수퍼리그는 다섯 개 팀으로 시작했다. 다섯 팀 모두 프로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축구 구단으로 탄생한 할렐루야 독수리 그리고 뒤를 이은 유공 코끼리 등 두 팀만 프로였다. 나머지 세 팀, 포항제철 돌핀스·대우 로얄즈·국민은행 까치는 실업팀이었다. 이 세 팀은 향후 프로로 전환하기로 약속한 뒤 리그에 참가했고, 1983년 5월 8일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당시 수퍼리그는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를 치렀다. 지금과 같은 연고지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연고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할렐루야는 강원·충북·충남을 연고로 썼고, 유공은 서울·인천·경기를 홈으로 했다. 포항제철은 대구·경북, 국민은행은 전북·전남, 대우는 부산·경남을 연고지로 삼았다. 물론 이때 연고지는 그저 무늬에 불과했고, 제 기능을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프로축구는 첫해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평균 관중이 2만 924명이었으니, 지금의 두 배 넘는 평균 관중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 대우 축구단의 홈경기 평균 관중은 2만 1,743명이었는데, 당시 프로축구란 새로운 시스템에 열광하는 팬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엔 엄청난 경품(대우 축구단의 경우 자동차 등)을 내걸어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모으기도 했지만, 어쨌든 평균 관중 2만 명으로 출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83년 슈퍼리그는 아홉 개 도시는 순회하며 총 40경기를 치렀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대구·광주·대전·전주·춘천·마산·안동에서 대회가 열렸다. 대회 방식은 풀리그였는데, 순회 중인 도시에서 토요일과 일요일, 하루에 두 경기를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여 다섯 팀 중 최소 세 팀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거푸 경기를 하는 고충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대회에서는 요즘 흔히 사용하고 있는 ‘라운드’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 순회 중인 도시의 이름을 붙여 ‘시리즈’라 불렀다. 예컨대 안동에서 경기가 열리는 주말에는 ‘안동 시리즈’라고 명명한 것이다. 승점은 이기면 2점, 비기면 1점, 패하면 0점을 부여했다. 순위 선정 방식은 요즘과 같은 최다 승점 팀부터 내림차순이다.
초대 챔피언은 할렐루야가 차지했다. 할렐루야는 16경기를 치르는 동안 6승 8무 2패, 28득점 20실점(+8)으로 승점 20점을 얻어 1위를 차지했다. 당시 할렐루야는 박상인·오석재의 득점력과 박성화의 수비력을 잘 조합해 리그 정벌에 성공했다. 2위는 ‘컴퓨터 링커’로 불리던 조광래를 보유한 대우가 차지했으며, 유공이 3위 포철이 4위 국민은행이 5위에 올랐다.
1983년 슈퍼리그 최고 스타는 단연 박윤기였다. 유공의 공격수로 활약한 박윤기는 한국 프로축구 통산 두 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초대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14경기에 출전해 아홉 골을 넣었는데, 여덟 골을 넣은 대우 이춘석과 일곱 골을 넣은 포항 이길용 등을 제치고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MVP는 우승을 차지한 할렐루야의 박성화에게 돌아갔다. 1980년대 명품 센터백으로 명성을 날리던 박성화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수비력을 발산하며 첫 MVP의 영예를 안았다. 도움왕은 3년 뒤인 1986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역사상 첫 번째 월드컵 본선 골을 터트린 박창선(할렐루야)이 차지했다. 박창선은 15경기에서 여섯 개의 도움을 올리며 특급 도우미 역을 해냈다.
첫 시즌 베스트 11은 공격수 네 명, 미드필더 두 명, 수비수 네 명, 골키퍼 한 명으로 꾸려졌다. 요즘과 비교하면 공격수의 숫자가 많은데, 이는 이듬해인 1984년부터 공격수 세 명, 미드필더 세 명으로 조정된다.
1983시즌 베스트 11의 명단을 살피면 득점왕 박윤기가 눈에 띄고, 당시 헤더에 능했던 폭격기 김용세(유공)도 주목할 만하다. 김용세는 큰 키(192㎝)를 활용한 제공권에 강점을 보였던 선수로 당시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형의 선수였다. 미드필더 진용에는 만능 미드필더였던 박창선과 조광래(대우)가 위치했다. 조광래 현 대구 FC 사장은 프로축구 출범 초창기부터 발군의 실력으로 수퍼리그를 이끌었다.
네 명으로 구성된 수비진에는 MVP이자 철벽 방어를 선보였던 박성화를 필두로 김철수(포항제철)·장외룡(대우)·이강조(유공)가 차지했다. 이들 중에는 훗날 프로축구 감독으로도 맹활약한 장외룡 감독과 이강조 감독의 이름이 익숙하다. 시즌 최고 골키퍼에는 1980년대 맹활약한 조병득(할렐루야)이 선정됐다. 마지막으로 감독상은 할렐루야를 우승으로 이끈 명 골키퍼 출신 지도자 함흥철 감독이 선정됐다.


글=손병하 기자(bluekorea@soccerbest11.co.kr)
사진=베스트 일레븐 DB
그래픽=박꽃송이(www.bestelev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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