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는 평준화 고교의 '춘추전국시대'

윤호우 선임기자 2020. 5. 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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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1대 국회는 고교 평준화 국회’ 비평준화 세대 명문고 출신 다선 의원들 대거 불출마, 낙천·낙선

오는 5월 30일 개원하는 21대 국회는 첫 ‘고교 평준화 세대 국회’로 부를 수 있다. 비평준화 세대인 명문고 출신 국회의원들이 대거 불출마 또는 낙천·낙선된 반면, 평준화 세대의 졸업생이 지난 4·15 총선에서 많이 당선됐기 때문이다.

비평준화 세대의 명문고 출신 의원은 20대 국회에서 대부분 다선으로, 정치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 의원이 정치의 뒷무대로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명문고 중심 정치’가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그동안 고등학교라는 1차적인 학연이 지연과 결부돼 한국정치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공유했으나, 21대 국회에서는 학연을 떠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치적 토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과거 유명 정치인을 배출했던 명문고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학교는 경기고다. 18대 국회에서 18명, 19대 국회에서 17명, 20대 국회에서 13명의 경기고 출신 의원들이 활동했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3명의 당선인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20대 총선에서는 오제세·진영·이종걸·민병두·김성수 민주당 의원, 이주영·이종구·정우택·김종석 새누리당 의원, 이상돈·오세정 국민의당 의원, 노회찬 정의당 의원, 안상수 무소속 의원이 금배지를 달았다. 대부분 각 정당에서 다선 중진급 의원이었다. 이주영·이종걸 의원은 5선, 진영·오제세·정우택 의원은 4선, 이종구·노회찬·민병두·안상수 의원은 3선이었다. 정우택·이종걸 의원은 원내대표를 역임했고, 이주영 의원은 20대 국회 후반기에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4월 15일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당 선거상황실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종합상황판에 당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고, 20대 13명에서 21대 3명으로 줄어

하지만 이들은 모두 21대 국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경기고로서는 한국 정치사에서 20대 국회가 마지막 전성기를 누린 국회가 된 셈이다. 진영·김성수·김종석·이상돈 의원은 불출마했다. 이주영·오제세·민병두·이종걸 의원은 낙천했고, 이종구·정우택·안상수 의원은 낙선했다.

비평준화 시대 때 경기고는 1년에 4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울대로 진학했다. 당시 ‘K1’으로 불렸다. 이때 졸업한 정치인으로는 이회창·고건·정운찬·이홍구 전 총리, 손학규 전 통합민주당 대표, 조순 전 서울시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박찬종 전 의원,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유인태·정대철·노회찬 전 의원 등이다. 한국 정치사에 획을 그은 쟁쟁한 인물들이 경기고를 졸업했다.

20대 국회에서 활동한 13명의 경기고 출신 의원 중 민병두 의원만이 평준화 세대에 속했다. 민 의원은 1974년 고교에 입학한 평준화 첫 세대(경기고 73회)였다. 이들 세대를 ‘뺑뺑이 세대’라고 불렀다. 경기고 비평준화 세대의 마지막 기수는 경기고 72회 졸업생이다. 이런 점에서 72회 졸업생인 이종걸 의원은 경기고 출신 국회의원의 상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이 의원은 1973년 경기고에 입학해 1976년 졸업했다. 2000년 16대 국회에 새천년민주당 의원으로 당선돼 20대 국회까지 지역구인 경기 안양 만안에서 내리 5선을 했다. 이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당내 후보 경선에서 탈락했다. 19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원내대표로 활약했다. 이 의원은 “처음 국회에 왔을 때 경기고 출신 의원 모임이 있었다”면서 “민주당이 10명 정도, 한나라당이 10명 정도해서 20여 명의 의원이 왔다”고 회고했다. 이 의원은 “예전에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하는 명문고가 있었고, 국회 역시 온갖 경쟁력을 뚫고 각 지역에서 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명문고 출신 의원이 많았다”면서 “20대 국회에서 활동했던 경기고 출신 의원들이 21대 국회에 한 명도 가지 못한 것을 보면 ‘(명문고 출신의) 한 시대가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경기고 비평준화의 마지막 세대인 경기고 72회는 정치권에서도 특별했다. 20대 국회에서 이종걸 의원과 노회찬 의원이 활동했다.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역시 경기고 72회 졸업생이다. 황 전 대표는 2019년 초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의 대표가 되고, 차기 대권주자로 발돋움했지만, 이번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해 낙선했다.

새롭게 국회에 들어온 경기고 출신 의원 중 두 명은 초선이다. 유상범 당선인(강원 홍천·횡성·영월·평창, 미래통합당)과 조태용 비례 당선인(미래한국당)이 국회에 첫 입성한다. 박진 당선인(서울 강남을·미래통합당)은 20대 국회에서는 활동하지 못했지만 4선으로 21대 국회에 복귀했다. 이들 중 1966년생인 유 당선인은 평준화 세대에 속한다.

서울고는 당선인 한 명도 배출 못해

경기고 다음의 명문고로 꼽혔던 서울고는 21대 국회에서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에는 4명의 장관이 동시에 임명될 정도로 서울고는 경기고 못지않은 인재를 배출했다. 20대 국회에서 보궐선거에 당선돼 활동하던 최재성 민주당 의원이 서울 송파을 선거에서 낙선했다.

비평준화 시대에 서울의 4대 명문고였던 경복고와 용산고 역시 21대 국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경복고에서는 비평준화 때 졸업한 문희상 국회의장과 원혜영·김진표 민주당 의원 등이 있었지만 문 의장과 원 의원은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했다. 중진 가운데 김진표 의원이 21대 총선에서 5선으로 당선됐다. 용산고에서는 이해찬 민주당 대표와 신상진 미래통합당 의원 등이 20대 국회에서 활약했다. 이 대표는 불출마했고, 신 의원은 낙선했다. 20대 국회에서 서울의 명문고로 분류됐던 중동고는 김무성·강석호·박명재 미래통합당 의원과 윤후덕 민주당 의원 등 6명의 의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김무성·강석호·박명재 의원은 불출마했다.

21대 총선에서 서울의 명문고 출신이 힘을 쓰지 못했던 것처럼 지방의 각 명문고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데 그쳤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문고 출신 정치인 시대가 뒤로 물러난 반면, 고교 평준화 시대의 정치인들이 국회에 대거 진출했다.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지 46년 이후에야 21대 국회에서 완전한 ‘고교 평준화’가 이뤄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배출한 경남고는 한때 ‘부산 정치의 메카’로 불렸다. 20대 국회에서 중진으로 활약한 여상규·박맹우·정갑윤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출마하지 않았다. 20대 국회에서는 6명이었지만 21대 국회에서는 4명(서병수·조경태·하영제·박성중 당선인)으로 줄어들었다.

부산고에서는 4선이었던 김정훈 의원이 출마하지 않았고, 산업통상부 장관을 역임한 윤상직 의원 역시 불출마했다. 결국 부산고에서는 한 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전통의 경남고·부산고의 독식이 주춤하면서 여러 고등학교가 이 몫을 나눠가졌다.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신문인 <부산일보>에서는 ‘특정 학교에 대한 쏠림이 없는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모습’이라고 총선 결과를 표현했다.

대구·경북(TK)에서도 마찬가지로 경북고의 위상 하락이 두드러졌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과 유승민 미래통합당 의원 같은 대선주자급 정치인들이 21대 국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0대 총선에 당선된 최교일·정종섭·곽대훈 미래통합당 의원 역시 21대 국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권칠승 민주당 의원과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송언석 통합당 의원이 21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두 의원은 모두 평준화 세대에 속한다. 비평준화의 마지막 졸업기수인 김희국 전 의원(경북고 58회)이 이번 총선에서 당선됐고, 그 전 기수인 류성걸 전 의원(경북고 57회)이 당선됐다. 당선인은 모두 4명이다. 경북고 출신 당선인이 줄어든 반면, 여러 고등학교에서 골고루 당선인이 나왔다. TK 정치에서도 명실공히 고교 평준화가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TK에서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경북고 출신 정치인들이 이곳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경북고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시절에는 김윤환·강재섭 전 의원 등 경북고 출신들이 보수 정당 내에서 경북고를 중심으로 계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15대 국회 18명, 16대 16명, 17대 15명이었다가 18대 10명, 19대 6명, 20대 6명으로 점차 줄어들었다. 대구 지역의 한 인사는 “옛날이야 경북고 출신들이 서로 밀고당겨줬다. 경북고를 나오지 않으면 TK에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고 말했다.

대전고는 20대 국회에서 7명의 의원을 배출하면서 경기고 다음의 학맥을 자랑했다. 하지만 21대 총선에서 이장우·정용기·김용태 통합당 의원이 낙선하면서 3명(박병석·이명수·윤창현)으로 줄어들었다.

전성기 경기고의 화동 옛 교사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북고·대전고·전주고 등도 위상 하락

전주고에서는 정동영·유성엽 의원 등 쟁쟁한 중진의원들이 정치의 뒷무대로 사라졌다. 하지만 20대 국회 6명에서 21대 국회 6명으로 과거 명문고의 위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민주당 소병훈·이상직·윤준병·양기대·김성주 당선인과 이용호 무소속 당선인 등이 전주고 출신이다. 광주일고는 21대 총선에서 3명(이낙연·이병훈·소병철 민주당 당선인)으로 줄어들었지만 차기 유력한 대권주자인 이낙연 전 총리의 당선으로 과거 전통 명문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대도시에서는 197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가 실시됐지만, 그때 평준화되지 않았던 중소 도시의 명문고는 이번 총선에서 이름을 알렸다. 전남 순천고는 김태년 민주당 의원(4선)을 비롯해 6명의 당선인을 배출했다. 경남 마산고 역시 설훈 민주당 의원(5선)을 비롯해 5명의 당선인이 나왔다.

전통 명문고가 사라진 뒤 그 명성은 서서히 특목고로 옮겨갔다. 1984년 개교한 대원외고가 대표적이다. 대원외고 출신으로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이번 총선에서 재선으로 당선됐다. 더불어시민당 신현영 비례 당선인이 서울 과학고 출신이다. 졸업 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특목고 출신 졸업생들이 국회에 다수가 입성하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1대 국회 당선인의 연령별 현황을 보면 60대 이상은 전체 300명 중 72명(지역구 당선인 62명, 비례 당선인 10명)에 불과하다. 서울·부산 지역 고교 평준화가 1974년에 실시된 점을 감안하면, 비평준화 세대 정치인들은 하나둘 정치의 뒷무대로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정치문화도 다소 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장성철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 연구소장은 “좋게 말하면 정치적 낭만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밀실야합이었던 과거의 정치문화는 이제 여의도에서 없어졌다”면서 “이런 문화의 여러 가지 바탕 중 하나가 고등학교 학연이었다”고 말했다. 장 소장은 “국회에서 어느 순간 선배 기수에 대한 존중 문화가 없어지고 극한 대결만 남았다”며 “21대 국회에서는 세 싸움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여야 협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명문고 출신 정치문화가 사라진 뒤의 새로운 정치문화에 대한 기대감도 표출되고 있다. 이준한 교수는 “국회에서 혈연·지연 같은 집단적 관계 대신 소셜미디어(SNS)로 연결되는 개인적 관계가 늘게 될 것”이라면서 “이참에 새롭게 형성되는 정치 문화가 정치발전의 디딤돌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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