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웅의 고지도이야기 92] 불교계 세계지도 '남섬부주만국장과지도'
글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부회장 2020. 4. 20. 10:17

수미산須彌山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는 상상의 산으로, 그 높이는 자그마치 8만 유순由旬(1由旬 약 10km)에 달하고, 구산팔해九山八海에 둘러싸여 있다. 구산팔해의 가장 바깥쪽 산이 철위산鐵圍山인데, 그 바깥에는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동승신주東勝身洲ㆍ서우화주西牛貨洲ㆍ남섬부주南贍部洲ㆍ북구로주北俱盧洲 의 4개 대륙이 있어 이 가운데 남섬부주가 인간이 거주하는 땅이다.
1710년 나니와시浪華子가 목판으로 제작한 일본 최초의 불교계 세계지도인 ‘남섬부주만국장과지도南瞻部州萬國掌菓之圖’는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전佛典에 믿음을 두고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한적漢籍을 근본으로 하여 불교적 세계에 있는 티끌처럼 작은 나라들을 한데 모으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입해 장과掌菓, 즉 손바닥 위의 과일과 같이 가없는 세계를 낱낱이 볼 수 있도록 만든 지도이다.
제작자는 에도시대 중기 화엄종華嚴宗 부흥에 힘쓴 학승 소슌僧濬으로 법명은 호탄鳳潭이고, 나니와시는 그의 필명이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화엄사華嚴寺에서 호탄에게 사사한 가쿠슈覺洲가 1764년에 집필한 화엄춘추華嚴春秋에 나오는 <호탄연보鳳潭年譜>에 따르면 그는 오사카大阪 출신으로 1659년에 태어나 1738년에 작고했다.
‘남섬부주만국장과지도’는 목판 단색 지도로, 크기는 가로 143cm, 세로 115cm로 판목 1판에 제작할 수 없어 횡으로 4판을 판각板刻해 각 판마다 3장씩 인본印本해서 연접한 지도이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태는 고대 인도의 불전 <구사론倶舎論>에서 말하는 북쪽은 넓고, 남쪽은 좁은 부채꼴(⌔)로 상단 중앙에 지도제목이 있고, 제목 옆에는 지도를 제작할 때 참고한 문헌과 지도 등이 나열되어 있다. 지도 하단 좌우측에는 호탄의 발문과 판권이 적혀 있다.
호탄이 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참고한 자료는 주제별로 총 102가지에 달하는데, 장아함경長阿含經ㆍ능야경楞倻經ㆍ구사론俱舍論 등의 불교경전을 비롯해 서역전西域傳, 불조통기佛祖統紀, 사기史記ㆍ전한서前漢書ㆍ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사서, 방여승람方輿勝覽ㆍ만국도지萬國圖志 등 지리지, 삼재도회三才圖繪ㆍ도서편圖書編 등 백과전서, 그리고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신화적 지리서와 부상국도扶桑國圖ㆍ홍모국도紅毛國圖ㆍ고려도高麗圖와 같은 지도 등이다.
‘남섬부주만국장과지도’ 제작에 참조한 기본적인 지리정보는 1269년 남송의 지반志磐이 편찬한 불교사서인 <불조통기>로, 이 책 권31ㆍ32에는 화장세계도華藏世界圖를 비롯한 구산팔해도九山八海圖ㆍ대천세계도大千三界圖ㆍ서역제국도西域諸國圖 등 불교계 지도와 지지가 수록돼 있다. 수미산의 아득한 남쪽에 인간이 거주하는 땅인 남섬부주는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염부閻浮·Jambu’라는 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염부주閻浮洲 또는 섬부주贍部洲라고도 부르며, 그 땅은 부채꼴로 가로 너비가 7만 유순(약 70만km)에 이른다고 한다.
지도에 그려진 범위는 북쪽은 고비사막 너머 몽고蒙古까지이고. 남쪽은 인도 남부, 동쪽은 아메리카, 서쪽은 유럽이다. 지도의 중앙부는 천축天竺, 즉 인도가 자리하고, 그 동쪽에 중국과 조선, 일본 등이 있다. 아메리카亜黒利加가 일본 남쪽에 섬으로 표현되고, 유럽은 인도 북동쪽으로 여러 나라가 10여 개의 섬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은 반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지명은 조선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마한 등 국명과 평안도ㆍ강원도ㆍ충청도 등 도명이 표기되어 있다. 섬으로 표시된 청주淸州는 제주濟州의 오기인 것 같고, 부산은 부산해釜山海로 표기되고, 강원도 동쪽에는 18세기까지 일본에서 조선을 일컫던 ‘한당韓唐’도 표기되어 있다.
남섬부주의 중심에 나선형으로 그려진 아누달지阿耨達池는 히말라야를 가리키는 설산雪山 북쪽에 있는 못으로, ‘무열뇌지無熱惱池’라고도 부른다. 못의 중심에는 소ㆍ코끼리ㆍ말ㆍ사자의 주둥이에서 인간 세계를 기름지게 하는 4대강이 흘러 나가고 있는데, 소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인더스강이고, 코끼리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펀자브 지방을 지나는 수틀레지강, 말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갠지스강, 사자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브라마푸트라강이다.
일본 남쪽에 그려진 섬 모양의 땅은 아메리카대륙으로, 아메리카亜黒利加가 표기되고 브라질伯西児ㆍ페루孛露 등의 나라명이 표기되어 있다. 그 외 금가서랍金加西蠟은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Giulio Aleni가 1623년에 한역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카스티야Castilla, 즉 콜럼비아에 해당된다. 조선에서 후금이라 일컬었던 흑한黑漢과 신라 동쪽에 있었다는 장인국長人國이 표기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일본 가나문자와 한자로 표기되었는데, 터키トルコㆍ이탈리아イタリヤㆍ프랑스スランサㆍ영국インケレスㆍ스코틀랜드スコシヤㆍ헝가리ウムカリㆍ알바니아アルハニヤ등과 네덜란드阿蘭陀, 紅毛 등이 표기되어 있고, 그밖에 북아메리카를 가리키는 히리타니야ヒリタニヤ가 표기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인도 서쪽에 작은 섬으로 그려지고, ‘서녀국西女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남섬부주만국장과지도’가 간행된 이후 1744년에는 ‘남염부제제국집람지도南閣浮提諸國集覧之圖’가 간행되고, 에도 말기에는 만국장과지도萬国掌菓之圖라는 간이판이 간행되었으며, 1821년에 불교계 우주도를 도해한 세계대상도世界大相圖, 유럽의 세계지도를 전용해 섬부주의 형태로 그린 염부제제도부일궁도閣浮提圖附日宮圖, 불국토 천축을 그린 천축여지도天竺輿地圖 등 150년 가까이 많은 변형판이 간행되면서 서민들의 중요한 세계 인식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1876년明治 9 6월 22일 정령政令으로 수미산설須弥山説이 금지되면서 불교계 세계지도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람의 행위에 한이 없듯이 세계도 역시 끝이 없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혜안으로 보면 대천세계大千世界도 손 안의 망고菴羅菓와 같다. 무수한 4천하가 벌판의 냉이와 같아도 다만 염부제의 모양은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고, 그것도 창고 안에 한 알의 좁쌀 같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범부는 동굴 안에서는 불과 한치 앞을 못 본다.”
지도 발문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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