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를 일본으로 옮겨라!

이문영 2016. 9. 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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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 한국사-11] 광개토대왕비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비석이다. 우선 높이가 6.39m로 우리나라 비석 중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건립 연대가 414년으로 삼국의 비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 비석과 관련한 음모론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가장 황당한 것부터 이야기해보자면 현재 중국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가짜라는 주장이 있다.

 근거 사진으로 제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금 광개토대왕비는 위조된 것이라는 증거로 사용된 광개토대왕비 사진.
분명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광개토대왕비와는 달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광개토대왕비의 사진.

 그런데 비밀을 알고 나면 허망하다. 위 사진은 광개토대왕비의 좌측면이다. 보통 2면이라고 부르는 쪽 사진이다. 일반적으로 잘 안 찍는 쪽이라서 본 사람들이 적은 것뿐이다. 이런 사진을 제시하고 '광개토대왕비는 가짜예요'라고 말하면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다행히 이런 이야기는 너무 황당한 데다가 금방 증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때의 해프닝으로 그쳤다. 불행히도 아직도 광개토대왕비가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는 등의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압록강 너머에 있는 이 큰 비석의 존재는 용비어천가에도 나온다. 다만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인지 몰랐을 뿐이다. 북한산 위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도 신라왕의 것인지 몰랐던 것처럼.

 그런데 근대에 와서 이 비를 발견한 사람이 일본의 밀정 포병 대위 사코 가케아키(酒勾景信)였기 때문에 비문 위조설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사코는 비문을 탁본해서 육군참모본부에 가져갔다.

 비문은 비교적 빨리 해독되어 다음해인 1884년 아오에 슈(靑江秀)가 '동부여 영락대왕 비명 해(解)'라는 책을,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고구려 고비 고(考)'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1889년에는 요코이 다다나오의 연구를 바탕으로 비문과 해석이 '회여록(會余錄)' 제5집에 실렸다. 앞의 두 책은 간행되지 않았으나 회여록은 광개토대왕 비문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신묘년(391년) 조의 기사다. 위조라는 주장도 이 기사 때문에 나온 것이다. 왜가 신라·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비문에 나와 있다. 하지만 비문의 내용을 잘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대왕이 병신년(396년)부터 기해년(399년)까지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년)에는 신라를 도와 임나가라를 정벌했으며, 갑진년(404년)에는 다시 백제와 손을 잡은 왜를 격멸하였다는 내용이 신묘년 조 다음에 적혀 있다. 신묘년 조가 사실이라고 해도 비문이 결국 이야기하는 것은 일본의 대패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군의 패배, 그것도 대패가 기록된 비석이다. 오늘날 한·중·일 학계는 모두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허풍이 들어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상대가 막강해야 쳐부순 맛이 난다는 거다.

 일본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을 했다. 이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일본은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북쪽 세력과 싸워왔다는 것이 시라토리의 생각이었다. 그 점을 광개토대왕비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라토리가 그 비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가져가려 한 것이 아니다. 그가 1905년 8월에 쓴 '만주지명담 호태왕 비문에 대하여'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다만 이 비문에는 일본에 재미없는 것이 적혀 있다. 사실 일본은 고구려에 졌던 것 같다. 고구려에 패하고부터 일본의 세력이 떨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일본이 대륙의 전쟁에서 패했다면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러시아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07년에 일본 군부에 이야기해서 비석을 옮기려고 했다. 다행히도 이 계획은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대체 자랑스럽지도 않은 이 비석을 왜 일본에 가져가려 했을까? 그가 1907년에 한 강연 내용을 보면 답이 나온다.

 "일본의 패배를 적은 비를 내가 가지고 오자고 말하면 어쩌면 재미없는 일을 말하는 자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처럼 패한 것을 있는 그대로 우리 후세에 알린다면 자손의 앞날에 비상한 인상을 주어 분개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패한 결과를 알게 하는 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를 일본에 가져가려고 한 이유는 그 비에 적힌 패배를 보고 일본 국민이 분발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시라토리는 패배를 직시하여 분발하자고 했지만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도 등장한다. 견수사로 중국 수나라를 다녀오던 일본 사신 미나미부치 쇼안(南淵請安)이 귀국하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그 전문을 적어온 책이 남연서라는 것이다. 남연서에 따르면 왜는 고구려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결국은 패배했다는 열등감이 위서를 낳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위서 '환단고기' 역시 마찬가지의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6년에 북한에 돌아가 화제가 되었던 북관대첩비도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옮겨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정문부(鄭文孚)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무찌른 전공을 기록한 비석이다. 왜 이 비석을 야스쿠니 신사에 세운 것일까? 자신들 조상의 치명적인 패배를 기록한 비석을. 이 비석을 약탈해 간 것이 1905년, 러일전쟁 기간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북방 세력에 지면 안 된다는 반성의 표시로 옮겨간 것이다. 패배도 분발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 당시 일본의 정서였다.

 이런 생각은 조급해지면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한다. 파리를 불태우려 한 나치의 마지막 광기라든가, 일제 말기에 우리 유적을 파괴하려한 행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장에게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이라는 명령을 하달하는데, 이것은 항일 기록이 있는 고비들을 폭파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행해졌다. 일례를 들자면 남원의 황산대첩비가 이때 부서졌다. 지금은 복원해 놓았다. 이런 일은 그야말로 광기에 사로잡혔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패망의 징조라고 할 수 있겠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시라토리 관련 대목은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박경희 역, 삼인, 2001'를 참조했다.)

[이문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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