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사는 남편.. 한 번쯤 제 말 좀 들어줄 수 없나요

2016. 10. 6. 04: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세상 모든 결혼은 이미 두 번째 결혼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우리의 첫 결혼은 부모님의 결혼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딸들은 소녀 시절에 목격한 부모님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 듯합니다. 그저 목격만 했을까요? 엄마의 입장에서 상처받고, 답답해하고, 때론 진저리를 내기도 했겠지요. 부모님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와는 다른 남자를 찾는 딸들…. 그러나 행복도 불행도, 남자도 여자도, 한쪽 면만 보아서는 모르는 법입니다. 남편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를 통해 남편을 이해하는 지혜는 세월과 함께 찾아들겠지요.

홍여사 드림

어느새 엄마 키보다 더 큰 십 대의 제 딸을 바라보면서, 저는 문득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몸은 저렇게 다 자랐는데 정신연령은 아직 어린아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더구나 아이는 자기가 어른들 뺨치게 약은 줄 아네요.

하긴 저도 그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의 제 눈으로 보면 천진한 아이일 뿐인데, 그 당시에는 제가 세상 이치를 다 꿴 줄 알았습니다. 특히 엄마를 바라볼 때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답답할까?

저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엄마라면, 남편의 무능함과 대책 없음에 일평생 휘둘려,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죠. 아니, 애초에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무턱대고 결혼하지도 않을 터였습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저에게는 '남자'를 보는 기준이 확고히 서 버렸습니다. 남자는 무조건 능력이 있고, 경제관념이 있고, 현실적인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 아버지와는 반대되는 남자여야 한다!

저에게 남자는 두 종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 같은 남자, 아니면 아버지와는 다른 남자. 대학 다니는 동안 저는 외모가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조차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말이 없고, 행동이 느린 사람은 다 결격이었지요. 자연히 다부진 체격에 행동이 기민하고, 가무잡잡한 사람만 눈에 들어오더군요. 결국 저는 그런 사람과 결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언제나 무슨 일로 바쁘고, 손재주가 좋고,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스타일.

그런데 이상형을 찾은 게 저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기막히게도 제 여동생 또한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남자를 찾아냈다는 겁니다. 성실근면하고, 차돌같이 다부진 남자. 사람들은 제 신랑과 제부를 두고 마치 형제처럼 닮았다 합니다. 친정 엄마 또한 아들 형제 같은 두 사위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배우자와 20여 년 살아본 지금, 저는 조금씩 딴소리를 하게 됩니다. 성실한 남편 덕에 걱정 없이 먹고사는 줄은 알지만, 인생이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게 되네요. 남편은 내일, 내일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남편에게는 언제나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부부의 노후 계획이 있고, 자녀 교육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물론 매사에 계획이 있는 남자이기에 믿고 따를 수 있겠지요. 문제는 자신의 계획에 이롭지 않은 것들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행을 가서도 남편은 앞장서 걸으며 재촉합니다. 앞만 보고 걷는 남편에게는 분위기 독특한 상점이나, 뜻밖에 마주친 재미있는 거리 풍경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커피 좋아하는 제가 카페를 찾아내면 남편은 날쌘 다람쥐처럼 어디론가 뛰어가 자판기 커피를 빼옵니다. 신혼 때에는 그런 것도 다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답답한 마음이 쌓여가네요. 여행이라고 가서도 돈 절약, 시간 절약할 궁리만 하는 남편. 아내와 멋진 시간을 나누기보다는, 커피 찾고, 뭐 찾는 아내의 입을 얼른얼른 틀어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남편.

커피 얘기 하다 보니 떠오르는 일이 있네요. 그날도 남편은 저를 위해 자판기 커피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등 뒤에서 가만 보니 400원짜리 고급 커피가 아니라 300원짜리 일반 커피를 뽑더군요. 픽 하고 코웃음이 났습니다. 남편에겐 당연한 일이겠죠. 300원짜리 놔두고 400원짜리 먹는 인간은 셈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그 순간 서운한 생각이 확 올라오더군요. 마누라에게 자판기 커피 한 잔도 최고급으로 못 사주나? 그 일로 제가 시비를 걸었고, 남편도 황당해하며 맞불을 놓더군요. 두 잔 뽑아서 맛을 비교해 보라더군요. 결단코 아무 차이도 없다고요.

그 일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런 사소한 일 백 가지로 저희 부부는 서로에게 눈을 흘기곤 합니다. 내 인생의 해결책인 줄 알았던 남자의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남편 역시 혼란스럽겠죠. 좋은 마음으로 잘해주려고 해도 아내가 마뜩잖아 하니까요. 나 혼자 잘 살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남편이 자주 하는 말입니다.

저는 요즘 미안한 마음으로 반성을 많이 합니다. 첫째는 우리 친정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에요. 아버지는 비록 무능력하고 비현실적이었지만, 사람 기분은 잘 알아주는 분이셨어요. 엄마 속을 태울 땐 태우더라도, 한마디 말로 살맛 나게 해주시던 분이셨다는 걸 어린 시절의 저는 잘 몰랐습니다. 지금 보면 저희 부모님이 저희 부부보다 더 금실이 좋으시다는 게 그 증거겠죠.

그리고 저는 남편에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쪼들린 생활이지만, 남편 덕에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않고 산다는 사실을 저는 왜 자꾸 잊을까요? 인생의 한쪽 면, 남편이라는 인간의 한 면만 보고 덜컥 선택해놓고 이제 와서 저는 왜 자꾸 상대방 탓을 할까요?

제 안에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느낍니다. 대책 없이 분위기만 찾는 허황한 성격. 그런 아내와 살아가느라 고생이 많은 남편에게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가끔은 내일이 아닌 오늘 이 자리, 바로 옆의 사람 마음에 집중해준다면 당신은 정말 완벽한 남자라고요.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독자의견 댓글 troom.travel.chosun.com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