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의 세계] (6) 샐러드 본고장 시칠리아..다양한 문명 속 뿌리내린 '채소 요리'
[경향신문] ㆍ대규모 상업 생산보다 ‘나만의 씨앗’ 자부심 살려 전통 계승
ㆍ시칠리아의 채소밭

“일단 맛을 봐요.”
피에렐리사 리초(47)는 보랏빛 동그란 양파를 토막 내더니 한 조각 집어 입 안에 넣어줬다. 향긋하고 은은한 단맛이 퍼졌다. 그의 주방엔 여러 종류의 양파가 있었다. 보랏빛 길쭉한 양파는 시칠리아 카타니아산, 보랏빛이 좀 더 진한 것은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 칼라브리아에서 온 거라고 했다.

“보기엔 비슷해도 맛과 식감이 조금씩 달라요. 카타니아 것은 아삭함이 덜하고 칼라브리아산은 알싸한 맛이 강하죠.”
리초의 초대를 받아 시칠리아 중부 고원지대 엔나(Enna)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9월2일이었다.
이탈리아 통신 ANSA 기자이자 요리 연구가인 그는 “시칠리아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요리가 있는데 그 요리에 어울리는 재료를 쓰는 것이 맛의 핵심”이라며 “가지요리인 ‘파르미지아나 디 멜란자네’에 곁들일 맛있는 샐러드를 위해선 엔나 부근 바라프랑카 마을에서 재배된 양파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주방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치뽈라 디 엔나’, 즉 엔나산(産) 양파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강조했다.
■‘장화 끝’ 미식의 고장
전날 시칠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 마살루치아에서 만난 마리아 마우제리(68)가 만들어 준 ‘인살라타 디 파지올리니’는 그린빈과 감자, 삶은 달걀로 만든 샐러드다. 소스로 뿌려 먹을 요량으로 발사믹을 달라고 하자 마우제리는 “그건 시칠리아 것이 아니다”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대신 그는 시칠리아산 적포도주로 만든 아체토를 건넸다. 또 찬장을 열고는 에트나 화산 근처에서만 자라는 사과로 만든 잼, 시칠리아식 양배추의 일종인 카볼로를 섞어 구운 빵 따위를 식탁 위에 올려놓더니 “시칠리아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권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식과 농산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에트나산 자락의 밀로에서 ‘레 카세 델 메를로’라는 아그리투리스모(농가숙박업소)를 찾았을 때 주인 스텔라 폰티는 토마토 소스로 사용한 최고급 품종 산 마르자노가 다른 토마토와 어떻게 다른지 한참을 설명했다. 시칠리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카타니아의 번화가 코르소 이탈리아에 자리 잡은 한 카페에서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자 젊은 종업원은 “제대로 된 시칠리아 오렌지를 맛보려면 겨울에 와야 한다”면서 “지금 있는 오렌지들은 시칠리아산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에서 온 것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이다. 생활이고 실존이며 삶이며 영혼이다. 이탈리아 식문화를 집대성한 책 <이탈리아 사람들은 왜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에서 엘레나 코스튜코비치가 언급했듯이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더라도 음식으로 귀결되기 일쑤다. 그 애착은 농업과 식문화가 발달한 남부로 갈수록 훨씬 커진다.
시칠리아가 맛의 고향이 된 데는 독특한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시칠리아는 그리스 이후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만, 스페인 등 지중해 패권을 차지한 세력들이 잇달아 지배했고, 긴 세월 동안 문명의 용광로가 됐다. 카타니아 중심가의 두오모(대성당) 내부를 보면 기단은 그리스식, 기둥은 노르만식, 천장 장식은 스페인 로코코식이다. 수백년의 시차를 두고 여러 시대가 한 공간에 중첩돼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카타니아대학에서 그리스 철학과 문학을 가르치는 마테오 미아노는 “그리스 시대에 포도주와 치즈가 들어왔고 로마 시대에는 엄청난 양의 밀을 재배하며 제국의 곡창지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비잔틴 시대에는 재료에 속을 채워 만드는 요리법이 전해졌다. 아랍의 지배기는 시칠리아 식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오렌지와 설탕, 쌀, 가지, 후추, 계피 등이 시칠리아에 들어왔고 이탈리아 음식의 대명사가 된 파스타, 리조토의 원형도 이때 전파됐다. 노르만족은 다양한 고기 요리법을 전수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토마토와 옥수수를 가져왔다. 세계에서 몰려든 식재료는 이곳을 발판 삼아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고대 로마부터 시작된 샐러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요리는 피자와 파스타다. 이민자들과 함께 세계로 진출한 피자와 파스타는 가장 글로벌화한 이탈리아 메뉴다. 하지만 이보다 수세기 앞섰던 것이 샐러드다. 경제지 ‘일 솔레 24 오레’에서 음식·문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는 “날 채소에 기름이나 식초 따위로 간을 해서 먹는 샐러드는 고대 로마부터 시작돼 세계로 전파된 요리”라면서 “이미 중세 유럽에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요리로 평가됐다”고 밝혔다.
요즘 우리 식탁에도 많이 올라오는 로메인 상추는 ‘라투가 로마나’, 즉 로마 상추라는 뜻이다. 마르초 마뇨는 <맛의 천재>라는 저서에서 “샐러드는 르네상스 시대에 계층에 상관없이 많은 이들의 식탁에 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면서 “루콜라, 펜넬, 아티초크, 꽃양배추 등이 이미 이때도 등장했던 채소”라고 썼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도 <훌륭한 식사 습관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이탈리아 덕분에 생으로 먹는 음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했다.
시칠리아에서 찾아가 본 집들은 하나같이 빠지지 않고 샐러드를 내놨다. 경제지표만 보면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하고, 웬만한 관광지에서조차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섬이지만 인심 하나만은 넉넉하고 푸짐했다. 단골 식료품 가게에서 브로콜리나 카볼로, 시칠리아식 호박 줄기인 테네루미를 사와 샐러드를 만들어 주기도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온 이방인을 위해 바질과 토마토, 상추를 텃밭에서 뽑아오기도 했다.
엔나 외곽의 가족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프란치스코는 “한국에서는 바질이 꽤 비싸기 때문에 자주 사먹을 수 없다”고 하자 바질을 한아름 뜯어 안겨줬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양념이라곤 소금과 식초, 후추, 올리브유가 고작인데도 신선하고 싱그러운 감칠맛이 났다. 이오니아해가 내려다보이는 마스칼리의 작은 농장에서 만난 농부 알베르토(60)는 오레가노와 비트, 브로콜리, 루콜라 잎을 따더니 맛보라고 건네면서 “이곳의 햇빛과 땅의 맛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기행>에서 “시칠리아가 없다면 이탈리아는 영혼에 아무런 잔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던 괴테는 이곳에서 맛본 샐러드에 대해 “연하고 맛이 있어 마치 우유 같으며 야채는 고급이다”라고 썼다.
■양배추와 브로콜리의 고향
요즘은 우리 식탁에도 샐러드가 오르지만 전통적으로 우리가 생야채를 먹는 방법은 쌈의 형태였다. 예전엔 쌈 채소는 상추나 깻잎, 호박잎 정도였으나 지금은 로메인, 치커리, 케일, 라디키오도 꽤 익숙해졌다. 루콜라나 바질과 같은 허브를 베란다 텃밭이나 화분에 키우는 집도 많다. 최근에는 ‘먹방’ 바람을 타고 아티초크나 펜넬, 딜, 엔다이브 같은 생경한 이름의 채소들도 밥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시아종묘 류경오 회장은 1990년대 초반부터 당시만 해도 생소하던 채소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보급해왔다. 다양한 채소가 발달한 시칠리아를 비롯해 지중해 일대를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는 그는 “우리 입맛에 맞을 만한 고기능성 채소를 찾는 데 주력했다”면서 “초기엔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웰빙 바람을 타고 쌈밥집, 채식전문점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국내에 재배 농가도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천혜의 기후조건은 이 지역에 여러 씨앗을 선물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채소로 꼽히는 양배추를 비롯해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케일의 원산지가 시칠리아다. 동부 타오르미나 바닷가 절벽에는 이 채소들의 야생종인 브라시카 올레라케아(Brassica oleracea)가 자란다. 이런 야생종은 자연상태에서 진화하고 농부들에 의해 재배되면서 재래종(랜드레이스), 즉 토종 종자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인 종자회사들은 이런 토종 종자나 야생종의 유전형질을 개선해 생산성과 기능성을 높인 종자를 개발한다. 몇년 전 영국 연구진이 개발한 슈퍼 브로콜리 ‘베네포테’는 일반 브로콜리보다 항암효과가 훨씬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품종이다.
다른 지역에 원산지를 둔 채소임에도 오히려 이곳이 본거지로 여겨질 만큼 뿌리내리며 번성한 것도 있다. 겨울이면 이탈리아인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아티초크가 대표적이다. 아티초크 재배가 시작된 곳은 중동이다. 아랍인들에 의해 시칠리아로 전해졌고 15세기에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발간된 요리책에는 아티초크를 날것으로, 혹은 익혀 먹는 방법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곳에서 채소가 번성한 것은 단지 기후조건과 요리법 때문만은 아니다. 신토불이 농산물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도 한몫했다. 카타니아대학 원예학과 페르디난도 브랑카 교수는 “시칠리아에는 유독 각 지역이나 농가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재래종이 많다”면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채소류의 4분의 1은 소규모 농가에서 재래 종자로 재배한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화산 지대 검은 땅의 채소 농장
시칠리아 남동부 라구사 일대가 상업적 농장이 집약돼 있는 곳이라면 에트나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농업도시 아드라노는 소규모 농가가 밀집한 곳이다. 에트나산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으로, 지금도 조금씩 용암을 흘려보내고 있다. 산 정상에는 늘 연기가 자욱하다. 큰 폭발로 주변 도시를 용암과 화산재로 뒤덮을 만큼 재앙을 끼쳤던 적도 있었지만 미네랄이 풍부한 비옥한 토양과 풍성한 생태환경이라는 선물도 줬다.

아드라노는 검은 화산토양이 많은 곳이라 채소와 과일이 잘 자란다. 곳곳에 올리브와 오렌지, 포도밭이 있었고 길 양쪽엔 시칠리아 선인장의 일종인 ‘피치딘디아’(fichi d’india)가 늘어서 있었다. 이 선인장에 열리는 노란색 열매는 골드키위와 배를 섞어놓은 듯 달콤하고 시원했다.

아드라노에서 가장 큰 농장 중의 하나인 ‘일 도로 치뇨’를 찾아갔다. 가지, 상추 수확이 한창이었다. 비닐하우스엔 올겨울에 수확할 펜넬 모종이 촘촘히 심어져 있었다. 비닐하우스와 마주 본 밭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브로콜리였다. 한국에서 보던 브로콜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농장주 알프레도 카루소는 “몇년 전 해외 수출 계약을 맺은 뒤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일본 사카타가 판매하는 하이브리드 종자를 심었다”면서 “시칠리아 재래종이 수확량은 적지만 맛은 더 좋다”고 말했다.
사카타는 브로콜리 등 몇몇 작물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종자회사다. 국내 브로콜리 농가도 거의 대부분 사카타의 종자를 수입해 쓴다. 카루소의 농장에서 자라는 채소 중 브로콜리를 제외하고는 다 재래종이다. 그는 “시칠리아 사람들은 모양을 보고서도 미묘한 맛의 차이를 잘 안다”면서 “이 때문에 농부들마다 자신의 씨앗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눈치오 스피탈레리의 밭은 카루소의 농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2㏊ 규모의 작은 경작지에는 바질과 상추, 가지, 브로콜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모두 시칠리아 재래 품종”이라고 소개한 그는 “대규모 납품을 위한 상업적 생산을 할 것인지, 전통적인 맛을 내는 우리 품종을 생산할 것인지 판단과 필요에 따라 선택을 하겠지만 이곳에서는 후자를 선택하는 농부들이 많다”고 말했다.
■“내 이름이 곧 브랜드”

피아자 카를로 알베르토는 카타니아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매일 아침 8시에 문을 열어 오후 1시면 문을 닫는다. 길 양편으로 늘어선 점포 외에 곳곳에 채소, 과일, 치즈가 놓인 ‘방코’(banco)도 있다. 작은 테이블을 뜻하는 방코는 영세 상인이나 텃밭에서 소규모로 농사를 지어 직접 내다 팔러온 농민들이 주로 운영한다. 코업이나 심플리 같은 대형마트와 비교할 때 채소의 신선도도 좋고 값도 훨씬 싸다. 웬만한 채소는 한 바구니, 혹은 1㎏에 1유로 정도다.
진열된 채소 사이엔 비닐이나 작은 스티로폼 박스로 포장돼 있는 것들도 있었다. 포장된 아이스베르그 상추를 들여다보니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쓰여 있다. 채소가게 주인 살바토레는 “여기서 파는 것들은 대부분 근처에서 수확하는 것들”이라며 “수입품은 모두 포장이 돼 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드라노에서 작은 밭을 일구는 루치오는 매일 아침 양파와 민트, 호박 따위를 차에 싣고 시장으로 나온다. 그는 “내가 키우는 호박을 사기 위해 매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면서 “비록 작은 방코에 불과하지만 내 이름이 브랜드인 셈”이라고 말했다. 실비오가 파는 그린빈은 모양에 따라 값이 좀 달랐다. 길이가 길고 색깔이 연한 것은 한 바구니에 1.5유로, 길이가 짧고 색깔이 진한 것은 3유로였다. 아드라노에서 왔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린빈은 마스칼리에서 난 것이 훨씬 맛이 좋다”면서 “색깔이 짙은 것은 야생에서 자란 거라 귀하다”고 자랑했다.
엄마와 B&B 숙소를 운영하는 알레시아나(30)는 거의 매일 아침 시장을 찾는다. 실비오에게서 그린빈을 산 뒤 버섯 한 묶음, 상추 한 다발, 그리고 예닐곱개의 큼직한 복숭아를 사서 천 가방에 담았다. 그는 “모두 합해 5유로도 안된다”면서 “아침마다 투숙객들에게 내놓는 시칠리아식 건강 샐러드가 우리 집의 자랑”이라고 소개했다.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다. 도시 남동쪽 산안토니오 부두의 공용 주차장 앞에는 식사와 음료, 간식거리를 파는 작은 카페가 있다. 간판은 없지만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버스 기사와 여행가이드들에게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다. 파스타와 야채 샐러드, 야채로 속을 채운 시라쿠사 스타일의 빵 ‘임파나타’가 주메뉴다. 식당 주인 엔초 벨루아르도는 시 외곽에 있는 3.5㏊ 규모의 밭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품종의 파프리카와 토마토, 주키니, 상추를 키운다. 아침마다 그날 먹을 분량의 채소를 카페로 가져 오면 아내 카르멜라 스쿠델리는 좁은 부엌에서 한번에 서너가지 메뉴를 뚝딱 만들어낸다. 독일 관광객 가이드로 활동하는 주제페 브루노(47)는 “거의 매주 이곳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면서 “시내에는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화려한 식당들이 꽤 있지만 시칠리아의 맛을 제대로 내는 곳은 찾기 힘들다”고 귀띔했다.
■슬로푸드 운동으로 전통을 지킨다
맥도널드가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그 흔한 스타벅스도 아직 진출하지 못했을 정도로 식문화에 관한 한 이탈리아인들은 보수적이다. 보수성의 정도가 더한 시칠리아에서는 최근 몇년 새 관광객이 늘어나고 외국의 식문화가 밀려들자 고민이 커지고 있다. 여기서도 젊은 세대는 패스트푸드를 즐기고 대형마트들은 상권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카타니아 외곽에 있는 대형마트 코업에는 잘 씻어 포장한 샐러드용 채소가 제법 큰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슬로푸드 운동을 해 온 마리우스 로시는 “포장지에 이탈리아산이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공장에서 나오는 가공식품 같은 채소를 누가 살까 생각했는데 꾸준히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먹거리를 지키려는 이들이 고민을 나누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통로는 지역 축제들이다. 시칠리아 곳곳에서는 늘 크고 작은 농산물 축제가 열린다. 특히 8월 말부터 11월까지 에트나산 주변 마을에서는 와인, 올리브, 돼지고기, 양파, 피스타치오, 치즈 등 품목별로 주말마다 축제가 이어진다. 자기 지역에서 난 농산물과 전통 먹거리를 사고파는 장이 서고, 남녀노소가 모여 이웃·세대간 연대의식을 높인다.

9월4일 밀로의 중앙광장 ‘코뮨 디 밀로’에서는 비니밀로(와인축제)가 열렸다. 오전에는 지역 농업전문가와 농민, 시민단체, 공무원, 대학교수, 정치인, 언론인들이 모여 시칠리아 농산물과 전통음식을 보호하고 활성화할 방안을 놓고 공개 회의를 열었다. 일요일 오전 9시30분부터 모여든 사람들은 2시간 넘게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질문을 이어갔다. 저녁에 열린 직거래 장터는 가족 단위로 몰려온 주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광장에서 전시·판매된 농산물은 슬로푸드 협회가 ‘프레시디오’로 지정한 것들이었다. 이는 ‘맛의 보루’라는 뜻으로, 지역 고유 농산물이나 전 음식들을 지정해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라르도 산토가 수확한 누에콩, 주세페 리 로시가 구운 옥수수 쿠키, 베아트리체와 시어머니가 함께 만들어 온 피스타치오 스프레드, 로나르도 다비데가 키운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조5000억원 vs 600억원

특히 인기가 많았던 것은 시칠리아 남동쪽 노토에서 카르딜로가 가져온 자라타나 양파였다. 자라타나 지역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이 양파는 멜론만 한 크기와 달콤한 맛을 자랑한다.
브랑카 교수는 “이곳이 원산지인 품종이 많아 유전자원이 풍부한 데다, 농가들이 오랫동안 저마다의 입맛과 방식으로 선택하고 재배해왔기 때문에 다양성과 고유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자원들의 품질을 높이고 계승하는 것이 그의 연구 과제다.
한국의 농가에서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재래품종을 찾기가 쉽지 않다. 토착 품종의 중요성에 일찍 눈뜨지 못했던 데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상당수의 유전자원이 소실됐다. 충남대 원예학과 임용표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우리 재래종의 유전 정보를 대거 수집했고, 미국 역시 한반도가 원산지인 대두 재래종의 유전정보를 확보했다”면서 “일본과 미국이 이를 토대로 개량·개발한 종자나 작물에 오히려 우리가 의존하는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청양고추나 참외 등 전통적인 작물에서 재래품종을 토대로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으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런 원천 기술을 가진 국내 종자회사들 상당수가 외국 기업에 팔렸다. 이 때문에 우리가 늘 먹는 채소를 키우려면 외국 종자회사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 현재 세계 종자시장은 몬샌토나 신젠타, 사카타 등 10대 메이저 회사들이 70% 이상 장악했다. 이들은 유전자원과 신품종 개발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으며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완주 의원이 농촌진흥청에서 받아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 10년 동안 한국이 해외에 지급한 종자 관련 로열티는 1457억원에 이른다. 임 교수는 “종자자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정부에서도 대책을 찾고 있지만 미국 몬샌토 한 곳만 해도 연간 연구개발비가 1조5000억원에 이르는데 국내 연간 예산은 600억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구정은 박경은 이인숙 정환보 남지원 이재덕 기자
취재지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카타니아·엔나 | 글·사진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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