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순례기ㅣ안성 서운산] 단풍, 가을의 '만트라'
단풍은 안개 속에서 태어난다. ‘아직’ 따스한 낮과 ‘벌써’ 싸늘한 밤의 성격 차이는 이혼의 씨앗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야 하는 그들이지만 마침내 가을 아침 안개 속에서 한 이불을 덮고 단풍을 낳는다. 그래서 가을은 붉다.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붉어진다. 산보다 먼저 달아오른다. 설악산이 채 물들기도 전에 고속도로는 이미 사람들의 색으로 가득 채워진다.
![[월간산]서운산 남쪽, 금북정맥 동쪽 기슭의 단풍.](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2424fytr.jpg)
사람들은 왜 단풍을 보며 열광할까? 색체 심리학이나 컬러 테라피 이론을 보면, 붉은색은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한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뇌의 자극이 특정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본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본능, 감정, 이성의 총합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닌가.
단풍철이 되면 왜 사람들은 길을 나설까. 단풍을 즐기는 시간보다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기꺼이 차량 정체의 대열에 선다. ‘뇌’의 흥분 이상의 행동 유발 인자는 무엇일까.
아침 안개를 가르며 서운산(瑞雲山·547.4m)을 향해 차를 몰았다. 서운산에는 이름 그대로 ‘상서로운 구름’이 드리우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고속도로는 몇 차례 서행을 요구했다. 휴게소에는 나와 같은 행색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서운산은 단풍으로 유명한 산이 아니다. 높은 산 축에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평택평야(안성평야)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호령하듯 굽어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넉넉한 눈길로 평택, 안성, 천안 일대를 굽어본다. 한남정맥과 한남금북정맥을 나누는 금북정맥의 북쪽 상단에 자리했다. 이 산줄기는 안성, 천안, 아산, 예산, 홍성, 서산의 남쪽 울타리를 이루며 태안반도의 서단까지 부드럽게 출렁이며 흐른다.
서운산의 남북 끝자락에는 고찰이 깃들어 있다. 북쪽에는 석남사, 남쪽에는 청룡사다. 두 절은 서운산을 오르는 산행 기점이기도 하다. 석남사 쪽보다는 청룡사에서 오르는 길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좌성사와 은적암, 탕흉대, 서운산성뿐 아니라 청룡사를 근거지로 한 남사당의 전설적 인물인 바우덕이도 한 몫을 한다. 청룡사에서 은적암을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족 산행지로 ‘안성맞춤’이다.
![[월간산]금북정맥 등성마루에서 만난 단풍나무. 하늘을 대신한 안개 속에서 붉게 익어 간다.](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2623bjoq.jpg)
청룡사는 서운산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청룡사는 본디 1265년에 명본대사가 대장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암자였다. 이후 1364년에 나옹 스님이 중창을 하면서 청룡사로 거듭났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나옹 스님이 이 절을 크게 일으킬 때 푸른 용이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고 산 이름도 서운산이 되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시를 지은 나옹 스님은 무학 스님의 스승이기도 하다.
![[월간산]서운산 남쪽 자락의 청룡사. 안성 남사당의 근거지였다.](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2807umgt.jpg)
청룡사는 남사당의 근거지로 널리 알려진 절이다. 남사당이 처음 결성된 때는 조선 숙종(1661~1720)대인데, 남사당이 처음 결성된 곳이 청룡사 옆 불당골이라고 전해 온다. 청룡사에서 보증한 신표를 지니고 전국을 돌며 남사당놀이판을 벌였다고 한다. 남사당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바우덕이의 전설적인 삶 덕분일 것이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바우덕이는 5세에 남사당에 들어와 15세에 무리를 이끄는 ‘꼭두쇠’가 되었고, 22세 때 폐병으로 짧을 생을 마감했다. 바우덕이는 최초이자 최후의 남사당 여성 꼭두쇠로 천민의 기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전설이 되었다.
강원도 심산의 원시림 못지않게 숲이 좋은 산
서운산은 숲이 좋은 산이다. 강원도 심산의 원시림 못지않다. 그런데 청룡사에서 곧장 올라서는 그 숲의 진수를 느낄 수 없다. 금북정맥의 등성마루를 걸어 봐야 한다. 나는 그 길을 택했다.
청룡사 동쪽의 작은 골짜기로 들었다. 불당골이다. 골짜기의 초입에 바우덕이 사당이 있다. 사당 앞 작은 계곡 가에 억새꽃이 하늘거리며 안개 속에서 가을빛을 발라낸다. 눈길로 그 빛을 어루만지며 금북정맥의 서쪽 기슭에 붙는다. 인적은 희미하지만 오래전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 발길을 이끈다.
![[월간산]불당골의 억새꽃.](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2977yzfv.jpg)
껑충한 졸참나무는 아직 푸르지만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의 붉은색에 기꺼이 자리를 내어 준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서어나무는 이른 봄의 연둣빛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노랑과 주황으로 변해가는 개옻나무 잎은 연록으로 변한 참나무 숲에 꽃처럼 걸렸다.
참나무 잎이 갈색을 띠기 시작한다. 금북정맥 등성마루다. 하늘과 맞닿은 산책길은 숲 위에 떠있는 것 같다. 이제 곧 절정을 이룰 단풍 때가 오면 고운 저녁노을 빛으로 황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때를 기약할 마음이 없다. 지금 당장 좋다. 아름다운 숲이다. 다시 내가 이 산을 찾는다면 반드시 그때는 새봄일 것이다.
며칠 전 아침 동네 숲을 같이 산책할 때 문득 아내가 물었다.
“우리들의 나이는 계절의 어디쯤에 해당할까?”
내가 “지금쯤이 아닐까”하고 대답할 때, 스산한 웃음이 따라 나왔다. 그 웃음은 분명 이 계절의 안개를 닮았다. 체념과 아쉬움, 약간의 두려움과 담담함이 혼재했다. 내 삶의 시간은 모호했다.
붉은 단풍은 분명 황홀감을 유발한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다. 지난해도 그랬고 내년이라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또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단풍이 드는 계절의 한 정점에서야, 반복 없이는 경이로움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풍의 붉음에 이끌리는 마음의 깊은 곳에는 ‘숭고한 의식과 같은 반복’에 대한 경외감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월간산]첫 단풍은 시간의 프리즘이다.](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3251ithy.jpg)
드문드문 단풍은 줄곧 시선을 하늘로 이끌었다. 어느덧 내 시선이 하늘과 포개진다. 서쪽으로 펼쳐지는 안성 시가지와 평야는 안개 속에 흐릿하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반복의 경이로움을 알지 못하면 일상의 성스러움은 흐릿해진다.
자연은 불완전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전체
은적암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듬뿍 해를 안고 가는 그 숲길의 나무들은 단단히 붉어간다. 그들은 지금, 그리고 내년에 또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아는 것 같다. 덧없고 무상한 날들이 사실은 성스러운 시간이라는 것을. 내 삶의 시간은 아직 흐릿하다. 하지만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야말로 ‘공경’해야 할 시간인 것은 알겠다.
신라시대에 창건됐다는 은적암의 현재 이름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3일간 은거하며 기도했다 하여 유래한 것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안내판에는 또 ‘암자 앞의 감로수는 치료 효험이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암자는 거의 허물어졌다. 암자 뒤의 말라 죽은 거대한 참나무가 쓰러지면서 암자 한 귀퉁이를 덮쳤기 때문이다. 무엇이 과연 효험인가. 똑같은 날들이 오고 가는 동안, 폐허가 된 이곳은 다시 숲으로 되살아나든지 새로운 암자로 바뀌든지 할 것이다.
![[월간산]단풍은 햇빛으로 새긴 지상의 별이다.](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3508yifl.jpg)
자연은 불완전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전체다. 그 완벽은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낮과 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으로. 하여 단풍은 가을의 ‘만트라’다.
![[월간산]서운산 정상 남쪽 아래에 자리한 은적암 가는 길.](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t1.daumcdn.net/news/201611/18/san/20161118144713783gmp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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