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공사의 선수 출신 태솔 통역-노금란 매니저 "이길땐 기쁨 두배, 질때도 아쉬움 두배"

남정훈 2016. 12. 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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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면 초등학교, 늦어도 중학교 때 엘리트 스포츠를 시작하는 이들의 공통된 목적은 하나다. 그 종목에서 ‘일가’를 이뤄 허용하는 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아주 극소수에게 허락되는 영역이다. 정상급 기량은 필수다. 여기에 크고 작은 부상도 이겨내야 하며 소속팀이나 지도자도 잘 만나야 하는 운도 필요하다.
선수출신 노금란 매니저(왼쪽)와 태솔 통역. 도로공사 배구단 제공
남녀 프로배구 13개 구단 중 도로공사는 유일하게 통역과 매니저가 선수 출신인 팀이다. 태솔(30) 통역과 노금란(23) 매니저가 그 주인공이다. 이 둘은 이른 시기에 프로 선수 생활을 접으며 어릴 적 꿨던 꿈을 포기했지만, 배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바탕으로 통역과 매니저라는 ‘제 2의 배구 인생’을 시작했다. 선수 출신으로 누구보다 배구에 대해 잘 알지만,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에 묵묵히 충실하며 선수들의 그림자가 되어 팀을 위해 헌신하는 두 사람을 지난 21일 김천의 도로공사 배구단 숙소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태솔은 프로배구 원년이었던 2005년 신인드래프 2라운드 4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1라운드에 뽑혔던 동기가 ‘기록의 여왕’ 황연주(현대건설)다. 그러나 계속된 부상이 그녀를 괴롭혔다. 태솔은 “실력이 부족하면 몸이라도 성해야 할 텐데. 계속된 부상으로 연습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선수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에 당시 트레이너 선생님이 ‘빠른 포기도 빠른 성공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 2010년 5월 선수생활을 접었다”고 말했다.


중고교 시절부터 태솔은 학업에 대한 미련이 많았다. 그래서 특기생이 아닌 공부로 수능을 봐서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을 했다. 은퇴 뒤 곧바로 수능 준비를 했다. 태솔은 “입시 학원을 알아봤는데, 이미 클래스가 다 찬 상태라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과외를 봐 주시던 선생님이 선수 출신임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던 제가 기특했는지, 본인이 운영하던 학원에 빈 교실에서 공부하라고 배려해줬다. 과외 선생님이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제 공부를 봐줬고, 그 덕에 성적이 가파르게 올랐다. 제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 과외선생님을 만난 것이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태솔은 2011년 이화여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평소 국제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태솔은 체육에서 국제학부로 전과했고, 2015년 8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태솔은 6살에 폴란드로 이민을 가 14살까지 살다 한국에 돌아왔기에 원래 영어에는 능통했다. 그래서 대학 재학 중에도 여러 구단이 통역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감독의 전술 지시를 외국인 선수에게 전달하는 데는 선수 출신인 그녀가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업에만 열중하고 싶었던 태솔은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2016~17시즌을 앞두고 도로공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유를 묻자 “한 번은 통역을 해보고 싶었다. 배구일이니까”라고 답했다.

그렇게 약 6년 만에 배구 판에 다시 돌아왔지만, 쉽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외국인 선수가 3명이나 바뀐 것이다. 첫 번째 외국인 선수 시크라는 부상으로 V-리그 개막 전 한국을 떠났다. 대신 들어온 케네디 브라이언은 다소 부족한 기량에다 팬들 사이에서 ‘왕따 논란’이 일면서 그녀와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하는 태솔에게도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라이언으로는 최하위로 떨어진 성적을 반등시키기 어렵다 생각한 도로공사는 세 번째 외국인 선수 힐러리 헐리를 지난 17일 데려왔다. 태솔은 “외국인 선수들마다 식습관은 물론 자라온 환경과 문화, 성격 등 모든 게 다르기에 팀에 적응시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가 일복이 터졌나봐요”라며 웃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브라이언을 지켜본 그녀이기에 ‘왕따 논란’에 대한 솔직한 답변이 듣고 싶었다. 태솔은 “브라이언이 지난 10월15일 개막전에서 동료 선수들이 점수를 낸 뒤 코트를 막 뛰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저게 뭐하는 거냐’고 묻더라. 한국 배구의 세리머니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팀이 연패에 빠지면서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오게 된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중계 카메라에 잡힌 화면에 국내 선수들끼리 코트를 뛰는 세리머니를 하고, 브라이언이 끼지 못하는 것처럼 잡히자 팬들이 ‘브라이언이 왕따다’라고 추측한 것 같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내가 장담하건대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조차 논란이 된 화면을 보고 ‘카메라 앵글이 이상한데’라며 서로 웃고 그랬다. 이번 논란엔 가해자는 없었고, 브라이언과 국내 선수들 모두 피해자였다”고 항변했다.

브라이언은 도로공사를 떠나며 태솔에게 한 마디를 남겼단다. “애틀랜타에 놀러오면 연락해. 내가 맛있는 아침 대접할게”라고. 이유를 묻자 “브라이언이 아침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미국식 아침밥을 만들어준다네요. 다시 만나는 날엔 웃으며 만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태솔의 표정에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노금란은 2012~13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4순위로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었다. 1라운드에 뽑혔다는 것은 그해 신인들 중 최고 수준의 유망주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신인 때 왼쪽 엄지 손가락 수술을 받아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렇게 웜업존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졌고, 2014~15시즌 이후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당시 우리 팀 센터 포지션에 장소연, 정대영, 하준임 등 저보다 잘하는 언니들이 많았다. 백업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선수 생활을 더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더 할 수도 있었다. 타구단에서 제의도 있었고, 실업팀도 알아봤다. 그때 팀에서 매니저를 제의했다. 제가 실력은 부족했지만, 성실함이나 생활 태도 등을 좋게 봐주신 것이다. 배구가 좋고, 팀에 남고 싶기도 해서 수락했다. 제 선택에 후회는 전혀 없다”라고 매니저로의 변신 과정을 설명했다.

선수 땐 몰랐지만, 매니저의 일은 순탄치 않았다. 노금란은 “선수 시절 바라볼 때와 직접 일을 해보니 하늘과 땅 차이다.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의 가교 역할도 해야하고, 선수들의 입고 먹고 생활하는 모든 부분을 일일이 챙겨야 한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의 식습관부터 선호도 등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 특히 식사를 밖에서 모두 해결해야 하는 원정 때는 식사 메뉴는 물론 모든 사항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순발력있게 대처해야 한다”면서 “제가 선수 시절에 ‘매니저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하며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래도 현역 생활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신인급 선수들이 많은 고민을 상담해 온다.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결국 나는 코칭 스태프의 일원이기에 해줄 수 있는 말이 한정적이다. ‘힘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을 때가 많아 속상하기도 하다. 그 친구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둘의 업무 영역은 다르지만, 선수 출신이기에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한 마디를 부탁하자 둘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부끄러운 듯 웃었다. 언니인 태솔 통역이 먼저 말을 꺼냈다. “7살 어린 동생이지만, 금란이는 참 어른스럽다. 내가 칭얼대는 것도 다 받아준다. 팀내 유이한 여성 스태프로써 ‘네가 있어 참 좋다’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다” 이를 들은 노금란은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얘기와 태솔 언니에게 할 수 있는 얘기가 다르다. 태솔 언니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뜻이다. 같은 코칭스태프이자 배구 선배, 인생 선배인 태솔 언니가 있어 참 좋다”고 화답했다. 이어 둘은 입을 모아 "선수 출신이다 보니 이길 땐 기쁨도 두배, 질 땐 아쉬움도 두배에요"라면서 "감독님이 9연패할 때 얼마나 힘들지...가까이에서 감독님을 비롯해 코칭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는 우리 입장에선 팬들께 좀 더 애정있게 바라봐달라고 당부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둘의 향후 계획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태솔은 “평소 국제관계에 관심이 많았기에 개발도상국에 스포츠, 배구를 좀 더 알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금란은 “일단 지금 맡겨진 배구단 매니저 일에 더 충실하게 하고 싶다. 아직 우리 도로공사만이 V-리그 챔프전 우승이 없는데, 챔프전 우승하는 그날까지 매니저로써 선수단을 잘 보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천=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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