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리더십 탐구]⑪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 "연구만 잘해도 상상 뛰어넘는 제품 쏟아진다"

유진상 IT조선 기자 2016. 7. 1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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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심장이자 자존심이다. 갤럭시는 2016년 현재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 브랜드라는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갤럭시는 노키아의 추락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애플의 아이폰과 유일한 경쟁자로써 안드로이드 폰의 전세계 점유율을 이끌고 있다.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 / 조선일보DB

하지만 이런 갤럭시의 위상은 이전 브랜드인 애니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애니콜은 삼성전자가 사용했던 피처폰 브랜드로 삼성전자는 갤럭시 초창기 시절, 애니콜과 갤럭시를 혼용해 사용했다.

애니콜의 성공 신화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인물이 있다.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이기태 부회장은 ‘미스터 핸드폰’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 휴대폰 산업계에서는 신화적 인물로 통한다. 그는 애니콜을 세계적 최고급 브랜드로 키웠으며 와이브로를 미국 기간망으로 채택시키는 경이적 성과를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기태 부회장은 1948년생으로 대전 보문고와 인하대 전기공학과를 나왔다. 삼성전자에 입사해 삼성전자 무선(DATA)부문 이사·상무·전무·부사장을 거쳐 삼성전자 정보토신 총괄 대표이사 부사장과 사장, 삼성전자 기술총괄부회장, 대외협력담당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 회장으로써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와 미래융합기술연구소 소장을 거쳐 현재는 KJ프리텍 사내이사, 동양네트웍스 기타비상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그는 1973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라디오과와 음향1과, 음향품질관리실, 비디오 생산부를 거쳐 부회장까지 오른 샐러리맨들의 롤모델로 꼽힌다. 평범한 학벌에 석사나 박사 학위도 없다. 상사들과 잦은 마찰을 빚으며 수 차례 사표를 던지기도 하는 등 우리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삼성 애니콜을 세계적 브랜드로 키워낸 일등 공신 역할을 했으며, 부회장까지 승진한 모범적인 직장인의 표본이 됐다.

2006년 ‘와이브로 월드포럼(Wireless Broadband World Forum 2006)’에서 당시 삼성전자 이기태 사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 깜빡이 없는 불도저..모든 면 탁월한 ‘드림리더’

그의 리더십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주변인들은 이기태 전 회장을 ‘깜빡이 없는 불도저’ 또는 ‘디지털 불도저’라고 불렀다. 불도저는 그가 대전 보문고 시절부터 갖고 있던 별명이다. 저돌적이며 투박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 때문이다. 또 상대방의 논리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더 믿고 그대로 밀어 붙였다. 이 때문에 초급 임원 시절엔 ‘제멋대로 일 뿐 아니라 안하무인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의 리더십과 관련해 신완선 성균관대 교수는 재미있는 분석 결과를 내 놓은 적이 있다. 신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기태 부회장의 리더십은 컬러가 없다. 리더십에 특별한 색이 없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드림 리더’로 분석되는 것이 이기태 부회장 리더십의 특징이다.

신 교수는 리더십을 7가지 무지개 색으로 표현했다. 빨간색은 서번트 리더십을 갖고 있다. 끝없는 사랑형 리더다. 대표적 인물은 마더 테레사 수녀다. 남색은 비전 리더다. 장기적인 비전으로 승부하는 리더로 카리스마형으로 표현된다.

신완선 성균관대 교수의 컬러리더십. / 더난출판 컬러리더십 캡처

주황색은 브랜드 리더다.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며 미래에 대한 안목을 갖고 있다. 서태지가 브랜드 리더의 대표적 인물이다. 노란색은 사이드 리더로 부하직원들과 함께 미래를 걱정하는 노심초사형이다. 파란색은 지식을 바탕으로 조직을 이끄는 권한 위임형 리더다. 보라색은 변혁적 리더로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녔다. 초록색은 파워리더로 성실한 추진력으로 도전하는 탱크주의형 리더다.

그런데 이 부회장은 그 어느 컬러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평가다. 신 교수는 이기태 부회장의 리더십과 관련해 “특정 컬러에 치우치지 않고 7가지 컬러를 골고루 규형 있게 갖추고 있다”며 “초록색 파워, 노란색 사이드, 남색 비전, 주황색 브랜드 등 전방위적(all-around)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없는 것이 없고 강한 것도 없지만 모든 컬러를 보여주면서도 리더십 수준이 탁월하기 때문에 ‘드림 리더’라는 것이 신 교수의 평가다.

신완선 교수는 “이기태 부회장은 강렬한 인파이터이면서도 상황이 요구하면 아웃복싱을 마다하지 않는 여유도 있다”며 “모든 요소가 한국 최고경영자(CEO)의 평균을 웃돌기에 약점을 딱히 꼬집기도 힘들다”고 평가했다.

◆ ’돈 좀 벌면 좋겠다’로 시작된 삼성 생활

2005년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 사장(오른쪽)이 휴대폰 전문 브랜드샵 ‘애니콜 스튜디오’를 열며 핸드프린팅을 하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이기태 부회장은 1973년 7월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탓에 ‘돈을 좀 벌었으면 좋겠다’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소박한 꿈에서 시작된 회사 생활이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릴 땐 전업사 사장이 되고 싶었어요. 당시 전업사는 우리 동네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었거든요. 졸업해선 먹고 살려고 취직을 했는데, 삼성이 제일 좋다고 해서 들어갔어요.”

돈을 벌기 위해 입사한 회사지만, 일단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봤다. 빠른 일처리와 확실한 마무리로 인정도 받았다. 그가 성공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된 그의 철학이다.

“저는 특출난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매일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 어떻게 회사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습니다.”

2006년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인도 하리야나주 구루가온시에서 열린 삼성휴대폰 인도공장 준공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당시 삼성은 일본의 산요와 합작해 삼성산요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는 이 회사의 라디오과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라디오 관련 서적이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이기태 부회장은 일본어를 공부해 라디오를 공부했다. 그렇게 지식을 쌓은 그는 이를 다시 현장에 적용해 조립공정의 생산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후 이 부회장은 입사 1년 만에 라디오부문 생산관리 책임자로 승진했다. 또 설계 파트를 거쳐 제조기술 과장으로 진급했다. 그 사이 삼성전자와 삼성산요는 통합했다. 그리고 그는 음향품질관리실장을 거쳐 1985년 비디오 생산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석사나 박사 같은 학위는 없었지만 그저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일 고집이 세고, 윗사람 눈치 안보기로 유명했다고 입을 모은다. 때론 상사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CEO 중 가장 많은 사표를 냈던 사람 중 한명으로 불린다. 과장-차장-부장 때 수시로 사표를 던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조직이 부당하게 간섭받는다고 생각되면 미련없이 실행에 옮겼다.

1991년 9월 그는 이사보가 됐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94년 1월 무선사업(DATA) 부문 이사로 발령이 났다. 이를 놓고 주변에서는 “이기태가 물 먹었다”고 수군거렸다. 당시 무선통신사업부는 장래성이 없다고 평가 받으면서 비디오나 팩스사업부에 비해 홀대 받던 사업부다. 매출은 빈약했고 장래성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1995년 무선전화기 화형식 장면. / 조선일보DB

◆ ‘불량제품 화형식’…애니콜 신화의 시작을 알리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선 사업부가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그는 특유의 저돌적인 스타일로 스스로 사업을 꾸리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삼성전자 역시 그런 그의 능력을 인지하고 그에게 많은 재량과 권한을 줬다. 알아서 해 보라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애니콜 10년 신화의 서막이 울렸다.

특히 1995년 그가 무선사업부문 이사로 발령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전대미문의 사건은 그가 가볍고 튼튼하고 성능과 디자인 좋은 그야말로 완벽한 휴대폰을 만들도록 하는 도화선이 됐다. 바로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벌어진 ‘불량제품 화형식’이다. 그는 이 화형식을 평생 잊지 못할 사건으로 꼽는다.

당시 화형식 현장에 참석했던 이기태 부회장은 “제품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 겁니다. 그 때 과감하게 버리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애니콜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불길 속에서 우리는 미래 희망의 불씨를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1995년 무선전화기 화형식에 앞서 구미공장 직원들이 불량 제품을 햄머로 부수고 있다. / 조선일보DB

불량제품 화형식은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핸드폰과 무선전화기 등 15만대의 제품을 부셔 태워버린 사건이다. 삼성 구미공장 직원들은 ‘품질은 나의 인격이오! 자존심!’ 이라고 내걸린 현수막 아래서 햄머를 이용해 불량 제품을 부셔 버린 후 시뻘건 불구덩이 속에 이 불량품들을 집어던졌다. 불이 꺼진후 불도저로 이를 다시 뭉갰다. 당시 금액으로만 따지면 150여억원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이 화형식이 벌어진 것은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면서 불량을 없애도록 지시했음에도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 회장은 “나는 20년이 넘도록 ‘불량은 암’이라고 말해왔다”며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 온몸으로 전이돼 사람을 죽인다”고 강조했다. 이후 삼성은 불량을 없애고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혁신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발표된 지 1년여 뒤인 1994년 말 삼성 무선전화기의 불량률은 11.8%에 달했다. 내부에서 조차 불량으로 인해 제대로 제품을 쓰지 못하겠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애니콜의 품질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내구성면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 위한 이기태 부회장의 노력은 독특하기까지 했다는 것이 주위의 반응이다.

◆ 기술 신봉론자…”연구만 잘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제품 내놓는다”

2006년 삼성전자는 세계최초로 개발한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인 와이브로를 미국에 수출했다. / 삼성전자 제공

그는 기술 신봉론자로 불린다. 연구만 제대로 잘 해도 엄청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 차 있다.

“디지털은 새로운 기술의 패러다임입니다. 연구만 잘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제품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TV폰이나 와치폰 등 신개념의 단말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획하고 만들어 냈습니다. 연구개발을 통한 결과인 것입니다. 기술 혁신만이 살 길 입니다.”

이 부회장은 직원들이 새로 만들어온 휴대폰을 발로 짓밟거나 차가 뭉개고 지나가는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해외 제품을 사다가 수없이 뜯고 조립해가기를 반복했다. 이런 행동은 직원들 앞에서 만이 아니었다. 그는 휴대폰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외국인 바이어 앞에서 땅바닥에 휴대폰을 내던지고 발로 짖밟은 다음 전화를 걸어 안정성과 품질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또 현장 경영을 중시하기로 유명하다. 삼성전자 사장 시절, 일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바쁜 일정에서도 틈만 나면 구미 공장에 내려가 직접 신제품을 만져보고 문제점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전용 휴대폰 ‘SPH-A4000’ 일명 드라마폰. / 삼성전자 제공

이러한 연구와 노력 결과 삼성전자 애니콜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1999년과 2000년 사이 독창적인 디자인과 기능을 갖춘 제품이 선보여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당시 삼성전자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최첨단의 기술력을 과시하는 실험적인 모델들을 쏟아냈다”며 “당시 모델들은 시판이 어렵거나 시판된다 하더라도 인기는 얻진 못했겠지만, 기술적인 노하우 축적이나 현재의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마켓 리더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밑거름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삼성전자는 2000년 KTF와 합작해 일명 드라마폰이라는 세계최초의 여성전용 휴대폰 ‘SPH-A4000’을 개발했다. 생리주기, 칼로리 계산, 외장형 연결신호 램프 등 여성 고객들에게 필요한 기능들이 추가로 탑재됐다. 색상 또한 붉은 장미를 형상화해 레드 색상에 골드톤 무늬를 적용했다.

1999년에는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폰 ‘SPH-WP10’을 선보여 기네스북에 등재했다. 음성 인식장치를 이용해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시계에 대고 번호를 부른후, '통화' 라고 말하면 자동 연결된다. 소음이 많은 장소에서는 물론 다이얼식 버튼을 통해 손으로 번호를 입력해도 된다. 당시에는 손목에 차고 귀에 갖다대어 통화한다는 게 어색하던 시절이라 실제 양산 및 판매는 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세계 최초의 MP3폰 ‘SCH-M210 / SPH-M2100’과 세계 최초의 TV폰 ’SCH-M220’, 국내 최초의 카메라폰 ‘SCH-V200’, 국내 최초의 풀터치 PDA폰 ‘SCH-M100’, 세계 최초 전자동 폴더폰 ‘SPH-A5000’ 등이 이기태 부회장이 재임하던 시절 선보였다.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폰 ‘SPH-WP10’ / 삼성전자 제공

이런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모델들을 통해 삼성전자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애니콜은 1998년 처음으로 수출된데 이어 5년여만에 모토로라를 따돌리고 세계 2위 자리에 올랐다. 애니콜의 브랜드 가치도 1998년 4억달러 수준에서 2011년 30억달러까지 증가했다.

◆ 제2의 잡스 키우는 학자로

이기태 부회장은 2009년 1월 삼성전자 대외협력 부회장을 끝으로 삼성전자를 퇴직했다. 당시 이 전 부회장은 “"그동안 삼성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즐겁게 일해 왔는데 현업을 물러난 마당에 특별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며 삼성의 전직예우를 거절했다.

보통 삼성전자 스타급 사장이나 부회장들은 자리에서 물러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않고 가능한 한 삼성이라는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데, 그의 선택은 다소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왼쪽부터 세계 최초 Mp3폰, TV폰, 국내 최초 카메라폰, 풀터치PDA폰, 세계최초 전자동 폴더폰 등. / 삼성전자 제공

그가 선택한 길 역시 파격적이었다. 그는 삼성을 나온 뒤 ‘후학 양성’을 위해 나섰다. 연세대학교에서 교수의 길을 걷게 됐다. 이 역시 기술을 중시 여기는 그의 모습을 엿볼 수 대목이다. 그는 “기술 선도국가로 가는데 일익을 담당할 인재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곤 그는 2012년 후학 양성의 길에서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의 교수 사직 이유와 관련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다. 그리고 그는 현재 KJ프리텍 사내이사, 동양네트웍스 기타비상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 창조경제포럼 의장을 맡아 정부화 국회, 산업계, 학계가 힘을 합쳐 ‘창조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당시 포럼 발족식에서 “우리나라는 재도약을 통한 선진국 진입이라는 기로에 서 있다”면서 “창조경제는 개인, 기업, 정부 등 사회 주체의 무한한 상상력이 과학기술·ICT와 창의적으로 융합해 고부가가치, 양질의 일자리,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양한 분야에서 장벽을 걷어내고 열린 협업을 추구해야 할 때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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