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의 '거취와 기억'](10) 수영하고 테니스 치는 아파트의 삶을 욕망하다, 그들이 보여준 대로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2016. 9. 26.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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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개인의 욕망·취향까지 통제하는 국가와 시장

대한주택공사가 1976년 10월 발행한 화보집 ‘주택건설’에 소개된 아파트 거실 내부.

‘한국문학’ 1976년 10월호에 발표된 박완서 작가의 단편 <포말(泡沫)의 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누구나 개인주택에 살던 시절을 지긋지긋해하며 더 나은 생활이란 곧 더 넓은 아파트이거나 더 호화로운 아파트일 뿐이라며 개인주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 단정한 바 있다. 그는 또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았지만 아무하고나 대개는 낯이 익었고 남 하는대로 휩쓸리지 않으면 뒤로 욕을 먹을 것 같은 막연한 공포감을 느끼는 ‘아파트 감수성’을 드러낸다.

■1976년을 기억하는 방법

<포말의 집>이 발표된 1976년은 13.1%의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만든 때였고,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마무리지은 해이기도 하다. 경제운용에 강한 자신감을 가진 정부에 호응하듯 민간에서는 보란 듯이 국산 자동차 ‘포니’를 출시했고, 금성사는 컬러 텔레비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모든 분야에서 1977년부터 시작될 꿈만 같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청사진을 그렸다. 대한주택공사는 단독주택에서 벗어나 아파트 위주의 주택 건설을 통해 국민 문화생활 향상과 1가구 1주택 시대의 개막을 여는 길잡이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힌 컬러 화보집 ‘주택건설’을 그해 10월 세상에 자랑스럽게 선보였다.

1976년 1월에는 경관지구, 미관지구, 고도지구 등과 같은 용도지구 가운데 하나로 ‘아파트지구’가 새로 등장했다. 아파트지구로 지정된 곳에는 아파트만 들어서게 한다는 것이 골자인데 종래의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한 단독주택 공급방식에서 벗어나 고층 아파트 단지로 토지개발과 주택건설 사업의 일대 전환을 이룬다는 선언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그해 8월에는 서울의 반포, 잠실, 여의도, 압구정 등 11개 지구가 아파트지구로 지정되었다. 물론 ‘아파트 도시’ 서울의 강남 개발을 촉진하려는 목적이 담긴 것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법한 사진작가 전민조의 유명한 사진 ‘1976년의 압구정동’이 태어난 배경이다.

강남 개발이 한창이던 1976년 서울 압구정동의 아파트단지 앞에서 한 농부가 소를 끌고 밭갈이를 하고 있다. 전민조 제공

1976년 9월엔 1972년에 최초 제정된 ‘주택건설촉진법’의 하위 법령인 ‘주택건설촉진법 시행규칙’(현재의 주택법 시행규칙)이 전면 개정되며 500가구 이상의 아파트 단지에는 반드시 ‘정구장’을 두고 ‘수영장’이나 ‘배구장’ 중 하나를 선택해 추가로 설치하도록 강제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곳에 주택을 대량 건설해야 했으니 주민의 문화생활이 고양되도록 선진 운동시설도 갖추자는 의도였다. 물론 이들 법령과 조치는 모두 정치적 위기에서 출발한 유신정부가 유신 직후 ‘250만호 주택건설 10개년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화보집 ‘주택건설’에 실린 두 장의 사진

1976년 10월에 발행된 화보집 ‘주택건설’은 대한주택공사의 청사진이라는 의미를 넘어 다양한 층위에서 사회정치적 의미를 함축한 프로파간다 출판물이다. ‘주택건설촉진법-아파트지구 신설-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라는 국가 주도의 다채로운 실천 과제가 결과적으로는 ‘고층 아파트 단지 건설’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중산층의 호화로운 생활세계를 먼저 나서서 보여주고자 출판한 홍보물이기 때문이다.

‘소파’라는 단어보다는 ‘쇼파’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법한 의자들이 약간은 버거운 느낌으로 자리 잡은 아파트의 거실. 장판이 깔린 거실 바닥 위에는 화문석(花紋席)이 펼쳐 있고, 그 위로 조선시대 연화상을 닮은 소반이 놓였다. 코바늘뜨기로 정성을 들인 탁상보가 덮인 소반 위에는 꽃병과 함께 재떨이와 담배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난방용 라디에이터를 감싼 장식장 위를 따라 여러 개의 트로피가 자리를 잡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한 느낌이 적지 않다.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걸렸고, 창문형 에어컨 뒤로 보이는 빨래건조대는 베란다에 놓였다. 제법 큰 유리창이 달린 거실 전면에는 안쪽으로 이중 커튼이 걸렸다. 화문석의 오른편 귀퉁이에는 코끼리상이 놓였고, 라디오나 오디오로 보이는 기기와 작은 사진틀 그리고 받침대를 갖춘 수석은 서랍장으로 보이는 가구 위를 차지했다. 소파가 등을 기댄 벽면에는 부분 조명등이 설치되었고, 달력과 함께 ‘윌슨(Wilson)’이라는 상품명이 분명한 ‘테니스 라켓’ 몇 개가 전시품처럼 걸려 있다.

화보집 ‘주택건설’에 등장한 흥미로운 컬러 사진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아파트 단지 내 ‘옥외수영장’이다.

1970년 11월 준공한 동부이촌동의 한강외인아파트 옥외수영장을 촬영한 사진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홍보책자에는 ‘정구장’에서 운동하는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을 ‘수영장’ 사진과 같은 쪽에 나란히 배치해 아파트에서의 문화생활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민간 건설업체에도 공공주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주택건설촉진법’은 1972년 제정되었다. 이 법률에서 위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과 ‘주택건설촉진법 시행규칙’은 다음 해인 1973년에 마련되었는데 일정 가구 이상의 모든 아파트 단지에는 노인정이며 어린이놀이터, 각종 운동시설 등을 의무적으로 설치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특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택건설촉진법 시행규칙’ 전부가 1976년에 개정되며, 500가구 이상의 단지에는 반드시 ‘정구장’을 설치해야 했고, 이와 함께 ‘수영장’이나 ‘배구장’ 중 하나를 선택해 설치하도록 했다. 아파트에서 벌어진 문화생활의 표본을 정한 것이다. 당시 강제한 운동시설의 의무 혹은 선택적 설치 규정은 1998년이 돼서야 다양한 운동시설 중 사업주체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관련 내용이 바뀌었다.

그러니 의무규정에서 선택규정으로 바뀌는 23년 사이에 지어진 웬만한 아파트 단지에는 예외없이 ‘정구장’이 설치되었고, ‘수영장’이나 ‘배구장’ 중 하나는 반드시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입주자가 설치비용 모두를 부담하지만 사업자는 분양 시장이나 입주 후 주민들의 유지관리비용 등을 따져 대개는 수영장 대신 배구장을 선택했다. 오래 묵은 아파트 대부분에 수영장은 없지만 정구장과 배구장이 남아 있는 이유이고, 1976년 주택공사가 펴낸 홍보책자에 등장한 거실의 벽에 라켓이 자랑스럽게 걸린 이유이자 옥외수영장 사진을 홍보책자에 담은 까닭이다.

1970년 11월 준공한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강외인아파트 단지에 있던 수영장.

■맨션급 아파트 단지의 자랑, 옥외수영장

화보집에 등장하는 옥외수영장은 외화벌이를 위해 정책적으로 건설한 외국인 전용 주택지인 한강외인아파트라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 예외로 친다면 다른 아파트는 어땠을까? 백화점에서 ‘큰손’으로 여겨 따로 분류해 관리하던 ‘맨션 사모님’들이 살던 맨션아파트에는 과연 수영장이 있었을까? 한강외인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아직 법령으로 강제하지 않던 때에 사업자가 알아서 아파트 단지에 ‘수영장’을 만들었을까?

건축가 오영욱은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라는 책에서 20년 전쯤에 살았던 서울 청담동 삼익아파트 기억을 들춰낸 바 있다. 오래전 병아리를 키웠거나 동무들과 어울려 놀이와 운동을 했던 곳, 때론 음란잡지를 숨겨두었던 곳도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단지의 자랑’이었던 야외수영장은 흙으로 덮여 주차장이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청담동 삼익아파트 입주가 시작된 것은 1980년 5월. 당시 적용되었을 기준을 살펴보면 의무시설인 정구장과 달리 수영장 대신 배구장을 설치해도 될 곳이었다. 그러니 건축가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는 사업주인 삼익주택의 정교한 판매전략 가운데 하나로 ‘야외수영장’이 선택된 것이다.

외국인용 아파트를 제외하고 당시 중산층을 위한 대표적 아파트 단지 사례로 꼽곤 하는 한강맨션아파트, 여의도시범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는 어떨까? 물론 이들 단지는 모두 ‘수영장’을 설치하지 않아도 법적 문제가 전혀 없을 때 준공한 것들이다. 한강외인아파트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그보다 두 달 앞서 준공한 한강맨션아파트의 경우는 여러 기록을 살피더라도 ‘수영장’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1978년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아파트 5단지에 있던 수영장(붉은색 원).

그렇다면 옥외수영장을 갖춘 한강외인아파트에 비해 1년 정도 뒤인 1971년 10월 준공한 서울 여의도시범아파트와 1972년 12월 1차 준공한 반포주공아파트의 경우는 어땠을까? 두 곳 모두 옥외수영장을 두는 것을 구상하였다. 당시 분양광고 등을 보면 한강외인아파트의 시설 및 설비와 견줄 수 있는 생활환경을 구비한 곳들이기 때문에 적어도 설계과정에서부터 한강외인아파트의 옥외수영장에 주목했을 것이다. 다만 여의도시범아파트는 단지 외부공간에 옥외수영장을 두었던 반면에 반포주공아파트는 ‘수영장 시설을 갖추고 운영할 수 있는 자’에게 땅을 분양해 한동안 ‘실내수영장’으로 운영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입주자에게 전가된 설치 비용

1976~1977년에 건설한 대한주택공사의 잠실5단지는 가장 작은 평형인 7.5평에서 최대 17평형에 그쳤던 잠실 1~4단지와 달리 34~36평의 아파트로 구성되었다. 당시 일정한 설계 관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30평 이상에서의 식모방 마련 원칙도 적용되는 등 통상적인 서민아파트와는 다른 중산층용 아파트 단지였다. 서울 동부지역의 맨션이라 부를 만했으며, 그런 이유에서 맨션아파트의 상징이자 자랑으로 삼을 만한 ‘옥외수영장’은 당연히 설치되었고, 실제 사용 여부와는 상관없이 2001년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다. 1970년대 한강외인아파트와 일부 중산층용 아파트 단지 안의 옥외수영장은 단연코 단지의 자랑거리였다. 당시 ‘바캉스’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1971년 문을 연 타워호텔 야외수영장은 여름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한강외인아파트의 옥외수영장은 누구나 마음속에 그린 아파트 단지였고, 서울시와 대한주택공사뿐만 아니라 민간 건설업체들도 구별짓기 혹은 상품화 전략으로서 한강외인아파트처럼 아파트 단지에 옥외수영장을 설치했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1976년 이후 정구장은 ‘의무’, 수영장은 ‘선택’이었다. 수영장 대신 배구장을 만들거나 기왕에 의무였던 정구장을 추가로 조성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파트 단지 내 옥외수영장’을 두었다는 사실은 사업주체가 공공이건 민간이건 가리지 않고 강제하지 않은 것을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아파트라는 상품의 판매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그린 욕망의 집을 실재하는 현실로 바꾸어주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주민운동시설에 대한 강제는 2013년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돼 주민공동시설이 총량제로 바뀌며 큰 변화를 맞는다. 물론 가구 수를 기준으로 통상 2~2.5㎡만큼을 곱한 면적을 주민공동시설로 구비하면 되는 자율이 주어졌지만 수영장과 정구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정한 45가지의 운동시설에 포함돼 있어 아파트 건설 사업주체가 선택만 하면 아파트 단지 안에 총량제의 한 방편으로 설치할 수 있다. 강남의 고급 아파트 단지에 카약장이 설치된 것이 그 예다.

물론 그들이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비용은 고스란히 입주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철저한 판매 전략을 통해 구비할 시설을 고른 뒤 입주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입주 후 아파트 단지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당장의 분양률인 것이다. 아파트라는 상품을 구매한 입주자는 아파트 판매를 위해 그들이 부추긴 욕망의 홍보문구를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그 내용을 자신의 꿈으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막 아파트 감수성이 자라나던 때, 국가와 시장은 우리의 기호와 취향을 아주 구체적인 욕망으로 번역해냈던 것이다.

■주민공동시설 설치 총량제 원칙적으로 100가구 이상의 주택단지를 대상으로 하며, 지역 특성이나 주민 수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단지 내에 주민공동시설 설치가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을 통해 강제하는 제도이다. 100가구 이상 1000가구 미만인 경우는 가구당 2.5㎡를 더한 면적을, 1000가구 이상인 경우에는 500㎡에 가구당 2㎡를 더한 면적 이상을 주민공동시설로 조성하되 특별시나 광역시 등에서는 총량 면적의 4분의 1 범위 내에서 강화 혹은 완화가 가능하도록 규정한 제도로 2013년 12월부터 시행 중이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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