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39차례나 회의 여진토벌 설득.. 최대 반대 최윤덕에 全權줘 대승 이끌어

기자 2018. 10. 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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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오녀산성에 오르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환런 만족 자치현에 있는 오녀산성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도읍지로 유명하지만, 1433년에 조선군이 지금의 혼강인 파저강을 토벌할 때 가장 역점을 둔 유적지다. 나는 지난주 ‘최윤덕의 길 답사팀’과 오녀산성 정상에 이르는 1000여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그 토벌이 사실상 무모한 모험이었음을 깨달았다.

압록강변의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오녀산성까지 거리가 구글 지도로 130여 ㎞다. 어른 걸음으로 꼬박 40여 시간을 걸어야 산성 입구에 겨우 도착할 수 있다. 거기까지 1만5000여 군사를 이끌고, 물길을 따라 적진으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라는 게 최윤덕의 반대 이유였다. 허조는 우리 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적군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왜 성공확률이 낮은 이 토벌을 감행했나? 파저강토벌은 한마디로 세종의 ‘프런티어 리더십’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재위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국가적 관심이 온통 인재를 검증한다는 명목하에 ‘신상털기’에 쏠렸다. 양녕대군 탄핵 등 정쟁 성격의 의제가 어전회의를 장악하곤 했다. 게다가 중국 사신 윤봉의 무리한 요구와 온갖 추태로 온 나라가 짜증으로 넘치는 시점에서 세종은 북방 영토 개척이라는 대외 이슈를 끄집어냈다.

1432년 12월 초 파저강 지역의 오랑캐 추장 이만주가 400여 기(騎)의 군대를 이끌고 여연 지역에 침입해 53명을 죽이고 100여 명을 납치해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보고를 들은 세종은 의정부 대신들과 병조판서를 긴급 소집했다. 세종은 ‘심히 노(怒)한 모습’으로 이번 기회에 여진족을 토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황희 등 신하 대부분은 토벌을 반대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경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칫 심각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세종은 다시 회의를 열어 여진족 토벌 문제를 의제로 상정했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그의 대외 정책 기조인 ‘조용한 외교’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세종은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해 재위 초반의 대마도 정벌처럼 대의(大義)로 결단하고 토벌해 적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황희 정승의 생각도 “치욕을 당하고 잠자코 있는 것은 불가하다”는 쪽으로 바뀌었고, 세종은 북정(北征)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최윤덕의 반대였다. 당시 최고의 군사 전문가인 최윤덕은 “열 그루 나무를 베야 겨우 하늘이 보일까 말까” 한 적지를 준비 없이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세종은 무려 39차례나 회의를 열어 발생할 문제점들을 의논하고 대비하게 했다. 철저한 현지조사를 통한 여진족의 거주지와 지리조건을 확인한 것도 최윤덕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

최윤덕이 비로소 마음을 바꿨다. “지금은 땅이 얼고 물이 흘러넘치니 4, 5월 봄에 물이 마르기를 기다려서 행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세종은 최윤덕의 입장변화를 반기면서 “경이 말한 바를 내가 어찌 듣지 않겠는가. 군사의 진퇴에 이르러서는 모두 경의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화답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최윤덕이 지휘하는 토벌군은 그해 4월 19일 새벽에 일곱 방향으로 기습 공격해 9일간 전투 끝에 여진족 183명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

산성 꼭대기에서 뱀처럼 휘어져 흐르는 파저강을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만약 세종이 그때 여진족 토벌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여진족의 국경 침입과 약탈이 계속됐을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우리를 얕잡아 보는 태도 역시 이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양녕대군을 처단하고 조말생을 파직해야 한다는 등 민생과는 무관한 탄핵 정국으로 온 나라가 달궈졌을 것이다. 세종은 파저강 토벌로 이슈를 전환했고, 결과적으로 4군 6진 개척의 토대를 마련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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