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휘젓고 다닌 '21세기판 마타하리'

최아리 기자 2018. 7. 20. 03: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美FBI, 스파이 혐의로 체포

2016년 8월.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27세 러시아 여성 마리아 부티나가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9월부터 워싱턴의 아메리칸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수강해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적은 보통 학생과는 달랐다. 동거인은 나이가 2배는 많은 미국 남성이었고, 러시아의 고위 관료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미국 FBI는 미·러 정상회담 하루 전인 지난 15일(현지 시각) 그녀를 간첩 혐의로 전격 체포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성로비까지 마다치 않은 그녀에게 '21세기판 마타하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부티나의 고향은 러시아의 시베리아다. 아버지한테 사냥하는 법을 배우며 자라 총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속옷 차림에 총기를 들고 찍은 화보 사진이 패션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2011년엔 러시아판 총기협회(NRA·총기 옹호단체)인 '무기를 소지할 권리(Right to Bear Arms)'를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 신흥 재벌이자 중앙은행 부총재인 알렉산드라 토르신의 눈에 들었다. 토르신은 푸틴의 최측근으로 지난 4월 미 재무부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美정계 침투한 러시아 스파이의 '色, 戒' - 미국 수사 당국이 15일(현지 시각) 간첩 혐의로 체포한 러시아 여성 마리아 부티나(29)가 2015년 미국의 한 총기 행사장에서 총을 쥔 채 웃고 있다. 미국 검찰에 따르면 부티나는 미 정치권에 접근하려고 나이가 두 배나 되는 남자와 동거하고, 또 다른 남성과 성관계까지 가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티나는 전미총기협회 행사장 등을 다니며 미 정치권 인사들과 관계를 맺고 각종 정보를 러시아 중앙은행 부총재인 알렉산드라 토르신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아 부티나의 페이스북


부티나는 토르신을 멘토로 여겼다. 미국에서 열리는 NRA 행사를 함께 찾았고, 이 자리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소개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행사에 NRA 회원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2013년 그녀가 모스크바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한 활동가는 그녀를 "젊고, 예쁜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2014년에는 토르신과 그녀가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와 한 테이블을 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6년 미 대선 국면이 시작되면서부터 부티나는 본격적으로 대선 후보에게 연줄을 대고자 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는 공화당 정치 컨설턴트이자 56세 남성과 동거를 시작했다. 미 언론들은 그를 폴 에릭슨이라고 추정한다. 에릭슨은 2013년 NRA 행사에서 알게 됐다. 부티나에게 "학생 비자를 받으면 미국에 들어오기 쉬울 것"이라고 조언한 것도 그였다.

그녀는 토르신에게 보낸 보고에서 "56세 남자랑 사는 건 짜증 나는 일"이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에릭슨은 부티나를 도와 트럼프가 대선 후보 시절 '크렘린 커넥션'이라는 이름으로 트럼프와 푸틴의 만남을 추진한 장본인이다.

그녀의 '미인계'는 에릭슨에 그치지 않았다. 미 검찰은 부티나가 특정 이익 단체에 들어가는 대가로 또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했다고 밝혔다. 단체와 남성은 특정되지 않았다. 이 남성은 미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부티나, 러시아 정부 인사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부티나의 미국 활동은 거침이 없었다. 지난해 1월 트럼프 취임식 때는 행사장 근처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어 토르신에게 보냈다. 토르신이 "저돌적인 여자"라고 하자 부티나는 "훌륭한 선생님 덕"이라고 대꾸했다. 지난해 3월 미국 잡지에 부티나의 총기 옹호 활동이 소개됐을 때는 토르신이 "너는 안나 채프먼이 받았을 인기를 가로챘다"며 "그녀를 훨씬 능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안나 채프먼은 2010년 미국에서 추방된 여성 러시아 스파이다.

FBI는 지난 3월 부티나가 정보 요원으로 의심되는 러시아의 한 외교관과 저녁 식사를 하는 사진을 입수한 뒤 부티나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부티나의 집을 찾았을 때는 그녀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서 일자리를 제안받았다는 내용과 주요 요원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의 연락처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녀는 집의 이삿짐을 모두 싸둔 상태였다.

부티나와 그의 변호사는 모든 혐의가 과장됐다고 주장했지만, 17일 법원은 도주 우려가 높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석방 없이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부티나뿐 아니라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해 미 정계로 수사가 확대될 전망이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