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김정연 <혼자를 기르는 법>
ㆍ원룸에 살며, 중장비처럼 일하는 ‘20대 이야기’
우리의 ‘여기’는 지금 지옥 같고, 끝내 끝나지 않는 시시포스의 바위 같지만…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또 우리는 그것을 단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분투하여 ‘통과’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 문제를 둘러싸고 내가 속한 카톡방에서 열띤 토론이 일었다. 난민 수용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무슬림에 대한 공포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추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우리는 무슬림을 생각하면 어떤 키워드들이 떠오르는지 서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대부분 ‘조혼’, ‘성차별’, ‘명예살인’ 등의 키워드를 언급했다.

키워드를 꼽으라니 나도 확실히 ‘명예살인’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떠올랐다. 미디어에서 주로 그런 뉴스들만 접했기 때문이다. “549명에게는 549개의 이야기가 있다”며 제주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 다섯 명의 인터뷰를 내보낸 〈허핑턴포스트〉에서 ‘명예살인’을 검색해봤다. “파키스탄에서 딸을 ‘명예살인’한 어머니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청혼 거부 18세 소녀 화형이 명예살인?” 등의 기사들이 검색됐다. SNS에서 익히 보아왔던, 보면서 끔찍하다고 서로 카톡으로 돌려보았던 기사들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책임’을 진다는 것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라는 책에서 국제 뉴스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어떤 지역이 기본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야만, 또한 그곳 거주민들의 일상생활 및 일과, 그들이 품고 있는 소박한 희망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거기서 벌어진 슬프고 폭력적인 사태에 대해 적절하게 우려를 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들의 일상에 대해서는 그게 무엇이건간에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다.” 확실히 우리는 파키스탄, 예멘, 인도의 ‘일상적인 결혼생활’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슬림에 대한 가장 자극적인 뉴스들을 그들의 일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비단 난민 문제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 역시 서로 다른 성별·계층·연령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며 무슨 희망을 품고 있는지 서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같은 사회에서도 계속해서 극단적인 이야기로만 서로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추측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대 여성의 서사를 솔직하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정연 작가의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이하 〈혼기법〉)은 여러 모로 유의미한 작품이다. 〈혼기법〉은 20대 여성의 일상과 그 안에서 주인공이 갖는 평범하고 소박한 희망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일상툰으로는 주인공이 작가의 분신으로서 등장하는 〈낢이 사는 이야기〉나 〈퀴퀴한 일기〉 등도 있지만, 〈혼기법〉의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자 보편적인 20대 여성의 설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점에서 기존 일상툰과 큰 차이를 보인다. 〈혼기법〉의 주인공 ‘이시다’는 건축사무소의 막내이자, 원룸에 살고 있으며, ‘쥐윤발’이라는 이름의 햄스터와 동거한다. ‘시다’는 일상 속에서 ‘중장비’보다 오래 일하고, 집주인의 요청으로 거주지 등록조차 못했으며, 어느 새벽 성폭력을 당할 뻔한 경험을 갖고 있다.
〈혼기법〉은 20대 여성의 삶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특히 〈혼기법〉이 현실과 다름없이 다루는 건 부동산, 여성차별, 일터에 관련한 소재들이다. 독립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시다가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는 원하는 집이 아니라 고시원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이다. 장시간 노동과 휴일근무에 시달리는 것 역시 그렇다. 모두 하루하루를 버티고, 금요일에는 모두 회사를 뛰쳐나와 또다시 열정적으로 휴식을 ‘완주’하는 모습들은 그냥 웃기엔 어딘가 씁쓸하다. 주목할 건 이러한 과정에서 시다의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다는 전반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고, 기쁨이나 분노, 슬픔 등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종종 등장하는 시다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시다의 무표정은 초연이나 달관보다 체념에 가까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다는 소소한 희망들을 놓지 않는다. 시다는 ‘내가 뭘 갖고 싶은지 절대로 까먹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하면서, 층고가 높은 집, 꽃무늬가 없는 벽지, 심플한 가구 등 자신만의 삶의 조건을 착실하게 찾아 나간다.
‘함께’ 버텨야 더 단단해진다는 깨달음
〈혼기법〉은 일상적인 쳇바퀴를 돌듯 시다의 집과 회사를 오가며 전개되지만 2부의 중후반에서는 이 일상에 위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 시다는 맥박이 부자연스럽게 뛰는 것을 발견하고 병원에 가는데,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알고 보니 공황장애였고, 시다는 지하철을 타다가도 급성쇼크로 쓰러지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 다소 어려운 상태를 맞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햄스터 윤발마저 세상을 떠난다. 시다는 윤발의 장례를 치른 뒤 올라오는 차 안에서 다시 공황장애 쇼크를 맞는데, 마침 시다와 함께 장례를 치러준 해수가 시다를 다독이며 이렇게 말한다. “그냥 우리는 (휴게소에서) 알감자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그러다가 이젠 충분하다고 느껴지면 그때 서울로 돌아가자.” 해수와 시다는 시다의 증상이 나아질 때까지 휴게소에서 머문다. 그들이 몇 시간이나 휴게소에 기거했는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자동차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시다가 문득 해수에게 이제 서울로 올라가자고 한다. “목적지가 휴게소인 사람은 없잖아요. 돌아가야죠. 매캐한 나의 목적지, 서울로.”
시다는 다시 서울로, 사무실로 돌아온다. 길지도 짧지도 않게 휴식한 뒤의 일이다. 시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하는 이 장면에서 나는 〈혼기법〉 작가 김정연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 스스로 20대 여성의 서사에 무책임해지지 않으려 했다”고 말하는데, 이 장면은 작가로서 자신의 윤리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섣불리 모든 것을 놓으라고도, 지금 당장 현재를 잡으라고도 말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시다를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오늘로 다시 돌아와야 했던 이유. 여길 지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우리의 ‘여기’는 지금 지옥 같고, 끝내 끝나지 않는 시시포스의 바위 같지만 〈혼기법〉은 20대 여성들이 살아내고 있는 지금 역시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또 우리는 그것을 단지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분투하여 ‘통과’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는 언젠가 서로가 상상하는 소박한 행복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이 결말은 김정연이, 그리고 ‘이시다’가 같은 20대 여성의 이야기에 책임지는 방법을 똑똑히 보여준다. 최근에는 삶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콘텐츠들이 많아졌는데, 〈혼자를 기르는 법〉처럼 다시 현실로 안착하여 제대로 된 결말을 보여주는 콘텐츠는 매우 드물다. 극의 재미와 현실 속 독자들의 삶 등 모든 것을 고려한 윤리적인 결말을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이 ‘좁은 길’을 지나 〈혼기법〉은 치열하게 고민한 대답을 내놓는다. 〈혼기법〉은 이렇게 말한다. 척박한 삶의 조건에서도 우리의 욕망에 귀기울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또한 〈혼기법〉은 혼자를 기르는 방법으로서 연대와 공존을 제안한다. 혼자서 단단해질 수 없다. 우리는 함께 버티면서 굳어진다. 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덴마크인이든, 햄스터든 말이다.
<조경숙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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