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투성이 희곡 인생.. 관객 믿고 오늘도 쓴다
美 선물한 고종 어진 되찾는 내용 "연극은 결국 관객이 완성하는 것"
듣는 사람은 웃느라 정신없는데 정작 본인은 천연덕스러웠다. 극작가 이강백(71)은 '셀프 디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예술의전당(예당)에서 이강백연극제(1998년) 했을 때 적자가 엄청났거든요. 그때 '살아생전 다시는 예당에서 내 작품을 못 보겠구나' 싶었지. 근데 세월이 흐르니 다들 잊나 봐. 이강백연극제 했던 예당 사장이 지금까지 있었다면 절대 안 했을 거요. 뭐 어쨌든 이번에도 적자는 확실하고…."

'알레고리의 작가'로 불리는 이강백은 11월 6일부터 신작 '어둠상자'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린다.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첫손 꼽히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와 흥행 사이엔 적지 않은 거리가 있었다. 그는 현재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는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수화기 건너편 그는 어떤 초식으로 공격해도 물 흘리듯 흩뜨려버리는 태극권 고수 같았다.
공연된 것만 헤아려도 그가 쓴 희곡은 50편을 넘는다. 그 작품들이 꾸준히 재해석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번 작품은 고종의 마지막 어진(御眞)을 찍은 황실 사진가 4대의 이야기. 고종은 1905년 미국 사절단과 함께 조선에 온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당시 21세)에게 어진을 선물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의 기억을 되살려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공주'는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는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라 비웃는다. 작가 이강백의 상상력이 여기서 시작됐다.
"고종이 황실 사진사 김규진에게 '미국 공주에게 준 사진을 되찾아 없애달라'는 밀지를 내리는 거예요. 영원히 존재하며 경멸받는 걸 견딜 수 없는 거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사진사와 자손 4대가 어진을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한참 이야기를 잇던 그가 또 말을 돌렸다. "근데 참, 고종 사진 아무리 우려먹어 봐야…. 이 연극은 고종보다는 사진의 역사와 우리 근대사,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에 관한…. 아, 이렇게 말하면 더더욱 관객이 안 오겠는데요." 그 말은 농담이면서 진담이었고, 그것이 결국 농담이 되길 바라는 것처럼 들렸다.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요즘 관객은 상징과 은유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떠먹여주기만 바란다"고 했었다. 이번에 그는 "그땐 내가 오만했다. 연극의 3요소에도 극작가는 없지만 관객은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결국 연극은 관객이 완성하는 겁니다. 연극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갖춘 작품도 꾸준히 나오고, 그런 작품을 원하는 관객도 늘 있지요. 객석과 소통할 가능성을 줄곧 믿는 것이 작가이고요."

극단 산울림과 함께했던 연극 '챙!'에서 이강백은 "심벌즈 연주자처럼 박자를 세면서 기다리다가 절정의 순간에 '챙!' 하고 울릴 그날이 누구에게나 온다"고 썼다. 그도 인생의 심벌즈를 울렸을까. 이강백은 "절정의 순간이 아닐 때도 챙챙 울려대서 사람들에게 눈총 받은 인생"이라고 했다. "아닌 때에 냅다 쳐서 망친 적도 많죠. 현실에선 늘 '이때 아니면 언제 칠까' 싶어 빵빵 쳐댑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이 내 생의 절정이다' 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11월,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심벌을 챙 하고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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