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라" "애낳아라".. 남 인생에 '오지랖' 좀 그만

이뿐만이 아니다. 시어머니는 종교가 딱히 없는 정민씨에게 교회에 다니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정민씨는 일요일 하루라도 푹 쉬고 싶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면 애 낳으라는 말은 좀 덜 하시겠지’란 생각에 가끔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헛된 바람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이를 잘 들어서게 한다는 약까지 지어줬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정민씨를 경기도의 한 기도원에 데려가 ‘순산 기도’를 드렸다. 별 생각 없이 동행했던 정민씨는 결국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정민씨의 삶은 달라졌다. 가슴이 답답해 숨이 잘 안 쉬어질 때가 잦았고, 때로는 화가 치밀어 올라 남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남편은 아내가 걱정돼 함께 병원을 찾았고 의사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의사는 정민씨가 ‘오지랖 증후군’이라고 설명했다. 생소한 병명에 당황하는 부부에게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신이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닌, 남들 말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 같은 존재란 생각에 극심한 스트레스가 쌓여 생긴 병”이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정민씨는 오래 전부터 끝없는 오지랖에 시달려 왔다. 고등학생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공부는 잘 하니?” “어느 대학 쓸 거니?”라고 물었고, 대학 시절엔 “빨리 취업해야지”란 말을 수없이 들었다. 조금 늦었지만 원하던 직업을 가진 정민씨는 결혼을 재촉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서둘렀다.
세계일보가 10∼30대 남녀 7명과 오지랖을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종합해 ‘85년생 최정민’이라는 가상의 인물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다. 정민씨를 힘들게 한 오지랖 증후군은 임의로 지은 병명이다. 하지만 온갖 오지랖의 굴레에 갇혀 정신적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증상이다.

오지랖의 사전적 정의는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이다. 주로 ‘오지랖이 넓다’란 관용어로 쓰이는데, ‘남의 인생에 주제 넘게 참견 또는 간섭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오지랖의 주체는 주위 사람, 그 중에서도 기성세대인 경우가 많다. 사례에 등장한 “취업해라”, “결혼해라”, “애 낳아라” 등이 대표적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오지랖은 분명 크나큰 스트레스다. 인터뷰에 응한 한 30대 여성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앞두고는 항상 압박이 가해졌다”며 “하나를 해내도 바로 다음 결정에 대한 훈계로 이어지고, 정작 내 의사가 반영한 적은 없었다”고 털어놨다. 나중에는 ‘출산까지 받아주면 정말 끝이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른들의 오지랖 때문에 젊은이들이 명절을 기피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한다. 28일 취업포털 사람인이 올해 초 성인 남녀 14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58.5%가 ‘명절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근황을 물어보는 과도한 관심이 싫어서’(48.9%)를 꼽은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오지랖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경기 하남시에 사는 김모(56)씨는 “궁금하기도 하고,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해주는 말 아니겠나”라고 되물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오지랖은 인간의 본능”이라며 “남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지적할 때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모·옷차림·취향까지···진화하는 오지랖
개인의 대소사에 관한 것들 뿐만 아니라 외모, 옷차림, 취향 등도 얼마든지 오지랖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민씨가 직장에서 종종 듣는 “살 좀 쪄야겠어”란 말이 한 예다. 이와 반대로 “살 빼라”는 지적도 오지랖에 해당한다. 외모에 대한 오지랖은 심할 경우 성희롱이 되기도 하지만 별 문제의식 없이 내뱉는 문화가 여전하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 증가와 함께 볼썽사나운 참견도 등장했다. 반려견과 함께 사는 정민씨 부부에게 “개한테 애정을 쏟느라 아이가 안 생기지”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이다. 정민씨의 부모나 친척 어른은 물론, 친구 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심지어 처음 본 에어컨 수리기사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영화, TV프로, 음악 등 문화생활 영역에서도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많다. 독립영화를 좋아하거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1000만 관객 영화’, ‘박스오피스 1위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 “꼭 봐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꼭 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정민씨에게 대중가요를 강권하는 한 친구가 정확히 그런 부류다.
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승진하려면 이렇게 해라”, “사회 생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같은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상사나 선배가 적지 않다. 부하직원이나 후배가 딱히 조언을 구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나서서 회사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는 것도 진의와는 다르게 듣는 사람에게는 오지랖이 될 수 있다.

◆“각자 삶의 방식 존중하고 서로 이해해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이 경험한 오지랖 사례나 대처법 등을 공유하며 위안을 얻는 이들이 상당수다. 관련 서적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콘텐츠 출간 플랫폼 브런치에서 누적 조회 수 250만회를 넘긴 박은지 작가의 ‘제가 알아서 할게요’란 제목의 책도 그 중 하나다.
30대인 박 작가는 결혼 이후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많아져 이 책을 쓰게 됐다고 했다. 그는 “기성세대의 오지랖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하지 않는지, 사생활을 존중받을 수 있는지 등인데 아직까지는 그런 부분들이 잘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가 오지랖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 작가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며 “젊은 세대도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부모 세대와 소통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금주 교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곽 교수는 “오지랖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을 잘 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라며 “기성세대는 그래도 청년층을 이해할 수 있지만 청년층은 기성세대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먼저 나서서 청년층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약해지면서 그래도 예전보다는 오지랖으로 인한 세대 갈등이 많이 줄었다”고 평가했다. 윤 교수는 이어 “수평적이고 자신의 의견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고, 젊은 세대도 무조건 피하려 하지 말고 기성세대에게 조금씩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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