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작가의 흔적.. 박이소 대규모 회고전 '기록과 기억'

미국에 사는 동양인으로서 문화적 이질감을 느꼈던 그는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본명 박철호까지 버리고 박모(某·아무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때로는 기이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1984년 11월 추수감사절 후 4일간 코네티컷과 뉴욕에서 단식 퍼포먼스를 벌이고 밥솥을 끌고 브루클린 거리와 다리를 걸었다. 예술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 5·18 광주 민주화항쟁 등 고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무력감 등을 성찰하는 몸짓이었다.
그해 12월 27일 부모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정열을 바쳐 하면 그것이 실패이더라도(내가 보기엔 실패라도 성공이지만) 하기 싫은 일 하며 푼돈 모아 요점 없이 사는 것보다 백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고단해도 예술가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박이소: 기록과 기억'에서 치열했던 작업의 흔적을 볼 수 있다. 1984년부터 2004년 서울 청담동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20년간 쓴 작업노트 21권과 드로잉, 작품 200여 점이 설치돼 있다. 2014년 유족이 기부한 자료와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시다.
임대근 학예연구관은 "천재적인 개념 미술가라고 생각했는데, 물 아래 백조의 움직임처럼 피나는 노력을 했더라. 약간 허술해 보이는 작품도 치열한 드로잉 끝에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누나의 구박에 못 이겨 망치로 부숴버렸던 보트 '무제'가 유족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작가의 누나는 "이 배가 동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제작한 다른 작품들을 다 버리고 이 무거운 배만 한국에 가져왔다"고 자책했다고 한다. 1995년 신설된 삼성디자인교육원(SADI) 교수직을 맡아 귀국한 작가는 '박이소'(異素·낯설고 소박하다)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뭔가 엉성하고 소박한 미완성 보트처럼 그의 작품은 웅장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이번 전시에 나온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은 천장에 매달린 사각 나무틀 아래 양동이 4개가 놓여 있다. 당시 공사 중인 시설로 오인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위한 운송 전문 업체 직원들도 "이것도 작품인가요"라고 물어가면서 운반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이소는 정직하게 작업을 해나갔다. 그가 빌리 조엘의 노래 '어니스티(Honesty)'를 한국어 '정직성'으로 번안해 노래방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를 전시장에서 들을 수 있다. 녹음 테이프를 각목에 감아 제작한 작품 '정직성-2'(1996년)도 설치돼 있다. 재즈 애호가였던 작가는 직접 녹음·편집한 재즈 테이프 200개를 만든 후 "난 이제부터 남은 생애 동안 이것만 들을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뉴욕에 살 때 그는 냉난방이 안 되는 폐공장에서 배고픔과 싸워가면서 작업을 밀어붙였다. 브루클린 지역에서 실험적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해 미술계에서 소외된 이민자,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젊은 리더로 주목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 낡은 커튼에 그린 그림도 눈에 띄는데 일부러 연출한 '빈자의 미학'인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궁핍한 상황에도 그의 작품에는 위트와 유머가 살아 있었다. 종이에 부적을 그린 'DMZ 해제를 위한 실용적인 제안'은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6개국 정상들에게 보낸 작품. 그들이 수령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작가는 "부적을 태워 섞은 물 2컵을 마시면 통일이 올 것"이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커피, 콜라, 간장을 섞은 용액으로 국수 면발을 그린 '삼위일체'(1994)에서도 괴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쓰리 스타 쇼'는 왼쪽부터 커피, 코카콜라, 간장으로 별을 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색깔과 형태가 유사해 보이지만 설명이 없으면 각각의 정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작가는 "나는 구별할 수 있고 너희는 구별할 수 없음에 대한 약 올리기다"고 설명했다. 검은 액체라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지만 맛과 향은 다르듯이 언어 혹은 문화의 정체성이 미묘하게 다름을 나타낸다.

1994년작 '호모 아이텐트로푸스'는 정체성 작업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는 선언 같은 작품이다. 불상처럼 보이는 형상이 탁구대 위 네트 중앙에 심판을 보듯 앉아 있다.
전기 램프와 나무, 전선으로 구성된 '당신의 밝은 미래'(2002년)는 후기 대표작 중 하나. 각목으로 얼기설기 대강 만든 구조물 위에는 9개 밝은 조명이 고개를 당당히 들고 하얀 벽 윗부분을 밝히고 있다. 눈이 부셔 앞을 보기 힘든데 빛을 쫓아 따라간 벽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상만 존재할 뿐이다. 밝지 않은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아예 희망을 포기할 수도 없는 우리 현실을 대변하기도 한다.

2004년 부산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대형 입간판 작품 '우리는 행복해요'가 조만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옥상에 설치될 예정이다. 공허한 구호를 통한 이미지 조작을 풍자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열망을 담았다. '정말 우리는 행복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만드는 작품이다. 전시는 12월 16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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