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탁, 성적은 지명순이 아니잖아요

6월 17일 KT와의 홈경기에서 10-3 대승을 거둔 KIA 선수들이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KIA 타이거즈 제공>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다. 너무 오래전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라운드를 무대로 KIA 타이거즈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성적은 지명순이 아니잖아요.

‘5할 딜레마’에 빠져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내려가지 않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KIA의 4월 성적은 11승 11패. 5월에는 12승 1무 12패를 기록했다.

불타오르던 KT 위즈의 방망이를 상대로 위닝시리즈를 확보한 KIA는 18일 기준으로 6월 승률 0.667(10승 5패)를 기록하고 있다.

KIA의 반등을 기대하게 하는 ‘믿는 구석’은 마운드다.

물론 타격하는 김호령과 분위기를 바꾼 이창진 등 쉬어가던 타순을 살린 타석의 활약도 있지만 야구는 어찌 됐든 투수 놀음이다.

17일 KT전은 KIA의 순위 싸움에 새로운 서막을 알리는 무대 같았다.

“공을 던지는 건지 나를 던지는 건지 몰랐다”며 웃음을 터트린 승리투수. 김도현은 이날 “진짜 별로였다”고 자평할 정도로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몸에 맞는 볼까지 기록하는 등 5사사구를 남겼고 만루 위기도 맞았지만 결과는 6이닝 2실점(1자책점)이었다.

실점으로 연결된 실책도 있었지만 이창진의 슈퍼캐치 등 수비 도움도 받으면서 김도현은 마운드에서 버텼다. 계산이 서는 확실한 토종 선발이 된 김도현.

경기가 끝난 뒤에는 ‘아기호랑이’ 이호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프로 데뷔전 초구를 자신 있게 스트라이크존에 집어넣은 이호민은 3구째 안현민에게 빗맞은 안타를 허용했지만, 이정훈을 2구째 중견수 플라이로 잡았다.

로하스를 상대로 환상적인 체인지업을 던져 헛스윙 삼진을 만든 이호민은 허경민은 3구째 좌익수 플라이로 돌려세우면서 가슴 떨리는 첫 프로 무대를 끝냈다.

공은 대범하게 던졌지만 “안현민 선수였어요?”라고 반문한 이호민, 프로 첫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신인의 우당탕탕 데뷔전을 통해 KIA 벤치와 팬들은 또 다른 희망을 보았다.

KIA 불펜의 샛별로 떠오른 성영탁. <KIA 타이거즈 제공>

그리고 이날 기대감을 키운 또 다른 선수가 있었다. 김도현에 이어 두 번째 투수로 나온 성영탁이 그 주인공이다.

5월 20일 정식 번호를 받고 프로 콜업의 꿈을 이룬 성영탁은 정교함과 배짱을 앞세워 이내 자리 굳히기에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는 KIA 팬들에게도 낯선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나와 허리 싸움을 이끌고 있다.

17일 경기 전까지 10경기에 나온 성영탁은 12.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좋은 흐름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날 모습은 앞선 경기와는 달랐다.

첫 타자 배정대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지만 8개의 공을 던졌고, 김상수와의 승부에서는 볼넷을 기록했다. 안현민의 타석에서는 3루수 포구 실책도 나왔고, 이정훈의 우전 안타에 1사 만루 위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타석에 로하스가 섰다. 성영탁에게 붙었던 ‘미스터 제로’라는 타이틀이 사라지는 것 같던 순간이었지만 씩씩하게 초구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은 성영탁은 5구째 커브로 로하스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공을 잡은 2루수 박민이 이정훈을 태그한 뒤 1루로 공을 뿌리면서 성영탁의 무실점 이닝은 13.2이닝으로 늘었다.

성영탁은 “뭔가 평소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만루에 로하스가 들어오길래 신경 쓰지 말고 이닝 끝내자는 생각으로 카운트 잡아갔다. 변화구 유인구 던지니까 좋게 병살이 됐다”고 말했다.

매일 배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성영탁은 이 경기를 통해서도 배웠다.

성영탁은 “던지면서 배운 게 안 좋아도 어떻게든 존 안에 넣어 치게 해서 만들어서 잡는다는 것을 배웠다. 볼도 많고 제구도 흔들렸는데 어떻게든 이닝을 끝냈다. 안 좋았을 때도 막았다는 건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성영탁의 깜짝 등장과 성장이 더 의미 있는 것은 ‘10라운드 선수’의 활약이라는 점이다.

절대 기준은 아니지만 기회는 지명순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일단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 지명 순서가 결정되기도 하는 만큼 지명 순서는 일종의 대기표 번호 같다.

부산고 출신의 성영탁은 2024신인드래프트에서 KIA 10번째 선수이자 전체 96번째 선수로 이름이 불렸다.

정교함과 배짱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성영탁. /김여울 기자

지명 당시 성영탁에게 순번은 중요하지 않았다.

“구속이 느려서 입단한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름 불렸던 것만으로도 좋았다. 라운드보다는 이름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명되고 1주일 정도 지나서 몇 번째로 뽑혔다는 것을 생각했다.”

좋은 제구와 배짱이라는 강점에도 성영탁은 구속이라는 벽에 막혔다. 하지만 성영탁은 이를 자신을 한정하는 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성장을 위해 넘어야 할 벽으로 생각하면서 구속은 성영탁의 목표가 됐다. 확실한 목표가 있었던 만큼 성영탁의 준비 과정은 오히려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마음먹기다.

성영탁은 “지난해에는 스피드가 말도 안 되게 나와서 고민이 많았다. 스피드가 10㎞ 이상 차이가 난다”며 “이상화 코치님께서 무조건 120%로 던지라고 하셨다. 공이 안 가더라도 몸을 그렇게 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러다 보니까 스피드도 올라오고 팔 스윙도 빨라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왔고, 성영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무조건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치의 실수 없이 준비하고 있자’라는 생각이었다. 웨이트장이랑 함평에 ‘성공은 준비와 기회가 만났을 때 나온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서 기다렸던 것 같다”며 “열심히 했다.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자신감은 있었다.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준비된 자의 기회, 또 다른 기회를 위해 성영탁은 다시 준비에 집중하고 있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주전 자리에 오른 선배들이 해주는 이야기도 ‘준비’다.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워야 하니까 많이 물어보려고 한다. 선배들이 최대한 팔을 아끼라고 하신다. 갑자기 팔 푸는 상황이 생기니까 항상 준비하라고도 하셨다. 이때쯤이면 나갈 것 같다는 그림이 나오니까 항상 스스로 준비를 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 갑자기 풀면 데미지가 없는 것 같아도 있는 거니까 잘 준비하라고 알려주셨다. 또 매번 좋을 수는 없으니까 얼마나 평균적으로 유지하냐를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마운드에 올라가서 싸우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일단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마운드에서 결과도 달라지고, 마운드에 오를 기회를 얻는 것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면서 성영탁은 10라운드 선수의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호령에 이어 10라운드 선수의 반란을 꿈꾸는 성영탁. /김여울 기자

그에 앞서 김호령이 있었다.

2015드래프트에서 10라운드 102순위로 입단한 김호령은 ‘호령존’을 만든 수비 대가이다.

확실했던 수비에 비해 부족했던 타격으로 그 역시 10라운드에서 호명됐다.

수비 하나만으로 기회를 붙잡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연출했던 김호령은 올 시즌에는 타격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시행착오도 많았던 ‘타자’ 김호령의 반전, 성영탁이 그를 이어 10라운더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10라운드라 뭔가 마음에 정이 간다”며 웃음을 터트린 김호령은 “처음에는 몰랐다. 2군에서도 잘 던지고 해서 10라운드라는 것을 몰랐다. 2군에서 긴장 안 하고 제구가 잘 됐었다. 1군 올라왔을 때도 바로 그렇게 던지는 것 보고 놀랐다. 대담하게 잘 던지는 것을 보고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2살의 10라운드인데 완전 잘하고 있다. 나는 대졸이니까 늦게 시작했는데 부럽다. 지금처럼만 하면 승승장구 할 것 같다”고 성영탁의 활약을 기대했다.

성영탁에게 김호령은 간절함을 키우는 힘이다.

성영탁은 “투수로서 정말 든든하다. 불펜에서 좌중간, 우중간으로 타구가 가서 ‘이건 안타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불펜에 있는 선배님들이 ‘괜찮아 호령이 형이야’라고 말한다(웃음). 선배님과 간절함이 비슷했던 것 같다. 많이 배우고 더 간절해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직 시작이지만 성영탁은 자신이 얻은 기회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간절한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왜 나는 안되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열심히, 자기할 것 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그 한 번을 안 놓치면 좋겠다. 묵묵히 자기할 것 하다가 기회를 잡으면 좋겠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