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0주기... '천개의 바람이 되어'

[이영훈의 '유행가가 품은 역사']

오늘 304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10주기를 맞았지만 '그날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세 차례의 조사위원회, 특검, 검찰 특별수사단이 참사 전후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살폈지만 근본적인 사고 원인에 대한 속시원한 답조차 내놓지 못한 실정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주부가 지은 詩에서 유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세월호 참사 때 추모곡으로 가장 많이 불리운 노래다.

이 노래는 1932년 미국 볼티모어의 주부 메리 프라이가 지은 시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오(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에서 유래됐다. 프라이는 어머니를 잃고 상심해 있던 이웃을 위로해 주기 위해 죽은 사람이 오히려 산 사람을 위로하는 내용의 이 시를 썼다. 원전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전승되던 작자 미상의 시를 기원으로 본다.

이 시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1989년 IRA(아일랜드공화국군) 테러로 목숨을 잃은 24살의 영국군 병사 스테판 커밍스의 일화 때문이다.

스테판은 생전 무슨 일이 생기면 열어보라며 부모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겨 두었고 그의 사후 개봉된 편지에 이 시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스테판의 아버지가 스테판의 장례식 날, 아들이 남긴 편지와 함께 이 시를 낭독했고, 그 장면을 영국 BBC가 방송하여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그 외에도 영화감독 하워드 혹스의 장례식에서 존 웨인이 이 시를 낭독했고,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25주기, 미국 9․11테러 1주기에 낭독되면서 더욱 더 유명해졌다.

임형주가 한국어로 번안-개사

이 시가 노래로 맨 먼저 만들어진 곳은 일본이다.

2003년 11월 일본의 소설가이자 가수이자 유명 작곡가인 아라이 만이 영시를 번안하여 멜로디를 붙인 후 ‘천의 바람이 되어(千の風になって)’라는 이름의 싱글 앨범으로 발표했다.

‘천의 바람이 되어’는 아라이 만 이후 많은 가수들이 불러 인기를 끌었고, 2007년 테너 아키가와 마사후비가 불러 오리콘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곡이기도 하다. 아키가와 마사후비는 이 곡으로 클래식 음악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100만장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2월 우리나라의 팝페라테너 임형주가 한국어로 번안 및 개사하여 자신의 미니앨범 'My Hero'의 마지막 7번 트랙으로 수록하여 한국에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에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임형주는 이 노래를 세월호 침몰 사고 후인 2014년 4월 25일 세월호 참사 추모곡으로 헌정했으며 음원수익금 전액은 기부했다. 이 곡은 세월호 참사 추모곡 헌정 직후 7개 음원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동영상=힘형주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가 된 ‘팽목항’

2014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한 승객 476명을 태운 청해진해운 소속 세월호가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다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단원고 학생들은 들뜬 마음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던 중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진도의 조그만 어항이었던 팽목항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슬프고 비통한 항구가 되어 버렸다. 이 사고로 세월호에 탄 304명이 사망했으며, 생존자는 172명이다.

참사 3년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선체 곳곳에 뚫린 구멍과 오랫동안 쌓인 개흙으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세월호는 반잠수식 선박에 실려 동거차도 인근 해역을 출발해 2017년 4월 9일 밤 목포신항 부두에 완전히 거치됐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진도 팽목항은 여전히 그때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참사 후 노란색 리본과 추모 물품이 수도 없이 내걸렸고, 돌아오지 못하는 자녀에게 보내는 음식·신발 등이 놓였던 등대길만 세월에 빛바랜 노란 리본이 여전히 나부끼고 있다.

인양된 세월호가 옮겨진 목포신항도 세월과 싸우고 있다. 인양 후 수년간 그곳에 서 있는 세월호는 녹슬다 못해 선체 곳곳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휘었고, 선체에 쓰인 '세월'이라는 문구만이 이 배가 세월호였음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팽목항과 목포신항 뿐 아니라 인천항터미널, 안산기억관 등 세월호의 아픔이 거쳐 간 곳들에도 10년 세월의 아물지 않은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4·16해외연대가 서울시 운행중인 버스에 광고하려다 무산된 버스 광고.

도피 끝 시신으로 발견된 유병언

검경합동수사본부는 2014년 10월 세월호 침몰 원인을 ‘화물 과적과 고박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5년 11월 세월호 조타수의 상고심에서 “조타기의 결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며 이 결론을 확실히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세월호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잠수함 충돌설, 암초 충돌설, 내부 폭발설, 고의 침몰설 등 여러 가지 가설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세월호의 실질적 소유주인 유병언 세모그룹 회장 등에 대한 수사는 유병언의 도피로 난항을 거듭했고, 결국 사건 발생 3개월 뒤인 7월 말 유병언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

이 밖에 김한식 청해진해운 대표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유병언의 장남 유대균은 세월호 사건과 별도의 혐의(횡령)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또 세월호 참사 당시 승객 300여 명을 내버려 두고 배에서 탈출해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5명은 2014년 5월 재판에 넘겨졌으며 2015년 11월 대법원은 이 선장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선원 14명에게는 징역 1년 6개월~12년을 선고했다.

초동 대처,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세월호 침몰 초기 대응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세월호는 급선회로 배에 이상이 생긴 이후, 사고 수역 관할인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 VTS에 최초 신고를 해 초기 대응시간(골든타임)을 허비했다. 더욱이 세월호가 진도 VTS 관할 수역에 4월 16일 오전 7시 7분에 이미 진입해 있었음에도 진도 VTS는 세월호의 관할 해역 진입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고를 받고 사고 해역으로 출동한 해경은 여객선 안에 300명 이상의 승객이 남아있음에도 배 밖으로 탈출했거나 눈에 보이는 선체에 있는 승객들만 구조했을 뿐 세월호 내부로는 진입하지 않는 소극적 구조로 일관했다.

선장은 인명구조 등 비상상황 발생 시 선내에서 총지휘를 맡아야 하고, 승무원은 각자 역할을 맡아 탑승객 구조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선장을 비롯한 선원 대부분은 침몰 직전까지 탑승객에게 객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자신들은 배 밖으로 나와 해경 경비정에 의해 제일 먼저 구조됐다.

특히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조류가 빠르다는 위험천만한 맹골수도였지만, 이 지역의 운항을 지휘한 사람은 입사 4개월째인 3등 항해사로 드러났으며, 더욱이 이곳을 통과할 때 선장은 조타실을 비운 것으로 드러났다.

세월호가 선수를 제외하고 사실상 완전히 침몰된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정도였는데,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잠수요원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사고가 난 지 8시간이 지난 4월 16일 오후 5시였다. 특히 사고 발생 첫날인 4월 16일은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3분의 2 이상이 해상에 떠있는 상태여서 상당수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이 과정에서 '전원 구조'라는 방송 오보가 현장의 생존자 구조작업에 혼선을 줬다.

그러나 처음 수백 명의 구조요원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수중수색은 3차에 걸쳐 16명이 투입되는 데 그쳤다. 선체 부양을 위한 리프트백과 잠수부들의 이동을 돕는 대형바지선도 너무나 늦게 투입됐다. 너무 가슴 아픈 대목이다.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5명

세월호 희생자 304명 중 미수습 실종자는 5명이다.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한 단원고 박영인·남현철 학생, 양승진 교사, 권재근·혁규 부자 등 5명의 모습은 사진으로만 세월호 옆에 남았다.

미수습 희생자인 단원고 양승진 교사의 부인 유백형 씨는 “시신 없이 빈 관으로 장례를 치러 가슴이 저리다.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며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그날 그대로다. 항상 현재 진행형이다”고 말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세월호 추모곡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동영상=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10년의 세월,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 한다. 잊혀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세월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눈물이 서서히 마를 때 쯤, 더 이상 봄꽃 아래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것 같다고도 한다.

그러나 부모는 다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마음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날, 그 바다에 있을 것이다.


※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