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유니가 전하는 독일 와인 이야기

조회 1752025. 1. 6.
비주류로 여겨온 독일 와인은 사실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다.
피아니스트 유니가 그동안 걸어온 와인의 길과 함께 직접 경험한 와이너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프켈러 와인 ⓒ alamy

유니, 와인을 말하다

와인에 빠진 건 대학 시절부터다. 음악을 하던 멋진 선배들 덕분에 다양한 와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와인은 향기, 소리, 색깔, 맛, 이 네 가지 감각을 깨우며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다가왔다. 진한 보르도의 깊은 풍미, 우아하고 청순한 피노 누아, 열정적인 카베르네 소비뇽. 세계 각국의 와인은 저마다 다른 매력을 지녔고, 이를 음미하는 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았다.

영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시절, 와인은 내 삶에서 멀어져 있었다. 청렴한 음악인의 삶을 살며 와인과 거리를 두었지만, 독일로 이주하며 다시 와인을 만났다. 내가 정착한 바이에른주의 프랑코니아 지역은 전원 풍경과 지평선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곳이다. 이곳에서 와인은 자연과 함께하는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발견한 저렴한 와인들이 특히 그랬다. “이게 독일 와인이구나” 하며 매번 새로운 브랜드를 시도했고, 점차 독일의 최고급 와인까지 접하며 깊이 빠져들게 됐다.

2020년, 코로나19로 모든 활동에 제약이 생겼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제한된 시기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집 주변을 둘러싼 포도밭이었다. 독일 와인은 내수시장에서 사랑받는 덕분에 수출량이 많지 않다. 대신 포도밭에서 장인정신으로 빚고, 동네 와인 페스티벌에서 사랑받는 소박함이 독일 와인의 매력이었다. 이 와인들이 한국에서는 얼마나 낯설까 생각했다.

좋은 음악을 발견했을 때처럼, 이 훌륭한 와인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음악처럼, 와인도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이 와인들을 한국에 소개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와인을 통해 음악과 자연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유니와인’은 그렇게 시작됐다.

세계 최고(最古) 와이너리

내가 거주하는 뷔르츠부르크에는 1128년 대주교가 세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레지던스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의 지하에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호프켈러 와이너리가 자리한다. 이곳은 지금도 전통에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방식을 더해 와인을 만든다.

호프켈러는 전 세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로, 친절한 디렉터가 전해 주는 독일 와인의 장인정신과 역사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와이너리에는 1128년 설립된 이후 50년 단위로 연표를 정리해 둬 와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괴테와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이 이 와인을 즐겼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1918년에는 바이에른주에서 이 와이너리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왕족부터 G7 정상회담까지 최고 권위자에게 전해진 와인에 대한 스토리도 체계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호프켈러 와이너리는 단순히 와인을 생산하는 곳을 넘어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독일 와인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 shutterstock

실바너의 매력

프랑코니아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는 마치 코냑 병처럼 생긴 둥근 병이다. 이 병에는 지역의 상큼한 매력을 고스란히 담은 와인이 들어 있다. 리슬링을 포함해 다양한 품종의 와인이 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실바너였다.

실바너는 리슬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독일에서 최고의 화이트와인 품종으로 사랑받아 왔다. 한국에서는 리슬링이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바너를 마셔보면 그 매력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처음부터 강렬한 첫사랑 같은 느낌보다는, 마실수록 점점 깊어지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음식과의 페어링이 훌륭해 식사와 함께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와인이다.

최초의 실바너가 탄생한 곳

독일에 머무는 동안 주변의 모든 지인이 카스텔 와인을 즐겼다. ‘도대체 카스텔이 어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직접 가보기로 했다. 포도밭 사이로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카스텔이라는 도시. 도시 이름도, 와이너리 이름도 카스텔이었다.

카스텔 지역에는 여전히 카스텔 가문이 살고 있었고, 현재도 카스텔성에 왕자가 거주한다. ‘왕자님이 만드는 와인은 어떤 맛일까?’ 하는 푸릇한 호기심이 드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피노 누아를 꼭 마셔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알고 보니 카스텔 와인은 독일 와인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7세기에 실바너 품종을 독일에 처음 들여와 널리 재배한 인물이 바로 카스텔 가문의 왕자다. 마치 포도 품종의 문익점 같은 존재인 셈이다.

카스텔 라이트슈타이그 슈패트부어건더를 한 모금 마셨다. 우아하고 향기로운 와인이 입안에 퍼졌다. 청순한 레드빛에 장미 향기가 스며들고, 마지막에는 내가 좋아하는 버터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혼자만 즐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맛이 훌륭했다.

뒤이어 카스텔 실바너도 맛봤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환상적인 풍미가 가득했다. 한 모금 마시면 초록빛이 연상될 만큼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치 소풍을 떠나는 듯한 설렘이 찾아온다. 상쾌한 바람 속에서 보사노바를 듣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실바너. 그것이 카스텔 와인의 매력이었다.

무셸칼크와 깁스쿠퍼

독일 와인의 테루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바로 '무셸칼크(Muschelkalk)'와 '깁스쿠퍼(Gipskeuper)'다. 이 두 단어는 각각의 토양 유형을 지칭하는 말로, 독일 와인의 독창적인 풍미와 개성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먼저, 무셸칼크는 한국어로 '패각 석회암' 또는 '조개 화석 석회암' 정도로 번역된다. 오래된 바다의 흔적이 담겨 석회질이 풍부한 토양으로, 와인에 독특한 미네랄 풍미와 신선함을 부여한다. 와인을 마실 때 미묘한 짠맛과 미네랄의 여운이 느껴진다면, 무셸칼크에서 비롯된 것이다.

깁스쿠퍼는 '석고 점토' 또는 '석고가 포함된 점토질 토양'이라는 의미로, 석고와 점토가 섞인 독특한 조합의 토양이다. 석고는 토양의 배수가 원활해 포도나무 뿌리가 물에 잠기는 것을 방지하고, 점토는 건조한 날씨에도 포도나무에 수분을 안정적으로 공급한다. 깁스쿠퍼 토양은 이 두 가지 성질이 조화를 이루는 셈이다. 이런 토양에서 자란 포도는 천천히, 고르게 익어간다. 깁스쿠퍼에서 탄생한 와인은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그 깊은 풍미와 함께 땅의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다.

ⓒ 곽유니

유니, 와인을 연주하다

와인과 음악은 서로 다른 언어지만, 그 감동은 닮아 있다.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독일 와인의 매력에 빠져들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열릴 콘서트를 기획한 이유이기도 하다. 와인을 마시는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켜 감각을 깨우고, 새로운 스토리와 음악을 함께 즐기는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기회로 음악과 와인, 내가 사랑하는 두 재료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ㅣ 덴 매거진 2025년 1월호
글 곽유니
사진 곽유니, alamy,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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