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너를 꼭 기록하겠다"...'여성 강력반장 1호' 박미옥이 제주 서재에서 책 쓰는 이유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함께 울고 웃는 시간을 가집니다."(모드 르안의 '파리의 심리학 카페' 중에서)
제주 구좌읍 하도리 당근밭 위에 지은 '박 반장'의 서재는 이 책 속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의 한 카페를 본떴다. "책과 사람과 마음이 머물다 가는 공간"으로 찾아오는 이들 누구에게나 활짝 문을 열어놨다. 서재지기는 '여경'이라 낮춰 불렸던 대한민국 여성 경찰의 전설, 박미옥(56)씨다. 스물세 살에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성 형사가 됐다 33년 3개월을 경찰로 살고 퇴직한 그는 여전히 '박 반장'으로 불리는 게 익숙하다.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게 그의 설명.
30년 동안 강력계 형사로 사건 현장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다. 현장의 혈흔과 코끝에 각인된 냄새… 그를 보듬은 건 책이었다. "젊은 날 자취생활을 할 때부터 방 하나의 한쪽 벽면은 책으로 채웠어요. 퇴근 후 쓰레기 같은 마음이 담긴 몸을 흔들의자에 맡기고 30분을 가만히 왔다 갔다… 책을 보면 꽂히는 문장이 있었죠. 그런 시간을 살다보니 책이 주는 위안이 정말 컸어요."
책 읽는 경찰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박미옥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경찰이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88년 순경으로 입직했다. 1991년 서울지방경찰청(서울시경)이 창설한 최초의 여자형사기동대에 원년 멤버로 합류한 후 승승장구. 그의 이력 앞에는 모두 '최초'가 붙는다. 9년 만에 순경에서 경위까지 특진을 거듭하더니 형사 10년 차인 2000년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이 됐다. 본인이 세운 최초의 기록을 스스로 갈아치우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갔다.
화려해 보일지언정 외로운 길이었다. "몇 번씩 도망가기로 마음먹었다가도 계속 도망치는 사람으로만 살 수는 없기에 제대로 하고 떠나자 다짐한 것이 형사 생활 30년에 이르렀다"는 그의 고백. 훗날 한 인터뷰에서는 "길이 나지 않은 곳에서 길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는 방향성이 될 것 같아서 감당하기로 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일까. '금녀의 벽'을 깨고 30년간 흉악범을 상대했던 그는 고정된 강력계 형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웃는 인상에 말은 수행자를 닮았다.
'왜 태어나고 죽어야 하지? 어차피 죽을 삶이라면 왜 버겁고 힘들게 계속 살아야만 하는 거지?' 어린 박미옥을 사로잡은 질문들이다. 할머니의 마지막 숨을 홀로 목격하고, 가까웠던 사촌오빠를 잃은 경험 탓이다. 일찍이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그는 철학책을 탐독했다. 열여섯 살 터울의 큰오빠가 중학교 입학 선물을 사준다며 그를 서점에 데려갔을 때 고른 책은 독일 철학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허세는 그쪽에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박미옥이 웃으며 말했다. 당시에는 다 읽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니체를 다시 손에 쥔 것은 경찰이 되고 나서다. 손 내밀면 닿는 곳엔 늘 책 '니체의 말'을 뒀다. "제 자리가 생긴 이후로는 항상 경찰서 책상에 꽂혀 있었어요. 처음에는 니체를 염세적으로 읽었다면, 다시 볼 때는 '초인' 개념을 강조한 니체가 인간의 의지와 힘을 강조했다는 것을 깨쳤죠."
영국의 세계적인 여성 법의학자 수 블랙이 쓴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생각하며 읽었다. 그가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사건 현장에서는 많은 토론이 필요해요. 균형 있는 질문과 대화가 있어야 죽음과 사고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거든요. 죽음에 대해 가장 고민하며 읽은 책입니다." 세계 각국에 한국 선불교를 전파한 숭산스님의 가르침과 '쇼펜하우어 아포리즘'도 깊게 읽었다.
경찰 역사 새로 쓰고 명퇴… 제주에 서재를 차렸다
박미옥의 서재는 인간의 마음과 선악에 대한 책으로 가득하다. 순환 보직 제도에 따라 2017년 제주로 발령받아 근무하면서 이곳에 정주하기로 한 그는 충동적으로 땅을 사고, 이듬해 집을 지었다. 마당에는 다락방이 딸린 25평 규모의 서재를 꾸몄다. 해마다 1,000만 원어치 책을 사들였다. 인문, 철학, 감정, 여행, 정신분석, 죽음, 최근 관심이 생긴 예술 분야까지. 서가에는 그가 엄선한 4,000여 권이 빽빽이 꽂혀 있다.
서재지기로의 인생 제2막이 열렸다. 박미옥은 2021년 정년을 8년 앞두고 미련 없이 명예퇴직했다. 지난해 책 '형사 박미옥'을 펴낸 것도 일대 사건이었다. "(경찰 업무 중에 얻은) 타인의 정보를 가진 사람인 만큼 책은 안 쓴다"는 게 평소 그의 신조였다. 그러나 서재를 만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단순히 과거 경험치와 책 몇 줄 읽은 걸로 이 안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어요. 그때 나도 정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죠."
책을 쓰면서 박미옥은 스토리가 아니라 '왜 쓰는지'에 집중했다. 그는 탈옥범 신창원 검거부터 '서남부 살인의 추억'이라고 불렸던 정남규 사건, 숭례문 방화 현장 감식, 만삭의 의사 부인 살인 사건 등 동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굵직한 사건들을 맡아 해결했다. 하지만 책에는 이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부러 연도나 이름을 알 수 없게 썼다. 사건을 단순히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고, '사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는 이유다.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수갑 채우는 맛"에 경찰이 됐다던 초짜 형사 시절이 박미옥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범죄를 접할수록 더 궁금해졌다. 사람에 대해. 그는 심리학, 프로파일링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법의학을 전공했다. 2007년 서울시경 과학수사계 프로파일링 팀장으로 가는 계기가 됐다. 그는 "그전에는 범인 잘 잡는 형사였다면, 사람 공부를 한 이후로는 지휘 방법과 수사 스타일도 달라졌다"고 했다.
박미옥은 편견에서도 자유롭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종종 불거지는 '여경무용론'은 편견이 작동한 대표적 예다. "경찰을 찾아오는 이들은 한두 가지 성격이 아니에요. 남성, 여성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수많은 민원을 갖고 오세요.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향돼 있다면 제대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요? 다양성은 수많은 국민을 대하는 경찰이 가져야 할 가장 필요한 존중의 자세입니다." 그는 여성 경찰을 폄하하는 시선에 대해 "경찰이 일하는 현장을 단순히 물리적 힘의 논리로만 본 것"이라며 "수많은 기술이 필요한 현장에서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실제 대응 능력과 전략, 작전이 달라진다"고 했다.
박미옥은 또 "수사할 때도 내 경험치 범위 내에서 추리를 하면 항상 오판을 하게 된다"며 "범인의 생각은 뭐였을까, 항상 뒤집어 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범죄자의 말을 제대로 가려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을 나쁘게 보기보다 아프게 보기 시작"했단다. 이게 다 피해자를 위한 일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범행의 진짜 이유가 드러나야 피해자의 억울함이 덜어진다는 것.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란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정 없이 범인을 잡는 일에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형사가 아니라 사냥꾼이죠."
결국 서재도 '형사 박미옥'의 연장선 위에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로 현장에서 만난 사람보다 이제는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삶이나 사건 현장이나 매한가지다. 먼저 가본 자와 나중에 그 길을 걷는 자가 서로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을 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본 자라서 품고 있는 두려움과 안 가본 자라서 끓어오르는 용기를 서로 나누고 자극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박미옥의 가슴에 두고두고 새겨진 사건은 미제로 남은 서울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 "죄인 같은 마음으로" 현재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는 그는 "너(살인자)를 꼭 기록해 두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싣는 기자에게 영원한 '박 반장'은 말했다. "끝까지입니다." 오른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채.
제주=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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