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장소를 보라. 왱구님들 어릴 적 한 번쯤은 읽어봤을 소설 어린왕자의 그림들이 담벼락마다 그려져 있다. 어린왕자가 사는 행성과 별들도 보인다. 언뜻 보면 어린왕자 테마의 마을인가 싶은데,반전이 있다.

첫 번째 사진은 대전, 두 번째는 충남 조치원, 세 번째는 부산 해운대다. 모두 똑같은 어린왕자 벽화를 그려놓은 것.

여행 덕후 왱구들이라면, 엇비슷한 국내 관광지 풍경에 실망한 적 한 번씩은 있었을 테다.특히 최근엔 관광지 어딜 가나 벽화 하나씩은 눈에 띄는데.

벽화 산책로, 벽화 테마길, 벽화골목, 벽화광장, 벽화거리, 벽화쉼터, 벽화정원, 벽화 길, 벽화존··· 그래 이거 다 해서, 전국에 벽화마을만 200개가 넘게 있다고.유튜브 댓글로,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벽화마을이 많은지 궁금하다”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했다.

실제로 벽화마을은 어느 순간 체인점처럼 불어나, 관광 분야의 요아정처럼 됐다.

[경남 도시재생지원센터 관계자]
벽화 거리가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우후죽순처럼 생겼어.골목에 들어가면 통일성이 없어. 지게 지고 가는 거 구루마 끌고 가는 그림 꽃 그림 이거밖에 없는 거야.

우리나라는 어쩌다 벽화 공화국이 된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벽화 조성이 단기적 성과 확보가 가능한 ‘가성비 사업’ 이기 때문이다.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지방은 관광객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저비용으로 빠르게 조성할 수 있는 벽화마을은 그야말로 치트키 같은 존재.싸고, 빠르고, 효과도 확실했을 때가 있었다. 거기에 인허가까지 자유로우니, 지자체 전용 마법카드인 셈.

[한양대 관광학과 정란수 교수]
실제로 이런 담벼락이나 기존에 있었던 자원을 갖고 거기다 그림을 그리는 형태는 그게 어떤 개발이라든지 어떤 인허가에 대한 부분 이런 것들과 크게 상관없이 좀 더 쉽고 용이하게 그리고 비용도 저렴하게 할 수 있어서 그래서 이런 것들을 그냥 카피해서 가지고 가는 경우가 좀 많죠.

2021년 서울시내 벽화 조성에 쓰인 예산은 고작 시 전체 도시재생사업비의 0.004%다.이 정도면 거의 안 쓰려다 실수로 결제된 수준.

게다가 4~5년이라는 짧은 사업 기간 내, 큰 문제 없이 스무스하게 성과 확보가 가능했다. 아이디어가 없어 허덕이는 지자체 입장에서, 벽화 사업은 검증된 솔루션이자 교과서 같은 모델인 거다.

특히 SNS의 부흥과 함께 벽화마을 열풍은 더 커졌다. 사실 말만 벤치마킹이지, 모방이나 다름없었다.마을의 역사나 특성과는 1도 상관없는 인스타용 벽화들만 늘어났다고.

[정도영 아트쿵 실험 미술 대표]
천사 날개가 되게 예쁘다 해서 천사 날개가 되게 유명해진 케이스가 있는데 곳곳에 그게 또 다 있다면은 또 그 획일화가 될 수밖에 없겠죠. 여기저기가 다 결국에는 좀 똑같이 되지 않나…

다른 마을에 죄다 같은 그림이라니, 진정 탈출할 수 없는 벽화 유니버스다. 하지만 벽화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제대로 유지 보수가 되지 않아 관광객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한 건데,실제로 몇몇 마을은 사실상 방치된 상태라고.

[정도영 아트쿵 실험 미술 대표]
벽화의 최대 유지 보수가 5년입니다. 흉물이 되기 되게 좋아요.

취재하다 알게된 건데, 벽화를 따라 그리는 지자체의 저작권 개념은 한없이 희박한 듯하다.인천중구청은 디즈니의 동의 없이 백설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의 캐릭터를 활용해 차이나타운 옆에 ‘송월동 동화마을’을 조성했다.

논란이 되자 중구청은 “공공 목적으로 활용했고, 위법이라면 벽화를 없애겠다”는 명대사를 남겼다.

왱구님들을 위해 직접 이 마을을 찾았는데, 실사영화 만들기 바쁜 디즈니 덕분인지 마을은 저작권 단속을 피해 잘 살아남아 있었다. 근데 여전한 의문. 인천 송월동과 백설공주가 도대체 무슨 상관?

한때 관광지 성과 제조기로 각광받은 벽화마을은, 가성비만 따지다 결국 가성비상사태를 맞았다. 이제 무작정 베껴 그렸거나 흉물이 되기 십상인 벽화마을 대신, 각 지역 특성에 맞춘 재밌고 차별화된 관광지 풍경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