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 보다 좋지만 아무도 안 알아줘서 망한 수입 세단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고급차 시장은 그다지 만만하지 않은데요. 앞서 무성의한 상품 구성으로 한차례 처참한 실패를 겪었음에도 GM 대우는 이 여유로운 호주인들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윽고 2007년 4월, 서울모터쇼에 양산형 모델이나 다름없는 쇼카를 선보이면서 많은 소비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죠.

스테이츠맨을 빼닮은 얼굴에 늘씬하게 뻗은 옆모습, 두툼하게 튀어나온 앞뒤 펜더와 극단적으로 짧은 프론트 오버행은 플래그십 대형 세단이라기보다는 스포츠 세단을 연상케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차명이 확정되지 않았는지 GM 대우 컨셉트카 작명법에 발맞춰 'L4X'라는 이름표를 붙였고 전문 매체와 소비자들 사이에서 '스테이츠맨 후속' 등으로 통했어요.

그렇게 2008년 9월 정식 출시된 L4X는 '베리타스'라는 완전히 새로운 차명으로 등장했습니다. 차명 베리타스는 '진실', 또는 '진리'를 뜻하는 라틴어로, 이 모델 역시 전작과 동일한 '홀덴 스테이츠맨', '카프리스'의 뱃지 엔지니어링 차량이었지만, 정치인을 의미하는 스테이츠맨의 실패를 교훈 삼은 것인지 이번에는 한국 시장을 위한 전용 차명을 부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별도의 제품 이름을 붙였다는 것부터 한국 시장을 신경 썼음을, 즉 성의를 보여주는 대목이었죠.

외관은 전작의 수수한 분위기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후드 위의 오너먼트 엠블럼을 제외하면 화려한 장식 요소가 없었고 L4X 쇼카에서 선보였던 세로형 그릴도 빠졌지만, 도톰해진 헤드램프, 가로선을 강조한 그릴과 범퍼로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인상을 줬으며 고급차다운 무게감도 충분했습니다.

이 모델 역시 질리지 않는 깔끔함과 단정함, 견고함이 특징인 당시 GM 계열 디자인의 특징을 고스란히 따랐기 때문에 '토스카'나 '라세티 프리미어' 등 GM 대우의 다른 라인업과도 잘 어울렸어요. 미등을 켜면 눈썹처럼 들어오는 포지셔닝 램프, 그릴의 형상 덕분에 당시 판매되던 벤츠 C클래스와 유사한 느낌이 들기도 했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오리지널 호주 사양에 제공하던 블랙 베젤 헤드램프가 아닌 크롬 베젤이 적용되어 카리스마가 좀 떨어져 보이는 게 아쉬웠어요.

눈에 띄는 부분은 측면이었습니다. 전작과 동일한 전장으로 여전히 동급에서 가장 긴 수치를 자랑했고 견고한 디자인의 알루미늄 휠은 최대 18인치 사양까지 제공해 꽉 찬 느낌을 연출했습니다.

특히 낮게 가라앉은 전면부, 사선으로 솟구치는 캐릭터 라인으로 역동감을 부여하면서 전작이 가지고 있던 지루한 느낌과 대형 세단 특유의 둔중한 느낌을 최대한 배제했어요. 가만히 있어도 마치 달려 나갈 듯 스포티했고, 프론트 펜더에 붙은 방열구 장식과 그 속에 자리 잡은 방향 지시등도 그러한 느낌을 배가시켰죠.

뒷모습도 이전 스테이츠맨의 분위기를 적절히 이어받으면서도 신형 모델다운 세련된 분위기로 거듭났습니다. 떡하니 박혀있는 GM 대우 로고가 고급감을 해친다는 지적을 수용해 전용 엠블럼을 부착했고 두툼한 크롬 라인이 무게감을 더했어요.

다만 마치 물고기처럼 뒤쪽으로 갈수록 안으로 둥글게 말려드는 형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실제 수치보다 작아 보인다는 게 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두툼한 오버 펜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전면부는 그나마 나았지만, 뒷모습만 따로 보면 5m가 넘는 거대한 차체를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없었죠.

또 중후함을 주고자 트렁크 끝을 차분하게 낮추는 동급 플래그십들과 달리 치켜 올라간 엉덩이, 원형으로 처리한 듀얼 머플러 등 경쾌함과 스포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좋았지만, 반대급으로 한국에서 '고급 세단'이라는 차급에 요구되는 중후함이 다소 떨어졌기 때문에 보수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주 구매층 사이에서는 스타일 면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습니다.

대신 실내가 보수적이었습니다. 전작에서 지적받은 거의 모든 부분을 보완하면서 드디어 플래그십 대형 세단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구색을 갖췄지만 몇몇 고집스러운 부분들도 함께했어요.

먼저 스포티한 디자인의 스티어링 휠, 아우디 A8이나 폭스바겐 페이톤을 연상시키는 4-실린더 타입 계기판이 남다른 분위기를 연출했고 속에 자리한 LCD 정보창들도 한글을 지원해 편의성이 높아졌습니다.

또 스테이츠맨 실내의 아킬레스건이 됐던 핸드 브레이크, 여전히 풋 파킹이나 전자식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운전석 쪽에 제대로 놨고 콘솔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디자인해 깔끔한 실내 분위기를 연출했어요.

중앙에 자리한 창문 스위치가 이 차가 스테이츠맨의 직계임을 암묵적으로 드러냈죠.

이 밖에 아예 확 올리기에는 부담스러웠는지 허리춤까지만 올려놓은 내비게이션 및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오디오 역시 9개 스피커의 보스 프리미엄 사운드로 업그레이드해 음악 감상에 즐거움을 더했고 겨울철 따뜻하게 데운 워셔액을 분사해 와이퍼가 작동 중 얼어붙는 것을 막는 핫샷, 커튼 에어백 등 각종 편의 및 안전장치를 추가한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뒷좌석에서의 편의성도 대폭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운동장 같은 레그룸은 여전했고 남다른 느낌을 줬던 헤드레스트 모니터는 1개의 루프 모니터로 대체 됐지만, 대신 전 트림 기본 적용됐죠. 걸치적거렸던 유선 헤드셋도 블루투스 무선 헤드셋으로 업그레이드해 편의성을 높였습니다.

여기에 작동 범위가 넓은 리클라이닝 시트, 전동식 후방 블라인드와 수동식 측면 커튼은 물론 풀옵션 사양에 한해 뒷좌석의 냉/난방 온도까지 별도로 설정할 수 있는 '트라이존 공조 시스템'과 롤러 방식의 마사지 시트까지 지원하면서 수천만 원 비싼 에쿠스나 체어맨 같은 경쟁 플래그십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편의 사양으로 무장했습니다. 마치 건반처럼 암레스트에 나란히 수 놓인 전동 시트 버튼들이 참 특이했죠. 심지어 헤드레스트까지 전동이었어요.

외관에서 짐작되듯 트렁크 공간도 광활해서 골프백을 최대 4개까지 실을 수 있었습니다.

단,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눈에 띄는 개선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는데요. 대세를 거스르는 센터패시아 디자인, 버튼의 작동 질감과 소재감이 차급에 비해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물론 가격차를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조사건 소비자들이건 이 차를 그랜저와 SM7이 아닌 오피러스와 체어맨, 에쿠스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했으니까요.

또 끝끝내 추가되지 않은 통풍 시트, 6.5인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지상파 DMB나 내비게이션을 지원하는 건 환영할 만했지만, 가뜩이나 옵션 값도 비싼데 조작 편의성과 화질이 나빴고 후방 카메라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단에 달려있는 것도 불편했는데 이게 또 터치스크린이 아니어서 하단에 조그 스틱으로 깨작깨작 조작해야 했죠. 다행히 애프터마켓 장인들의 손을 빌리기엔 수월했지만요. 또 블루투스 기능이 있지만 말 그대로 전화 통화만 지원하는 핸즈프리만 탑재되어 있는 것도 아쉬웠고요.

참고로 중국 시장에서는 과거부터 인지도가 높은 '뷰익' 브랜드를 통해 '파크애비뉴라'는 이름으로 수출됐는데 아무래도 뷰익 브랜드 자체가 GM 내에서 준 프리미엄으로 포지셔닝되어 있는 만큼 인테리어도 이쪽이 훨씬 고급스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파워트레인은 전작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기존 2.8L 사양을 빼고 전 트림을 3.6L로 통일했습니다만, 하위 모델인 '토스카 프리미엄 6'와 뒤이어 등장한 신형 라세티마저 6단 자동 변속기를 달고 나온 마당에 기어 역시 기존의 5단을 고수하는 바람에 페이퍼 스펙 면에서 실망하는 소비자들도 적지 않았어요.

그래도 다행히 상위 트림에 고배기량 엔진이 기본이 된 만큼 주행 성능 부분에서는 불만이 크지 않았습니다. 6기통 엔진과 이에 맞물리는 5단 변속기의 매끄러운 질감, 부드러운 가감속에 초점을 맞춘 페달 세팅, 대형 세단을 기대하는 폭신한 승차감은 직접 운전하기에도 뒷좌석에서 편안함을 누리기에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생김새만큼 스포티하진 않았지만 핸들링을 비롯한 거동이 비슷한 체급의 대형 세단 중 가장 날렵하다는 평가도 여전했어요. 또 후륜구동인 만큼 전륜구동 대형차나 가장 직접적인 경쟁 모델 오피러스와는 결이 다른 안정감과 승차감을 선사했죠.

출시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2009년 상반기에는 한 차례 마이너 체인지가 이루어졌습니다. 내/외관에서의 변화는 없었지만 개선된 파워트레인을 장착한 것이 특징이었는데요. 캐딜락 CTS에 먼저 탑재된 신형 3.6L 직분사 엔진을 적용, 출력과 토크를 끌어올렸고 이에 발맞춰 변속기도 6단으로 변경해 효율까지 개선했어요.

특히 신형 엔진은 낮은 RPM에서 최대 토크가 터져 나와 더욱 경쾌한 주행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죠 이게 거의 반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라 초기 물량 사신 분들은 좀 억울했을 수도 있겠네요.

외관상에서의 차이는 거의 없었지만 이 모델부터 듀얼 머플러 팁이 듀얼 트윈 머플러 팁으로 변경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베리타스는 전작의 실패가 무성의한 상품 구성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GM 대우 개발진을 아예 홀덴으로 보내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현지화 작업을 거치면서 좀 더 보완된 상품성을 갖추게 된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판매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죠. 오너드리븐과 쇼퍼드리븐을 모두 아우르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으나 결국 어느 한쪽도 완벽하게 잡지 못한 애매함만이 부각되어 양쪽 고객 모두에게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회사 이미지도 물론 크게 작용했고요.

출시부터 단종까지 국내 총 누적 판매량은 2,561대, 그마저도 GM 대우의 임원진용 차량, 관련 계열사 사장님들을 비롯한 이해관계에 계신 분들의 차가 대부분이었어요.

무엇보다 등장 타이밍이 애매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GM 대우가 이 차량을 처음 소개한 것은 2007년 봄, 하지만 정식 출시가 같은 해 하반기도 아니고 1년이 훌쩍 지난 2008년 하반기에 이루어지면서 많은 잠재 고객들이 경쟁차로 이탈해 버렸습니다. 스테이츠맨 때만 해도 고리타분한 깍두기 차들이 대부분이었지만, 2008년 하반기에는 제네시스가 있었거든요.

결국 최대 1,50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할인 끝에 남은 재고 물량을 모두 소진하고 2010년 소리소문 없이 단종됐습니다. 특유의 유니크한 매력과 동급 대형 세단 중 가장 경쾌한 주행질감으로 소수의 오너들만 만족하며 타는 차가 됐고, 비주류 모델들이 으레 그렇듯 중고차 시장에서도 입소문을 통해 매니아들만 알음알음 찾는 모델이 됐죠. 애초에 판매 볼륨 자체가 적어서 부품 수급과 수리비가 만만치 않았다는 게 복병이었지만요.

이밖에 인기가 없는 것도 서러운데 여러 차례 리콜을 겪으면서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던 워셔액 동결 방지 기능인 '핫샷'이 아니라 다를까 장치가 과열되어 차량에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결함이 발견되어 장치를 제거하고 각 차주들에게 옵션 금액에 해당하는 12만 원 상당의 보상금을 현금으로 지급했습니다.

설상가상 기존에 제공되던 길쭉한 폴딩 타입 시동키가 키박스에 꽂혀 있을 때 주행 중 무릎에 걸려 ACC로 돌아가면서 시동이 꺼진다는 황당한 결함이 보고되어 짧뚱한 고정형 키로 교체되었습니다. 가뜩이나 버튼 시동 스마트키가 슬슬 대중화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전히 키를 꽂고 돌려야 했던 베리타스의 체면이 더욱 구겨지는 리콜이었죠.

한편 전작 스테이츠맨처럼 GM 대우의 플래그십 세단으로써 GM 대우가 협찬을 진행한 드라마에 높으신 분들을 위한 의전용 차로 종종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주얼리 정과 이순재 옹이 타는 차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지금까지 호주에서 영입된 GM 대우의 플래그십 용병 '스테이츠맨' 그리고 '베리타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준수한 주행 성능, 수입 모델 치고는 나름 합리적인 가격표를 달았지만 정작 사소한 몇몇 디테일을 신경 쓰지 못해 아쉽게도 두 모델 다 실패하게 됐는데요. 사실 이것은 뱃지 엔지니어링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해가 갈수록 소비자들의 입맛이 세분화됐고 이에 따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남다른 개성을 찾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특정 브랜드만의 강력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차량을 선호하기 시작했죠.

본 콘텐츠는 해당 유튜브 채널의 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덕분에 상부상조식 차량 공유는 한때 GM의 강력한 무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어갔습니다. 비슷비슷한 생김새와 무난한 상품성에 로고만 다르다고 차를 사주는 시대가 저물어버린 것이죠.

같은 방식으로 차를 팔았던 미국 빅3 모두가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던 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거예요. 이로 인해 후속 개념으로 등장한 '한국형 라크로스'의 현지화 작업에 더욱 신경을 쏟았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상품 구성, 더 나아가 국내 생산을 추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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