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만 벌겋게 눈뜬 밤…찾아오지 않는 아침[책과 삶]
도둑질·살인 등 범죄까지 행해
해가 뜨지 않아 깨어날 수 없어
중국 3대 작가 옌롄커 장편소설
현실사회 ‘잡단 광기’ 빗대 표현
해가 죽던 날 |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글항아리 |520쪽 |2만2000원
“이른바 몽유는 대낮에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이게 뼈에 새겨지며 골수에 사무치도록 생각하다가 잠들어서도 깨어 있을 때의 생각들을 이어가고 꿈속에서도 그런 상념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햇볕이 가장 강하다는 음력 6월 6일. 해가 저물 무렵부터 산간마을 가오톈촌에는 몽유하는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열네 살 소년 녠녠은 자신도 몽유를 하게 될지, 몽유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장마를 앞두고 종일 조급하게 밀을 탈곡했던 장씨 아저씨는 잠든 상태에서도 밀을 털어내고 있었다. 장례용품을 운영하며 매일 화환 종이를 오리던 엄마는 자면서 꿈속에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근면의 습속과 노동에 대한 강박은 꿈속에서도 낮의 일을 끊임없이 재촉했다. 녠녠은 “뭔가 가슴에 새기고 뼈에 새겨야 할 정도로 중요한 생각이 골수에 흘러들어온 적”이 없어 아무래도 몽유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시간이 좀 더 흘러 깊은 밤이 찾아오자, 몽유하는 마을 사람들의 수는 더 늘어나 수백 명에 이른다. 몽유의 양상도 그저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로 보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진다. 꿈은 일상의 습관이라는 표면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욕망과 이기심을 파고 들어가며 도덕의 심연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도둑질, 강간, 살인 등의 범죄가 거리낌 없이 발생하고, 급기야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대량 살육전이 벌어진다. 해가 뜨는 것만이 이 집단 몽유를 깨버릴 수 있지만, 아침이 되어도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위화, 모옌과 함께 중국 문단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옌롄커의 장편소설 <해가 죽던 날>이 국내에서 번역·출간됐다. 옌롄커는 인민대학교수이자 루쉰상·라오서 문학상을 받으며 중국에서 1급 작가로 꼽히지만, 정작 그의 소설 대부분은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돼 있다. 인민해방군 병사와 상관 부인의 불륜을 그린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출간 당시 마오쩌둥 사상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중국 현실 세계에 대한 도피와 풍자를 담은 <사서>와 <작렬지> 역시 금서가 됐다. <해가 죽던 날>도 우화적 형식과 상징을 통해 사회의 집단 광기와 비이성의 일면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다.
<해가 죽던 날>의 중심인물은 화자 녠녠과 그의 아버지 린톈바오다. 린톈바오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에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녠녠이 태어나기 전, 그가 스물 두 살 때 정부는 더는 매장을 허용하지 않고 시신을 모조리 화장해야 한다는 법률을 만든다. 정부는 법을 어기고 몰래 시신을 매장하는 집을 밀고하면 포상금도 주겠다고 말한다. 가난한 집안의 린톈바오는 밀고를 해 벽돌과 기와 살 돈을 마련하고 집을 지어 아내를 얻었다.
하지만 밀고 당한 이웃들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정부는 매장한 무덤을 폭파하고 매장된 시신을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는 천등형(중국 고대에 잔인한 형식으로 치러졌던 화형)에 처한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개혁의 완수를 위한 일종의 “증오의 연극”이었다.
이웃들에게 깊은 죄의식을 갖게 된 린톈바오는 화장장에서 시신을 태운 후 나오는 사람 기름이 고가에 매매돼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사들여 보존한다. 몽유가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자 이웃들의 얼굴을 씻어 잠을 깨우고 커피와 각성 차를 끓여 먹이는 등 “성인 같은 일”을 한다. 기상이변으로 해가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를 불러들일 방법을 강구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죄를 이어간다.
소설은 17시를 시작으로 다음 날 6시까지, 한두 명으로 시작했던 몽유가 새벽 무렵 끔찍한 집단 광기로 증폭되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전개한다. 집단 광기의 현장은 1960년대 잔인한 숙청으로 이어졌던 문화대혁명을 상기시키고, 몽유는 경제 발전을 내세운 시진핑의 정치 지도 이념인 ‘중국몽’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소설에는 특이하게도 녠녠의 이웃으로 작가 본인인 옌롄커가 등장한다. ‘옌롄커’는 녠녠과 리톈바오와 해를 불러들이는 과정에 함께 참여한다. 수백 명 어쩌면 1000명 이상이 죽었을 그 밤의 일에 대해 정부는 “실증되지 않은 유언비어” 정도로 취급하고 “양호한 사회 생활질서 회복”을 말한다. 녠녠은 정부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하고 실종됐던 이야기를 옌롄커가 써주기를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사나흘 내에 그 ‘사람의 밤’ 이야기를 써내고 우리 집안 전체의 이야기를 그 안에 포함시킬 수 있게 해주십시오.” 사실과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금기시되고 표현의 자유가 제약된 곳에서 한 편의 문학이 탄생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막막하면서도 기적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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