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인도 재계 1위, 타타의 별이 지다
지난 주 인도 산업계의 큰 별이 졌습니다. 인도 최대 기업 타타그룹을 현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 라탄 타타가 10일 세상을 떠난 것이죠. 한국에 삼성그룹이 있다면 인도엔 타타그룹이 있다고 말할만큼 인도의 상징과도 같은 타타 그룹.
1937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난 라탄 타타는 미국 코넬대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수재로 1962년 타타그룹에 합류한 뒤 여러 계열사의 현장 업무를 맡으며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70~1980년대 흔들릴 뻔 한 여러 계열사를 회생시키고 뛰어난 경영 수완을 인정받아 1991년 타타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해 인도 최대기업 타타를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100여개가 넘던 계열사를 재정비하고 통합했으며 과감하게 핵심자산을 매각하는 대신 미래 먹거리 산업에 대한 투자를 단행하며 공격적인 인수합병에 나섰는데요.
2000년 영국의 유명 홍차 브랜드 테틀리를 인수했고 2007년 유럽의 대표 철강기업 코러스를 합병했습니다. 2008년엔 세계적 자동차 브랜드 제규어 랜드로버까지 인수하며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용을 갖췄는데요. 한 때 잘나갔던 한국 자동차 회사, 대우 상용차 역시 2004년 타타에 인수돼 현재까지도 타타대우상용차라는 회사가 운영 중입니다.
라탄 타타는 특히 오토바이를 많이 타는 인도 서민들이 너무나 손쉽게 교통사고로 죽어 나가는 걸 보고 오토바이만큼 싼 가격에 안전할 수 있는 차를 만들란 명령을 내렸는데요. 그렇게 탄생한 300만원짜리 자동차, 타타 나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차이자 라탄 타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글로벌 타타를 만든 위대한 경영자 라탄 타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당연히 타타 집안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에 걸맞게 타타 그룹을 탄생시킨 창업자의 이름도 당연히 ‘잠셋지 타타’인데요. 비유하자면 잠셋지 타타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이고, 라탄 타타가 그의 아들이자 글로벌 삼성을 만든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정도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라탄 타타는 잠셋지 타타의 직계 자손은 아닙니다. 잠셋지 타타는 어떻게 인도의 삼성그룹을 탄생시켰고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일지, 지금부터 살펴보시죠.
종교인 집안서 태어난 이단아, 사업가의 탄생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1839년, 인도의 서부 구자라트 주 작은 마을 나브사리에서 잠셋지 타타가 누서완지 타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타타 가문은 종교 탄압을 피해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피난온 사제 집안이었습니다.
즉 돈벌이나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누서완지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뭄바이에서 수출 무역 회사를 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문에선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가문의 전통을 깨고 사업에 도전한 것이죠.
아들 잠셋지 타타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 많고 적극적인 아이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무역 사업은 그의 시야를 넓혀주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특히 당시 인도는 영국의 지배 탓에 영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고 인도인들이 중심이 된 경제 공동체나 산업이 존재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인도 사람들 마음 한켠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계속해서 커져가고 있었는데요. 짐셋지 역시 이러한 마음이 없을리 없었습니다. 어렸던 잠셋지 타타는 인도인에 의해, 인도에서 펼쳐지는 독자적인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키워 갔습니다.
식민지배의 설움, 타타의 탄생
견문을 넓히기 위해 고향을 떠나 당시 인도 최대 도시 뭄바이에 있는 엘핀스톤 대학을 졸업한 짐셋지 타타는 곧바로 아버지의 무역 회사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무역회사답게 그는 일본, 미국, 유럽 등 전세계 곳곳을 다녀볼 수 있었는데요. 우연히 그는 중국으로 출장을 가게 됩니다.
당시 중국을 휩쓸었던 아편 무역에 대한 사업 스터디를 위해 중국을 찾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다가옵니다. 바로 중국의 면화 산업인데요. 잠셋지 타타의 머리에서 번쩍 빛이 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노동집약적 산업이던 면화 사업을 인도에서 펼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그는 인도로 돌아와 자신의 회사를 세우겠단 결심을 합니다.
그렇게 1868년 타타는 한 파산한 석유 공장을 사들여 알렉산드라 면화 공장으로 뒤바꾸며 회사를 창업합니다. 자본금 2만1000루피로 창업한 이 회사가 바로 타타그룹의 시작입니다. 그는 제법 잘 된 사업을 2년뒤 정리해 다시 한번 목돈을 마련합니다. 그후 그는 1874년 뭄바이로부터 600km 떨어진 나그푸르에서 ‘the Central India Spinning, Weaving, and Manufacturing Company’를 만들어 상장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도 최대 상업도시 뭄바이에서 면화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인도 최대 도시인 뭄바이에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해야 훨씬 수월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죠. 하지만 타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뭄바이와 다소 멀더라도 싼 땅에다 큰 공장을 짓고 여기서 저렴한 생산비로 생산한 제품들을 대량 판매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란 걸 일찌감치 감지했죠. 이미 뭄바이서 나그푸르로 오가는 철도는 있었고 나그푸르역 인근에 지은 공장이면 충분하다 판단했습니다. 또한 공장을 돌리기 위한 물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를 얻기에도 여기가 더 나았습니다.
이러한 경영전략은 기업 경영이란 개념조차 없던 당시 인도 산업계에선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또 그는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제도를 운영하며 전근대적 기업 운영 방식을 탈피해 현대적 기업 운영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면직업에서 큰 성공을 이어가던 그는 인도에서 제일가는 섬유사업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지속적으로 품질을 향상시켜 인도의 모든 종류의 섬유와 천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거듭났고 부드러운 면으로 유명한 이집트 농부들의 재배방법을 채택하며 혁신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 한켠의 꿈을 끄집어 내기 시작합니다. 인도인들이 중심이 된 인도의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미국서 찾은 기회, 성장 발판된 철강
1870년대말,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은 타타는 당시 미국의 석학 토마스 칼라일의 강연에서 “철강이 전세계를 좌우할 것”이란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그가 방직 사업을 철강사업으로 확대해야겠단 결정을 한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그의 목표를 다시 한번 재정립하며 4대 목표를 세웁니다. 철강회사를 세우고 이를 위한 수력발전소를 설립하며 세계적 수준의 교육기관과 독특한 호텔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위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영국발 산업혁명의 여파가 인도로 넘쳐흐르던 당시, 타타는 기반 산업이 취약한 인도의 산업 발전을 위해 철강 산업 도전을 선언합니다. 문제는 당시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의 지배층에서 이러한 타타의 철강회사 설립에 반감을 표하면서 시작됩니다.
국가 기반산업이라 볼 수 있는 철강산업을 인도인 사업가가 주도적으로 하겠다는 사실은 영국인들에게 불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론 역시 타타에겐 부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타타의 굳건한 의지와 애국심은 꺾을 수 없었습니다. 1900년, 영국 정부는 타타의 철강회사 설립을 허가했고 그렇게 타타의 철강사업의 개화가 시작됩니다.
또한 1903년 그는 뭄바이 콜라바 해안가에 타지마할 호텔을 개장하며 그의 꿈에 다가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을 이루기에는 꽃이 만개하는 시기는 다소 늦었습니다. 1904년 독일을 방문중이던 타타는 지병으로 인해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두 아들은 타타의 기틀을 바탕으로 3년 뒤인 1907년 타타스틸을 설립해 인도 철강 산업의 중추로 자리매김합니다.
참고로 타타스틸은 아시아 지역 최초의 철강회사입니다. 뒤이어 타타그룹은 1917년 타타수력전기회사를 설립하며 창업자 타타의 수력발전소 설립의 꿈도 이루게 됩니다.
성공한 사업가, 인도의 상징이 되다
사업가 타타의 역량도 뛰어났지만 그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타타 공장은 근로자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와 주택 등을 제공하고 안전한 작업 환경을 갖췄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선 혁신적이었고 타타 공장은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또한 인재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그는 인도 최초의 고등 교육기관, 즉 ‘타타 연구소’를 설립하며 인재 발굴에도 진심이었습니다. 사업가 타타의 또다른 별명은 바로 기부왕 타타이기도 합니다. 그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막대한 재산을 기부했습니다. 실제 20세기 최고의 자선가로 손꼽힐만큼 그의 기부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해도 1020억 달러를 기부하며 20세기 최고 자선가 목록에도 이름을 올린 바 있습니다.
또한 그는 1900년대 초 간디가 주도한 스와데시 운동이 시작되기도 한창 전인 1800년대 후반부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해외에서 수입되는 제품 수를 줄이고 인도에서 모든 물건을 만들고 소비하는 스와데시즘의 강력한 선구자로 불렸습니다. 비록 인도의 독립을 보기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독립정신은 타타의 기업 문화로 대대손손 내려오고 있습니다.
타타 철강은 인도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타타 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타타 그룹은 자동차, 통신, 에너지, 호텔 등 다양한 산업에 걸쳐 발전했으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라탄 타타와 창업자 잠셋지 타타는 무슨 관계일까요. 사실 라탄 타타는 잠셋지 타타의 친아들 라탄지 타타가 입양한 나발 타타의 아들입니다. 쉽게 말해 잠셋지 타타의 양-증손자인 셈이죠. 부모를 일찍 여의면서 자칫 방황할 뻔한 라탄 타타의 변신.
어쩌면 타타의 과거이자 현재, 미래였던 라탄의 죽음이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일 듯 합니다. 글로벌 기업 타타를 만든 라탄 타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인도를 위한 기업 정신을 드높였습니다. 위대한 경영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타타그룹의 영광은 계속 이어질 듯 합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