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가 악용했던 계엄의 비극사
‘계엄’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동네 게시판에 단정한 글씨의 계엄 포고문이 부착됐는데 맨 아래 큼직한 이름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였다. 그러니까 그 벽보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월26일과 신군부에 의해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된 12월12일 사이에 나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엄 포고는 성격이 조금 다른 두 계엄령 사이에 끼어 있다. 당시 부산 지역에는 이미 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열흘 전 터진 부마항쟁 때문이었다.

1979년 10월17일 부산 지역의 비상계엄령은 10·26 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됐다(바로 위에 등장하는 계엄 포고문에 따른 것이다). 왜 제주도가 제외됐을까. 전국 아닌 특정 지역에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모든 행정기관은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명령만 듣는(〈조선일보〉 1997년 12월3일)” 상황이 된다. 별안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국방부 장관을 통해 군을 통제하고 싶어 했고 제주도가 제외되면 ‘전국’을 면할 수 있기에 들어간 문구였다. 그러나 1980년 5월17일 또 한번 상황이 바뀐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된 것이다.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면 그 줄을 쥔 이가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 줄을 쥔 자가 전두환이었다.
이렇듯 ‘계엄’이라는 단어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흉물스러운 말뚝으로 박혀 있다.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 1948년 4·3 사건 때 이미 계엄이 실시됐고, 여순 사건, 6·25 등 전시나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푸르른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계엄령은 전시나 사변 때보다는 권력자의 도구로 악용된 역사가 더 다채롭다.
독재자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계엄령의 시조(始祖)라면 역시 1952년 5월25일 부산, 경남, 전남, 전북 일원에 내려진 비상계엄령을 들어야 할 것 같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던 당시 헌법으로는 재선을 바라볼 수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회에서 부결됐고 국회는 되레 내각제 개헌을 준비한다. 이승만이 이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 내민 것이 비상계엄령이었다.
“부산에 2개 대대 병력을 투입하라.” 그러나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이 명령을 거부한다. “(···) 정사(政事)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 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됨은 물론 누란의 위기에 있는 국가의 운명이 일조에 멸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것(육군 훈령 217호).” 이승만은 노발대발했지만 이종찬은 굽히지 않았다.
결국 움직인 것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던 원용덕 헌병 사령관 휘하의 헌병들이었다. 그들은 출근 중이던 국회의원 버스를 송두리째 끌고 가버렸다. 입법부 활동을 원천 봉쇄하고 겁박하여 이승만은 기어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개헌을 이뤄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라는 영국 〈더타임스〉의 저 유명한 일갈이 과하지 않을 꼬락서니다.
3시간짜리 비극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그러나 꽃을 피워낼 의지만 있다면 장미꽃은 쓰레기통이 아니라 핵폐기물 속에서도 피는 법이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4·19 혁명으로 한국인들은 이를 입증했다. 이 혁명 와중에도 계엄령은 선포됐다. 서울 지역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이었다. 송요찬은 제주 4·3 사건의 학살자로 악명 높고 부하들로부터 ‘석두(石頭)장군’이라 불린 이였으나 4·19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보인 처신만은 현명했다. 군은 시위대와의 충돌을 자제했고, 무장 시위대와 대치 과정에서 계엄군 사단장(조재미 준장)이 단신으로 시위대와 협상을 벌여 해산시키는 일도 있었다.
시위대로부터 ‘대한민국 군대 만세’라는 환호가 울려 퍼졌지만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그 환호는 잦아들었다. 군인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 때마다 곶감 빼먹듯 군대를 동원한 계엄령과 위수령(계엄령과 달리 군부대 시설물 보호 목적이지만 시위 진압에 즐겨 활용됨)을 발동했다. 1964년 졸속 한·일 회담에 반대한 시위대에 맞서 계엄령(6·3 사태)을 쳐들었다. 1971년 12월에는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고 중국이 유엔의 상임이사국이 되는 ‘국제정세 변동’에 대응한다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 포고문에서 나오는 음산한 문장 하나.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 이 문장은 10개월 뒤인 1972년 10월17일 선포된 무시무시한 ‘전국 비상계엄’ 이후 등장한 유신의 서막이었다.
자유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앗아가버린 ‘유신체제’의 주인은 7년 후 부산에 떨어진 계엄령 와중에 피살됐다. 점차 확대일로를 걸은 계엄령 속에 한국 현대사는 전두환의 광기와 의로운 광주, 그 뒤를 잇는 1980년대의 탄압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 후로 오랫동안 계엄령은 우리의 기억 선상에서 사라져갔다. 1987년 6월 항쟁의 폭발에도, 1991년 전국을 뒤덮은 강경대 학생 타살 규탄 시위 때에도, 1996년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소탕작전 와중에도, 2008년과 2016년 수백만 명이 뛰쳐나온 촛불시위 때에도 ‘계엄’이라는 단어는 일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다. 이 희미해지는 ‘계엄의 추억’을 자그마치 2024년의 현직 대통령께서, 열 살 소년이 쉰다섯의 중년이 된 세월을 뛰어넘어 끄집어내 주셨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 금지”를 외치는 2024년의 계엄령 포고문은 그 이전에도 유례가 없을 만큼 살벌했다. 특정 직군을 향하여 “말 듣지 않으면 ‘처단’하겠다”라는 엄포 역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무후무의 사례는 하나 더 있다. ‘도무지 이유가 없는’ 계엄령. 역사상 모든 계엄령 뒤에는 찬반을 떠나서 뭇 사람이 짐작하는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의 비장한 계엄령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폭거’를 일삼는 야당이 ‘반국가 세력’이라면 전 국민의 반 이상을 ‘척결’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대통령이 느끼는 ‘위기’를 과연 누가 느꼈단 말인가. 이 막막한 ‘이유 없음’ 앞에서 대한민국의 젊은 군인들만 억울한 소모품이 됐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고, 시민들로 에워싸인 장갑차 안에서 “복귀 중입니다” 호소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겨울 밤의 소극(笑劇) 같은, 이 3시간짜리 비극을 우리 역사는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어설픈 계엄령? 아니, 내란 미수.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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